베드로후서 강해 13 구원받은 두 의인의 교훈 벧후 2:9-14

관리자 | 2012.12.13 17:54 | 조회 6271

* 본문/ 벧후 2:9-14 * 제목/ 구원받은 두 의인의 교훈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Christian이라고 하는 이름이 어떻게 붙여졌는지 아십니까초대교회 역사 속에서 스데반의 순교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이 여기저기 흩어졌습니다. 이 흩어진 유대인들이 안디옥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이방인들에게 전도했습니다. 그곳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크게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고 표현되어있습니다(11:21). 그때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힘을 합하여 교인들을 1년간 가르쳤습니다. 사도행전 11:26은 이들이 사회로부터 어떠한 이름이 붙여졌는지를 알려줍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예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생긴 기원입니다. 즉 이방인들이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워 그 도리를 따라 살아갈 때 비로소 성도, 크리스챤이 되는 것입니다.

    *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의 현 주소는 어디입니까? 성도의 정체성은 과연 분명하고 확실하게 규정되어 있습니까? 그저 교회에 적을 두고 있다고 하여 성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그 원리와 원칙 그리고 요구하시는 바에 대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있을 때 비로소 Christian 이라는 명칭이 주어질 수 있겠습니다.

 

교회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는 어떠한가요? 성도들에 대한 이웃 불신자들의 평가는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재의 우리 성도들의 상황은 한 마디로 영적 혼란기에 처해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혼란기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Easy Going 신앙으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쉽게, 간단히, 재미있게, 부담 없이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자존심과 기분만을 만족시켜주기를 원하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자신을 내어 놓고 진실한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형식에 매달리게 됩니다. 화려하고 매력적이고 외형적인데만 관심이 있어서 성경중심의 삶을 살아가는데 매우 어려워합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는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는 제 2 의 종교개혁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적 혼란기일수록, 신앙 타락의 시기일수록 개인의 바른 신앙적 모습은 더욱 더 중요한 것입니다성경 역사에 있어서 이것은 확실하게 증명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베드로의 유언적 말씀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강력한 경고입니다. 당시 교회 안에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비 성경적이고 거짓된 교훈은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영적 혼란기를 보면서 성도들을 격려하며 경고하고 있습니다.

* 벧후 2:9-10a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1. 구원받은 두 가정

첫 번째 예는 노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예는 롯입니다. 이 두 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형상은 동일합니다. 즉 윤리적 방종과 타락 그리고 무질서한 영적 혼란입니다.

* 벧후 2: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우리는 창세기 6장과 18장에서 이러한 현상을 분명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의 홍수 심판의 동기는 인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삶의 원칙에 대한 반역과 원칙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 사람들의 죄악의 관영함, 마음의 생각의 악함이 그 원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타락된 길로 끊임없이 치달아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반역하는 인간의 최종 결과가 홍수심판입니다

 

롯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 19:24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이 두 가지 유명한 심판의 예는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고 믿는 하나님은 거짓 교사들과 그 추종자들을 심판하고 경건하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확실하게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9절은 바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십니다.”

* 벧후 2: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이 진리는 오늘날 타락된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경고하시고 교훈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예로부터 어떠한 바른 신앙적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까? 두 가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2. 영적 의미와 교훈 두 가지

첫째는 양보다는 질이 문제다. 둘째는, 구별 의식이 중요하다.

 

1) 양보다 질

두 예를 통하여 쉽게 발견하게 알게 되는 것은 숫자입니다. 노아시대 엄청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노아의 7식구 뿐이었습니다. 노아는 마지막 8번째 사람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바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벧후 2: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롯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여러분들이 아시다 시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는 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조심스럽게 질문하였습니다. 만약 의인 50명이 있으면 그 성을 멸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만약 의인 50명만이라도 있으면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의인 그렇게 많이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숫자는 계속하여 내려갔습니다. 50-45-40-30-20-10까지 !!!

* 18: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의 안목에서 의인 10명이 없었던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가운데서 구원받은 사람은 롯의 식구 3 사람 뿐이었습니다.

 

오늘날은 통계의 시대입니다. 숫자가 말하는 사회입니다. 얼마나 모이는가? 얼마나 받는가? 얼마나 규모가 크냐에 따라 그 세력이 인정받게 됩니다. 숫자가 적다는 것은 힘이 없다는 말이 되고, 내세울 것이 없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나아가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가 어렵고 결국에 가서는 존립 자체의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요 원칙입니다. 그러나 성도여러분, 성경의 원리는 그와 다릅니다. 숫자와 규모가 아니라, 말씀의 원리에 대한 순전한 믿음과 헌신으로 하나님 앞에서 진실과 정직 그리고 겸손한 순종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충분히 방주는 산 중턱에서 짓고 있는 노아의 삶의 현장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충분히 알고 있는 롯이 어떻게 죄악의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면서 고통을 받았을 것인지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온전한 구원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이러한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 역시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 고전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기록하였느니라

 

구원은 결코 숫자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말씀을 존중하고 그 말씀을 사모하여 자신의 삶의 현장 속에서 세상을 이겨 나아가며 순결을 유지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 구별의식

두 번째 원칙은 구별의식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요 인치심을 받은 자임에 대한 확실한 의식입니다다음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 벧후 2:20-22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교리적으로 설명하기에 쉽지 않은 말씀이지만 이 말씀 가운데서 주시는 영적 교훈은 참으로 심각합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히브리서에도 있습니다.

* 6:4-5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것은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에서 다시 얽매이고 지면라는 개념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입니다. 얽매이다 (empleko-to entangle-헝클어지다, 발목 잡히다. 혼란스럽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과거의 육적인 것을 완전하게 끊지 못하고 지지부진하게 있다고 다시금 그 문제에 빠져 혼란스럽고, 그 문제에 발목 잡혀 빠져버리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 과연 그럴 수 있는가? 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은 사람이 어떻게 타락할 수 있으며, 다시 옛 도리에 얽매어 다시 돌아갈 수 있는가? “입니다. 왜냐하면 한번 부르신 부름은 결코 취소됨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리적으로 설명하려면 복잡하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베드로의 21-22절의 말씀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 그러한 사람은 결코 변화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개는 어디까지나 개이며, 돼지는 어디까지나 돼지일 뿐이어서 개는 토한 것을 도로 먹고, 돼지는 아무리 깨끗하게 씻겨놔도 다시 그 더러운 곳으로 돌아가고야 만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안에서 확실한 변화를 받지 못하면 언제든지 다시금 세상으로 육으로 되돌아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이러한 진리를 분명하고 쉽게 이해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 13 18-23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그렇습니다. 구원은 결코 세력이 아니며 분위기가 아니며 외형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어떤 종교적인 열심과 업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리를 온전히 믿고, 그 말씀 속에서 철저한 자기 부정과 말씀 순종으로 나타날 때 주어진 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초대교회 유명한 변증가이며 설교가인 Turtullian 이라는 교부가 있습니다. 그가 예수를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간증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일련의 죄수들이 한가지로 내 몰렸다. 그들은 맹수들 앞에서 먹기 감에 불과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기 위하여 몰려와 소리 소리를 질러댔다. 일단의 무리들은 남녀노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집단 사람들이 무서운 맹수들 앞에서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걱정의 그늘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들 조용한 미소로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것인가! 과연 그들 속에는 어떤 확신이 있기에 그 무서운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그렇게 자유롭고 평온할 수 있단 말인가?”

 

성도 여러분, 성도란 구별된 자를 의미합니다. 무언가 다르고, 차이가 나고, 변화된 모습의 사람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가려면, 이 세상에서 떠나가야 합니다! 적당하게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구별이란 격리가 아닙니다. 구원이란 이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성도 본연의 특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과부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의 특징을 사도 요한이 지적한대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요약됩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바울 사도의 가르침대로 성령 안에서 인도받는 삶입니다.

* 5:22-26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3. 두 가지 사역

1) 의를 전파하며 살아라.

* 벧후 2:5 ---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노아는 바로 의-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전하며 120년간을 그 힘든 방주를 짓는 동안 행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의 삶의 현장은 어떠합니까? 바로 구원주 되시며 심판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써 전하며 이 세상을 구별되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2) 의분을 가지고 단호하게 살아라.

* 벧후 2: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롯은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그 죄악의 세상 가운데서 영적 고통을 심각하게 받으며 살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때 바른 신앙을 위하여 결단을 내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식으로 세상 가운데 구별된 의식으로 확실하게 살 것을 교훈합니다.

 

결론

* 1:5-7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러분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마지막 시대에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며 가족 만이라고 온전히 구원하는 일에 힘쓰기기 바랍니다. 또한 롯과 같이 죄 가운데서 고통으로 느끼며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고 철저하고 단호한 성도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믿음의 사람 한 두 사람이 중요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005년 6월 26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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