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궤로 인하여 떠는 자 사무엘상 4:13 설교; Edmund Calamy 번역 원광연목사

無益박병은목사 | 2014.12.08 21:36 | 조회 9681

에드먼드 칼라미 (Edmund Calamy: 1600-1666)

 

* 제목/ 하나님의 궤로 인하여 떠는 자 * 본문/ 삼상 4:13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릴 즈음이라” (삼상 4:13)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2장과 3장에서 나이 많은 엘리 제사장이 그의 악한 아들들의 부패한 행위들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심판을 선언하셨었고, 그 심판의 말씀이 4장에서 그대로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심판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사람 4천명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때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모여 이 난국을 어떻게 수습할지를 논의하였습니다. 장로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치셨음을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라고 외치며 안타까워합니다. 그리고는 결론을 내리기를, 이 큰 난국을 수습하는 길은 실로에서부터 여호와의 언약궤를 옮겨다가 전쟁터에 가져다 놓는 길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장로들은 홉니와 비느하스를 보내어 언약궤를 옮겨오게 했습니다. 언약궤가 함께 있기만 하면 그 언약궤가 이런 재난에서 구원해 줄 것이라고 상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정말 치명적으로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중에 없었기 때문에 그런 엄청난 심판이 그들에게 임한 것이 아니었고 그들의 죄악이 진 중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심판이 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린 자들은 언약궤로도 보호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군대에게 또 한 번 엄청난 살육이 일어납니다. 이번에는 삼만 명이나 되는 군사가 살해당했고, 홉니와 비느하스도 함께 죽임을 당하였고, 언약궤마저도 블레셋에게 빼앗겨버립니다. 그런데 늙은 엘리 제사장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는 나이가 98세나 되어 기력이 쇠하여 전쟁터에 나갈 힘이 없었습니다. 그저 전쟁터에서 가까운 길 곁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습니다. 거기 앉아서 언약궤가 과연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엘리가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었습니다. 왜요? 혹시 언약궤를 빼앗기지 않을까 염려해서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두 아들이 어떻게 될지를 염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궤가 어떻게 될지를 염려했던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에는 세 가지 사실이 나타납니다.

1. 나이 많은 엘리 제사장이 언약궤에 대해 염려했다는 것,

2. 나이 많은 엘리 제사장이 언약궤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었다는 것,

3. 나이 많은 엘리 제사장이 자기 두 아들과 자부(子婦)와 그 자녀들의 안전보다

언약궤의 안전을 먼저 걱정했다는 것.

 

1. 하나님의 언약궤

엘리가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궤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늙은 엘리의 마음이 그 궤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어야 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궤는 하나님께 속한 기구들 가운데 가장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그 궤는 지극히 거룩한 것이어서 가는 곳마다 그 주위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데리고 다윗 성에서부터 저를 위하여 건축한 궁에 이르러 가로되 내 아내가 이스라엘 왕 다윗의 궁에 거하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 하였더라’(대하 8:11)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궤는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였습니다.

 

시편에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 . .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99:1)라고 했습니다. 이 그룹들은 언약궤 위에 위치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소였고, 그의 백성을 만나시는 장소였고, 그들에게 응답하시는 장소였습니다. ‘속죄소를 궤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 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25:21-22).

 

이 언약궤는 하나님의 발등상이었고 하나님의 모든 백성은 그 하나님의 발등상 앞에서 그에게 경배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99:5).

 

언약궤는 또한 이스라엘의 영광이요 능력이었습니다. ‘그 능력된 자를 포로에 붙이시며 자기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78:61). 언약궤는 하나님의 원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궤가 전쟁터에 등장하면 블레셋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우리에게 화로다. 하나님이 진중에 임하였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이 궤를 가리켜 여호와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 인에게로 돌아오소서하였더라’(10:35-36).

 

한 마디로 말해서, 이 궤는 하나님이 은혜로이 그 백성 중에 임재하신다는 하나의 표적이요 눈에 보이는 증표였던 것입니다. 언약궤가 안전하면 그 백성도 안전했습니다. 언약궤가 그들과 함께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약궤가 사라졌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이 물러가셨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위로하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는 역사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한 노인이 여기 앉아서 언약궤에 대해 염려하며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저는 엘리를 가리켜 선한 노인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엘리가 선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아들들이 악에 빠지도록 내버려두었다는 것 때문입니다. 사실 그의 잘못은 정말 컸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는 엘리는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째로, 엘리는 자기의 잘못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그대로 듣고 인정했습니다: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삼상 3:18).

 

그리고 둘째로, 그가 선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언약궤에 대하여 그렇게 염려한 사실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었도다.’

 

, 언약궤는 다음의 세 가지를 미리 보여주는 모형(a type)이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언약궤에서부터 말씀하셨듯이,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언약궤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형이었습니다. 언약궤가 율법의 두 돌비를 보존하는 기구였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교회도 성경을 보존하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언약궤는 그리스도의 규례(ordinances)의 모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언약궤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셨듯이, 하나님은 그의 규례들을 통해서 그의 경륜과 위로와 은혜를 그 백성들에게 전달하시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해서 언약궤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2. 하나님의 궤의 안전에 대한 성도의 자세

 

이제 본문의 말씀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궤가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은 머리에 생각이 있고, 마음이 떨립니다. 둘째, 하나님의 참된 자녀는 자기의 아내나 자녀나 재산의 장래보다 언약궤의 장래에 대해 더 염려하고 더 걱정합니다.

 

1) 하나님의 궤에 대한 염려와 떨림

그러면 먼저 첫째 사실부터 생각해 봅시다. , 하나님의 궤가 빼앗길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은 머리에 생각이 있고 마음이 떨린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니면, 이 본문의 가르침을 복음의 옷을 입혀서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 복음이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 복음의 규례와 복음의 사역자들이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이 일에 대해서 떨리는 마음과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 찬다는 것입니다.

 

제 말씀들 주의 깊게 잘 들으세요. 저는 궤를 빼앗길 때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궤가 잃어버렸을 때에 엘리는 목이 부러져 죽었고 엘리의 자부 역시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을 때에 엘리의 자부는 자식을 출산한 일로도 위안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내 아이였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길 때라고 하지 않고, 궤가 빼앗길 위험에 처해 있을 때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위험에 처해 있고, 복음의 사역자들이 위험에 처해 있고, 복음의 규례들이 빼앗길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은 생각이 많아지고 마음에 걱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과 함께 가지 아니하시겠다고 경고하시자,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잃어버리는 일에 대해서 크게 근심하고 아무도 몸을 단장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33:3-4).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향하여 애통하니라’(삼상 7:2, 한글 개역 성경은 여호와를 향하여 애통하니라여호와를 사모하니라로 번역하고 있다, 역주).

 

여기서 여호와를 향하여 애통하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 하나님이 언약궤 앞에서 말씀해 주시기를 애통하여 사모했다는 뜻입니다. 사무엘하 11:10-11에서 다윗은 우리아에게 집으로 가서 유하게 하려고 했으나 우리아는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며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또한 열왕기상 19:10에서 엘리야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그러므로 언약궤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슬퍼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궤의 안전에 대해 염려하는 이유

 

하나님의 궤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백성은 어째서 그렇게 근심하고 안타까워하는지 네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궤에 대한 그들의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듯이(87:2), 하나님의 백성도 하나님의 규례와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26:8)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27:4)라고도 합니다. 이렇듯, 사랑이 그런 진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어린 크로에수스(Croesus)는 벙어리였는데도, 자기 아버지가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한 것을 보고서 내 아버지를 죽이지 말라!’ 고 소리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궤에 대한 사랑이 그렇게 지극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도들은 궤가 위험에 처할 때에 도무지 잠잠히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62:1) 하시기까지 도무지 잠잠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궤에 대해 개개인이 깊은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관심은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친구 집이 불이 나고 있을 때에 누구든지 어쩔 줄 모르는 애타는 감정이 생기듯이 말입니다. 여러분, 지난 주간 여러분은 아주 안타깝고 슬픈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절대로 잊지 못할 것입니다.

 

즐거운 축제 분위기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하나님이 물밀듯이 역사하셨는지 모릅니다. , 불에 탄 자들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궤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안식처시며,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업이요 몫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기 시작하시면, 그들은 그저 곤란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규례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석이요 보화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빼앗기거나 잃어버린다면 큰 실망과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시면, 그리스도인은 그것으로 인해서 극심한 곤란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궤가 위험에 처할 때에 근심하고 염려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궤를 잃어버리면 그 민족에게 엄청난 해가 닥치기 때문입니다.

 

궤를 잃어버린 민족이여, 화가 있을지로다! 이방신을 섬기는 헬라인들에게는 아폴로 신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신상이 자기들 가운데 서 있기만 하면 절대로 화가 없고 반드시 보호를 받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사람들에게는 방패가 있었는데, 그들은 그 방패를 간직하고 있으면 로마가 절대로 전쟁에 패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사라질 때에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몇 가지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빼앗기면,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으리로다’(1:4).

이것은 교회의 탄식이요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빼앗기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구석으로 몰립니다. 이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빼앗기면, 많은 영혼들이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복음이 사라지면, 여러분의 영혼이 위험에 처하고 맙니다. 그러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빼앗기면, 하나님의 원수들이 하나님을 모욕하며,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고 떠듭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이 승리를 얻습니다. ‘내 뼈를 찌르는 캍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42:10). 하나님의 궤가 빼앗기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발로 짓밟힘을 당하시고 하나님의 규례들이 더럽힘을 당하고 짓밟힘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마치 무장한 군대처럼 하나님을 향한 모독과 무신론(無神論)이 성행하게 됩니다.

 

(4) 하나님의 궤가 위험이 처할 때에 하나님의 백성이 근심하고 염려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궤를 잃어버린 책임이 그들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늙은 엘리 제사장이 그렇게 마음으로 떨었던 것은 특별히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궤를 빼앗기도록 하셨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두 아들들을 벌하고 다스리지 못한 죄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큰 살육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으로 떨며 근심했던 것입니다.

 

아마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 중에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게끔 만드는 데 일조(一助)하지 않았다고 양심으로 분명히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 양심이 찔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잘못을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궤를 우리에게서 거두어 가시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 고결한 순교자 브렛포드(John Bradford, 1510-1555: 로마 가톨릭 계의 메리 여왕 치하에서 화형으로 순교하였음. 역주)는 기도 중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여, 메리 여왕 치세에 교황주의가 들어오게 된 것은 제가 복음에 대해 감사치 않았기 때문이옵니다. 선왕(先王)이신 에드워드 6세께서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신 것도 제가 복음을 받고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옵니다.’ 또한 메리 여왕 치세 때에 국외로 도피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잉글랜드에서 복음을 취하여 가신 것이 바로 자기들 때문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궤가 위험에 처하여 있는 것은 바로 여러분과 저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두렵고 떠는 무거운 마음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과연 그 궤가 어떻게 될지를 안타까움으로 바라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적용

이제 이 말씀을 적용하기로 합시다.

<적용 1> 하나님의 궤가 위험에 처하여 있을 때에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걱정하며 궤에 대해 두려워하여 마음으로 떠는 것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증표라면, 이것은 또한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들의 숫자가 별로 많지 않다는 분명한 증표이기도 합니다. 이 나이 많은 제사장 엘리처럼 의자에 앉아서 하나님의 궤에 대해 염려하며 떠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습니까? 다음과 같이 궤에 대해 염려하며 떨어야 할 이유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이 나라에서 있는 수많은 죄악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서 궤를 취하여 가실만한 죄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잉글랜드에서 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그 촛대를 잃어버렸습니까? 우리야말로 복음과 그리스도의 규례에 대한 우리의 첫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라오디게아 교회가 미지근한 것 때문에 그 촛대를 잃어버렸습니까? 우리야말로 과연 미지근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더럽힌 것 때문에 하나님의 궤를 잃어버렸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죄악이 우리 가운데도 있지 않습니까? 독일의 죄나 주변의 다른 나라의 죄악도 우리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오늘 여기 모인 우리들 가운데, 이 나라의 크나큰 배은망덕과 크나큰 타락과 악행을 생각할 때에 과연 하나님의 궤가 위험에 처해 있고 하나님께서 공의로 궤를 우리에게서 취하여 가실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만연되어 있는 술 취함과 간음, 시기와 부정(不正), 사기(詐欺) 같은 죄악들을 좀 보세요. 복음을 받았으면서도 안식일과 성례를 더럽히고 감사치 아니하고 열매가 없고 무가치하게 사는 등 온갖 성소의 죄들을 짓고 있지 않습니까? 이곳에 모인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서도 얼마든지 궤를 빼앗아 가실 수 있습니다. 정말 여러분을 향하여 진정한 사랑으로 말씀드리고, 여러분에 대한 존경과 크나큰 관심으로 말씀드립니다만, 오늘 말씀을 진정 받아들이시고 축복을 받지 않으시면 절대로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렵니다. 이 교구에 속한 여러분, 오늘 모인 여러분 중에 과연 하나님이 내게서 복음을 빼앗아 가시는 것이 정말 부당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둘째, 염려하고 떨어야 할 이유는 이 나라의 분쟁과 분열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12:25)고 하셨습니다만, 이 문제들은 여러분의 판단에 맡겨 두기로 합시다. 여기 있는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궤가 빼앗길 위험에 처해 있다고 고백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궤를 염려하여 앉아서 떨며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엘리가 과연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사실 때문에 아무 데서도 위로를 얻지 못하는 비느하스의 아내가 과연 우리 중에 어디 있습니까? 모세나, 엘리야, 그리고 우리아가 우리 중에 과연 어디 있습니까? 궤에 닥친 위험에 마음을 쏟는 그 사람들이 과연 어디 있습니까?

 

세금에 대해서, 상도덕의 부패에 대해서, 시민들의 이런 저런 부담에 대해서 불평들을 합니다만, 하나님의 궤를 잃어버린 이 비참한 일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는 남녀가 과연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들 대부분은 마치 갈리오처럼 이런 일에 대해서 상관치 않습니다(18:17). 사도 바울의 문제가 만일 시민법에 관한 것이었다면, 그는 분명 그 일에 관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는 상관치 않았습니다. 내 것이냐 네 것이냐를 따지는 민사(民事)의 문제일 경우 관여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런 일에 대해서 진정 마음을 쏟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습니까? 사람들 대부분의 심령이 이렇게 이상스러운 무관심과 미지근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업이 제대로 되고 있고 국가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면 그 뿐입니다.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궤야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성경 말씀 한 군데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이 본문을 깊이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호세아 7:9절의 말씀입니다: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복음에 백발(白髮)이 드리워져 있다고 말씀드릴까요? 여기서 예언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 말씀은 복음이 죽어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복음에 백발이 얼룩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백여 년 이상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제 나이 많아 늙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중에 학자가 있으시면 한번 살펴보세요. 과연 복음을 백여 년 이상 소유하며 계속해서 그 복음을 기쁨으로 누린 나라가 과연 있는지 말입니다. 백여 년이 되었으니 백발이 드리워진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 백발이 여기 저기 얼룩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것에 마음을 쓰지를 않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궤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데도 그것에 대해 전연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세 가지 구체적인 사실만을 생각해 봅시다:

 

첫째로, 그것은 여러분이 복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표입니다. 정말 복음에 대해 사랑이 있다면, 다른 어떠한 외형적인 위험보다도 하나님의 궤가 처한 위험에 대해서 더 크게 염려하고 걱정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둘째로, 그것은 여러분이 복음에 대해 전연 관심이 없다는 증표입니다. 관심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당연히 걱정할 테니까요. 그것은 복음에 대해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증표입니다. 그것에 대해 상관한다면, 그 일로 크게 영향을 받을 테니까요. 지난주에 일어났던 그 안타까운 불로 숨진 많은 사람들과 개인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 일 때문에 크게 상심하지 않은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궤를 빼앗길지도 모르는 위험이 눈앞에 있는데도 떨며 근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전연 관심이 없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셋째로, 요셉의 환난에 마음을 쓰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저주를 선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 . . 들이여 . . .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강포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6:1-6). 외형적인 것들을 가득히 누리며 그것으로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환난과 하나님의 궤의 위험은 돌아보지 않는 자들이여, 화 있을진저!

<적용 2>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 이렇게 오늘 전혀 예기치 않게 여러분을 모이게 하셔서 제 말씀을 듣게 하셨으니 (여기에 크신 섭리가 있을 것입니다) 권면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여러분, 나이 많은 제사장 엘리의 모범을 따라서 하나님의 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과연 진리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시기를 바랍니다. 이에 대해서 다섯 가지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잉글랜드가 복음을 절실하게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잉글랜드에는 복음에 관한 면허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얼마든지 없어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로에서 언약궤를 취해 가셨고 그리하여 실로를 버리셨습니다. 언약궤만 취해 가신 것이 아니라 성소까지도 취해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교회 밖으로 쫓아내셨고, 아시아의 일곱 교회도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도 그렇게 하실지 모르는 것입니다. 향후 백 년 동안 복음이 우리에게 있을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의 촛대를 부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실 수가 있습니다. 교회를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않으십니다만, 교회를 옮겨가셔서 사라지게 하시는 예는 많습니다. 동방에서 교회가 사라졌습니다. 헬라의 교회들도 아주 유명한 교회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교회들을 사라지게 하셨고, 지금은 터키 족들이 그 나라에 퍼져 있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둘째, 잉글랜드에 있는 하나님의 궤가 잃어버릴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오로지 잉글랜드의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엄청난 불의와, 이상스럽게도 이 땅에 만연되어 있는 감사할 줄 모르는 자세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다만 진지한 복음의 사역자에게 어울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 여러분을 변화시켜 나이 많은 엘리가 행한 일을 여러분도 하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는 의자에 앉아서 궤로 인하여 떨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크나큰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은 생각과 아울러 쓰라린 마음의 아픔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궤가 우리에게서 사라진다면, 과연 우리의 처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복음이 사라진다면, 여러분의 재산이 무슨 유익이 되겠으며 여러분의 사업의 성공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잉글랜드가 다른 나라들보다 나은 점이 과연 무엇입니까? 재물이라면 잉글랜드보다 터키가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왕보다 이방의 나라들이 세상의 영광은 더 많이 누리고 있습니다. 잉글랜드의 영광이 과연 무엇입니까? 바로 기독교가 아닙니까? 복음 이외에 기독교의 영광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복음이 사라지면 우리의 영광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엘리의 자부, 비느하스의 아내를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사내아이를 낳았지만 그것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이가봇이라 불렀습니다.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고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이제 영광이 떠나버렸으니 누가 더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하기 싫지만 크리소스톰(Chrysostom)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그는 그저 보통 사람이었지만, 그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추방당했을 때에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탄원하면서 이르기를 크리소스톰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태양을 잃어버리는 편이 낫다고 했습니다.

 

넷째, 이런 현실에 대해서 실망하지도 말고, 절제 없이 과격하게 슬퍼하지도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떠나기 전에 여러분에게 위로가 될 만한 말씀을 좀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오늘 어떤 이상스런 섭리에 의해서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언제 다시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을 전하게 될는지 주님 밖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마음속에 위로를 갖고 집으로 돌아가시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소망이 없는 사람처럼 슬퍼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궤가 비록 위험에 처해 있기는 하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네 가지 근거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a. 하나님이 이미 이 나라를 위하여 큰일들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노아의 아내처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멸망시키려 하셨다면, 우리에게 지금까지 행하신 일들을 행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지금에 와서 우리를 버리시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마음이 비록 떨릴지라도,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b. 이 나라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 수 있습니다. 궤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밤낮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확신하건대, 그렇게 기도하며 스스로를 개혁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절대로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나라를 멸하시려 하고 하나님의 궤를 취하여 가시려 할 때에는, 기도의 영도 취하여 가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듯 기도의 영을 주신다면, 거기서는 하나님의 궤가 계속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그 다섯 성()에 의인 열 명만 있었어도 하나님께서 그 성들을 살려두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수백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밤낮으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이 나라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시고 그의 궤를 남겨두지 않으실 리가 있겠습니까?

 

c. 우리가 위로를 받을 또 한 가지 근거는 하나님께 지금까지 잉글랜드를 다루어 오시되, 하나님의 법칙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대권(大權)을 통해서 다루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치세나 제임스 왕의 치세 동안 우리는 수많은 죄를 범하였고 그리하여 징벌을 받아 마땅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해마다 경건한 목사와 사역자들이 위협을 받고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껏 그의 대권으로 잉글랜드를 구원해 오셨습니다. ‘내가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리라는 성경 말씀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남겨두시려는 뜻을 가지시면 그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법칙에 매어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구원하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d. 또 한 가지 위로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지금 적그리스도에게 복수하고 계시며 따라서 적그리스도의 멸망으로 끝이 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짐승의 보좌에 진노를 퍼붓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런 모든 일들이 결국에는 적그리스도의 패망으로 끝이 날 것입니다. 이러한 진노의 영향으로 개혁 교회들이 다소간 영향을 받을 수 있고, 또한 잠시 동안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히 벌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잠시 동안이면 지나갑니다. 이 진노의 불이 충만히 부어지기까지 모든 개혁 교회들이 환난을 당할 수도 있고, 핍박이 모두를 엄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의 불은 궁극적으로 적그리스도를 향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처지가 어떻든지, 우리의 자식들은, 그리고 그 자식들의 자식들은 이렇게 바벨론의 음녀에게 부어지는 이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를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지 않도록 여러분 모두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기서 관원들이, 목회자들이, 그리고 일반 백성들이 각각 해야 할 일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관원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간단히 말씀드리고 지나가기로 합시다. 지금 제가 관원들을 대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관원들은 그들의 권세를 하나님의 궤를 안정시키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궤(ark)는 마치 노아의 방주(ark)와도 같아서, 관원이 안정시키기 전에는 언제나 물 위에 이리 저리 떠다닙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무엘하 6:1-2절에서 이스라엘 중에서 뽑은 용사 삼만 명을 거느리고 하나님의 궤를 모시러 가지 않았습니까? 또한 솔로몬도 열왕기상 8:1절에서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지파들의 우두머리들과 귀인들과 족장들을 예루살렘에 모으고 성대하고도 화려한 행사를 통해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제 자리로 모셔오지 않았습니까? , 하나님께서 우리의 귀족들과 관원들을 격려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안정시키는 일에 진력하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관원들은 블레셋 사람들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갖고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 궤를 다곤 신당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나 다곤과 하나님의 궤는 절대로 서로 상합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짓 신앙이 한 쪽 문으로 들어오면 참된 신앙은 다른 문으로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와 다곤을 함께 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궤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거룩을 추구하는 데 진력해야 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어깨 위에서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절대로 지속적으로 서 있지 않습니다. 악한 자나, 불경한 자나, 술 취한 목회자는 절대로 하나님의 궤를 안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진지하고, 경건하며, 하나님의 진정 경외하는 목회자들이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이니 얼마나 거룩해야 하겠습니까!

 

결론 : 다섯 가지 권면

하나님의 궤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 점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다섯 가지를 말씀드리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궤를 우상처럼 섬겨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만 있으면 그들이 안전해지고 모든 것이 다 가려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궤를 진중으로 가져간 것입니다. 자기들을 개혁한 것도, 회개한 것도 아니면서, 그 궤가 자기들을 구원하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구원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그렇게 많습니다. 그러나 오직 회개와 개혁 이외에는 나라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궤를 깔보아도 안 됩니다.

이것이 사무엘하 6:14-23절에 나타나는 미갈의 죄였습니다. 다윗이 궤 앞에서 춤을 추며 오자, 미갈은 그를 경멸하고 마음속으로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 앞에 있으니,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도대체 우리에게 설교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기도문을 읽기만 하면 그만이 아니냐? 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설교를 많이 들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저 하루에 한 번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라고 묻습니다. , 이런 것이 하나님의 궤를 깔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처럼 이렇게 말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금식하며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천하게 보인다면, 오히려 내가 더욱 더 낮아져서 천하게 되리라고 말입니다.

 

(3) 쓸 데 없는 호기심으로 하나님의 궤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벳세메스 사람들이 바로 이런 죄를 범했습니다. ‘벳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인을 죽이신지라’(삼상 6:19). 하나님께서 드러내지 않으시고 계시하지 않으신 일에 대해서 지나치게 호기심을 갖고 궁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과연 언제 그의 백성들을 완전히 구원하시며 그의 교회들을 자유하게 하실 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들이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1666년에 대해서 이야기들을 합니다(이 설교가 1662년에 행해졌음을 생각하라. 역주). 그 해()가 바로 적그리스도가 궤멸되는 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상스럽게도 학식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유독 그 해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1669년이 바로 그 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해를 지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빌어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일들 모두가 하나님의 궤를 쓸 데 없이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1:7)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식으로 해서 어느 특정한 때와 기한을 정해 놓고 그것에 집착하다가 나중에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여러분은 무신론자가 되고 맙니다. 그 다음부터는 아무 것도 믿지 않게 되고 맙니다. 때와 기한을 고정시키려 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교황주의에 속한 한 저술가의 말에 따르면, 1,000년이 다가올 당시에도 바로 그 해가 심판의 날이 임하는 때라는 생각이 기독교 세계에 아주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해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그들은 과거의 죄 짓는 생활로 다시 돌아가 그 전보다 오히려 더 악하게 되어 아무 것도 믿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어느 때인지는 모르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가장 좋은 때입니다. 그러니 쓸 데 없는 호기심으로 하나님의 궤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4) 하나님의 궤를 만지도록 합당한 소명을 받지 않은 이상, 궤를 만지고 상관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하 6:6-7절에 나타나는 웃사의 죄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 하자, 웃사가 궤를 받치려고 그만 손으로 잡고 말았습니다. 물론 웃사에게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웃사는 스스로 파멸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궤를 모시는 일이 큰 장애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무질서가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뜻은 좋으나 자격 없는 사람들이 목회자의 직분을 탈취한 예가 또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는 것을 보고 자기들이 궤를 만지고, 자기들 손으로 궤를 붙든 것입니다. 그러나 궤를 만짐으로써, 그들도 궤도 함께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궤를 만지지 않도록 조심하기를 바랍니다.

 

(5) 하나님의 궤를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시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십시오.

그 궤가 보존하고 있는 그 율법을 지키십시오. 하나님의 궤 속에는 율법의 두 돌비가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궤를 지키실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어기면, 궤도 버리게 되고 맙니다. 궤를 가리켜 언약궤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궤를 보존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궤가 보존하고 있는 그 언약을, 세례로 행해진 언약을, 그리고 성례를 통해서 계속 갱신되는 그 언약을 깨뜨리면, 하나님께서 그 궤를 취하여 가실 것입니다. 아멘.

 

<에드먼드 칼라미는 16002월 런던에 거주하는 한 상인의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본래 프랑스 노르만디 해안 지방 출신의 위그노 난민(a Huguenot refugee)이었다고 한다. 그는 161674일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펨브로크 홀(Pembroke Hall)에 입학하여 1620년에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1623년에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알미니안주의를 강하게 반대하는 그의 성향 때문에 그 학교의 연구 조교(a Fellow)가 되는 길이 막혔으나, 펨브로크 홀은 그대신 그를 탄쿠암 소키우스(Tanquam Socius)로 선출하여 연구 조교에 버금가는 혜택을 누리도록 해주었다. 1627년 그는 써포크 지방(Suffolk)의 에드먼즈(Edmunds)의 베리 스트릿 교회(Bury St.)의 강사(講士: Lecturer)가 되어 10년 동안 사역하였고, 1627년부터 1631년의 기간 동안은 제레마이어 버로우즈(Jeremiah Burroughes)와 그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였다. 1639년 그는 청교도적 전통이 아주 강하며 여러 유지들이 교회원으로 있는 런던의 알더멘베리(Aldermanbury)의 센 메리 교회(St. Mary)의 교구 목사로 선출되었다. 이 교회를 기반으로 하여 칼라미는 감독제(Episcopacy)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고, 1641년 죠셉 홀 감독(Bishop Joseph Hall)이 감독제 신권론(Episcopacy by Divine Right: 교회의 감독 정치 체제가 하나님의 권위로 정하신 유일한 권위 있는 제도라는 주장)을 변호하는 문서를 발행하자, 그는 일련의 청교도들과 합력하여 감독제 신권론의 부당함을 알리는 문서를 작성하여, 그 일에 참여한 인사들의 이름의 첫머리 알파벳을 따서 스멕팀누스”(Smectymnuus)라는 명의로 배포하였다. 이런 일련의 활동을 통하여 칼라미는 장로회파의 지도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런던의 목회자들의 여러 모임들을 주재하였다. 1643년 의회가 웨스트민스터 성직자 회의(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의 개최를 명하자, 이 회의에 회원으로 선정되어 역할을 하게 된다.

 

위의 설교는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이 발효된 후인 16621228, 과거에 목회자로 섬기던 알더멘베리의 센 메리 교회당에서 행한 것인데, 그는 이 설교로 인해서 그 이듬해 16일 체포되어 뉴게이트 형무소(Newgate Prison)에 수감되었다. 그날 마침 지정된 설교자가 출석하지 않자, 회중들이 그의 설교를 원하여 거절하지 못하고 강단에 올라가 설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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