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에게는 복, 악인에게는 화 사 3:10-11 Thomas Watson, 원광연 목사 역

無益박병은목사 | 2014.12.08 15:41 | 조회 9600

토마스 왓슨 (Thomas Watson: 1620?-1686)

<그는 왕정주의자는 아니었으나, 크롬웰과 의회가 국왕 챨스 1세를 사형하려 할 때에 이를 강하게 반대했고, 또한 크리스토퍼 러브 등과 함께 챨스 2세를 세워 왕정으로 환원시키는 일에 협력하였다. 그는 1662년 잉글랜드 국왕 챨스 2세가 선포한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에 의하여 잉글랜드 강단에서 추출 당할 당시 3 차례에 걸쳐서 설교를 행했는데, 다음의 설교는 1662819일 화요일 성 스데반 교회(St. Stephen)의 강단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행한 설교이다.>

 

제목/ 의인에게는 복, 악인에게는 화 본문/ 이사야 3:10-11

번역 원광연목사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3:10-11)

 

이 본문은 마치 이스라엘의 구름 기둥과도 같아서, 밝은 면이 있고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는 말씀에서는 경건한 자에게 있는 밝은 면이 나타나고,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라는 말씀에서는 악인에게 있는 어두운 면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다 보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서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의인은 긍휼하심의 상급을 받으며, 악인은 공의의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1. 의인에게는 복

 

그러면 이 가운데 첫 말씀부터 생각합시다: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성경 가운데 이 부분은 아주 비참한 재난의 시기에 씌어졌습니다. 3장 첫머리를 읽으면 이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 . .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3:1-2)를 버리시켰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교회로서는 참 힘든 때였습니다. 재판관이 버림을 당한다면 과연 어디서 정의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선지자가 버림을 받아 사라진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과연 누구에게서 듣겠습니까? 예루살렘의 정치 체제 전체가 망해가고 있었고 부패 가운데 빠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주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 본문을 기록케 하셨습니다. 이 본문은 마치 구름 속에 비치는 무지개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환난 가운데서 위로를 받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1) 의인에게는 모든 일이 잘 됨

이 말씀 속에 나타나 있는 위대한 명제는 이것입니다. , 세상의 일이 어찌 돌아가든 간에 의인에게는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요 따라서 절대로 우리가 논란을 벌일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는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신명(神命)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 이런 말씀이 나타납니다만, 전도서 8:12절 하나만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 내가 정말로 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는 과연 논란의 여지가 없는 황금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먼저 생각할 문제는 여기의 의인이 과연 누구를 의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 ‘’()라는 말에는 삼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법적인 의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아담이 무죄의 상태에 있었을 때에 의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마음이 하나님의 법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잘 만들어 놓은 해시계가 해를 잘 좇아가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이 의를 저버렸고, 결국 아담은 의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도덕적인 의가 있습니다. 도덕적인 덕성을 지니고 있어서 사려 깊고, 정의로우며, 자기를 절제할 줄 알고 통상적인 도덕의 수준에 따라서 생활하는 그런 사람을 의인이라 칭하는데, 그 때에 이런 의미가 적용됩니다.

 

그 다음에는 복음의 의가 있습니다만, 본문의 의인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이 복음의 의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의는 전가(轉嫁)된 의(a righteousness of imputation)입니다. ,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전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이니만큼, 진정으로 우리의 것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복음의 의는 심어지는 의(a righteousness of implantation)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 은혜의 씨앗과 기질이 마음속에 심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거룩을 사람 속에 심는 것이요, 그리하여 사람을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와지는 것입니다. , 전가된 의와 심어지는 의를 통해서 말입니다.

 

2) 의인이 잘 되는 이유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의인이 잘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한 가지 이유는 의로운 자는 자기의 크나큰 악이 제거되었고 죄를 용서함 받은 상태이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당연히 일이 잘 될 필요가 있다는 데 있습니다. 죄야말로 사람의 양심을 찌르는 가시입니다. 그런데 용서와 씻음을 통해서 그 가시가 제거되었으니, 그 사람이 잘 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은 죄 용서를 가리켜 죄를 제하여 버리는 것이라 부릅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 . .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 하시나이까?”(7:21).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큰 짐을 지고 가느라 지쳐 있는 사람의 모습에서 취한 하나의 은유법입니다. 그 사람이 지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그 무거운 짐을 들어서 벗겨주는 것입니다. 죄의 짐이 너무나 무거워 양심을 짓누를 때에,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도 그 짐을 제하여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의 짐을 양심에게서 벗기셔서, 그것을 그리스도의 어깨 위에 올려놓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 짐을 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자기의 죄 짐을 그리스도께 맡겼으니, 이 사람은 그야말로 어디를 가든 잘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죄를 용서함 받는다는 것은 정말로 영광스러운 축복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면류관에 박힌 보석과도 같습니다. 죄 용서는 계속 늘어나는 긍휼입니다. 죄 용서와 함께 엄청난 긍휼하심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용서하시면, 그 사람을 양자로 받아들이십니다. 누구를 사하시든 은혜와 영광으로 덧입히십니다. 그러니 이것이 계속 늘어나는 긍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병든 자를 낫게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긍휼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33:24).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식하면 고통에 대한 감각이 사라집니다. 그러니 의인에게 만사가 잘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가장 큰 악이 제거되었기 때문이지요.

 

세상의 일이 어떻게 되든 의인이 잘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기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 . .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16:5-6) 라고 합니다. 모든 좋은 것들이 다 하나님께 있고, 또한 하나님께 있는 모든 것이 의인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그를 도우시며, 그의 지혜가 가르치시며, 그의 영이 거룩하게 하시고, 그의 긍휼하심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기업이 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풍성하신 기업이십니다. 천사들의 풍성함이 다 그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안전하고 확실한 기업이십니다. 그의 이름이 강한 망대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는 기업이십니다. 그는 무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기업이십니다.

 

그는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73:26). 하나님을 기업으로, 분깃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만사가 잘 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에게 만사가 잘 되지 않을 리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시라면 우리는 복된 자들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144:15)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풍성한 위로가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오늘 하나님께서 저를 보내셔서 여러분을 위로하게 하셨습니다. 오오! 상한 마음을 가진 모든 분들께 기쁨의 기름을 한 방울이라도 부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찢긴 심령이 기쁨을 얻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오! 여기, 하늘에서 온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라는 것입니다.

 

3) 의인은 환난 가운데서도 형통함

그러나, 여기서 우리 모두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 의인이 잘 된다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봅니다만, 의인이 오히려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합니다. 의인이 위로를 빼앗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심지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고, 복음을 위하여 세상에서 모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의인이 잘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계속해서 어려움과 환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의인은 잘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 가지 구체적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의인이 당하는 어려움은 결국 선()이 됩니다. 그러니 결국은 잘 되는 것입니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구절은 예레미야 24:5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 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같이 보아 좋게 할 것이라.” 하나님의 소유인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 원수들 가운데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처럼 그들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의인이 당하는 고난은 그들의 죄를 씻어내는 도구입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쫓겨 도망하다가 그 사람의 칼에 맞았답니다. 그런데 그 칼이 그 사람의 혹(종양: 腫瘍)을 찔러서 잘라냈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당하는 온갖 어려움과 고난은 교만의 혹을 잘라내고 그들을 더 겸손한 자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육체가 고난을 당하면, 그의 영혼은 생기를 얻고 은혜 가운데서 힘을 얻는 것입니다.

 

로마에 월계수 나무가 두 그루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시들면 하나는 생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육체가 고난을 당하면, 다른 월계수 나무인 영혼은 생기를 얻고 힘을 얻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쓰디쓴 잔에서 그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을 정제해 내시는 것입니다.

 

제롬(Jerome)은 말하기를, 세상은 심판으로 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쓰라린 상처를 치유하는 약으로 만드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에게는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매는 하나님이 쓰시는 연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지시고 성도의 영혼 위에다 더 생기 있게 그의 형상을 그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이올린의 현()을 때리시면 반드시 더 아름다운 음악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의인에게 결국 모든 일이 선이 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2) 의인에게 온갖 환난과 어려움이 임하더라도 그들이 잘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소생시키시는 내적인 역사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사람이 당하는 비극은 눈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만 그가 갖는 위로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갇힌 감옥 문은 눈에 보이지만, 그의 양심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는 우리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외적인 고난을 내적인 평강으로 부드럽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을 가리켜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고후 7:6)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벌은 아름다운 꽃에서만 꿀을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엉겅퀴와 쓴 풀에서도 꿀을 모아 들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는 슬픔에서도 기쁨을 모아 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심지어 시체에서 꿀을 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머리가 아프면서도 마음은 즐거울 수가 있는 것처럼, 육체가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영혼은 평안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의인은 이렇게 해서 형통합니다. 하나님이 내적인 위로를 주셔서 그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가 당하는 외적인 고통을 부드럽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3) 환난과 재난의 때에라도 의인이 잘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 환난의 때에 그의 백성을 덮으시며, 폭풍 속에서 그들을 숨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보배들을 감추시며 그냥 떠나보내지 않으십니다. 그리하여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91:4)라는 성경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의 천사들로 하여금 그 백성의 생명을 지키는 자들로 삼으시사 그들을 숨기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대 홍수가 세상을 뒤덮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방주를 예비하게 하셔서 노아를 숨기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에도,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숨기셨고 마치 노략 물을 얻듯이 그의 생명을 보존케 하셨습니다(39:17-18).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도들을 가리켜 주의 숨긴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83:3).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숨김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상처 속에 숨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거니와, 위험과 재난의 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숨기셔서 피하게 하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알 숭배가 기승을 부릴 때에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을 칠 천 명이나 남겨두셨습니다. 엘리야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만, 하나님은 칠 천 명이 있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의인은 공적인 비극의 시기에도 모든 것이 형통한 것입니다.

 

4) 의인은 죽어도 형통함

과연 그렇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의인들의 형편이 이보다 더 나빠지기도 하지 않느냐? 고 말할 분이 계실 것입니다. 때로는 의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망하기도 합니다. 광풍에 밀려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일을 당하더라도 의인에게는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의인을 죽게 하셔서 데려 가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크나큰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서 되어 집니다. 장차 나라에 임할 엄청난 비극을 보지 않게 하시려고 그들을 미리 데려 가시는 것입니다.

 

이교도(異敎徒) 시인(詩人) 버질(Virgil)은 말하기를, “나라보다 먼저 죽는 자들은 행복한 자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곧, 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보기 전에 먼저 죽는 자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사 미리 그들을 데려가셔서 그 땅에 임하는 재난을 보지 않게 하시는 때가 많습니다.

 

열왕기상 14:13에서 이에 대한 한 가지 실례를 볼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호보암의 집 가운데서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셔서 일찍 묘실에 들어가게 하셔서 그로 하여금 그 땅에 임할 악을 보지 않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함께 열왕기하 22:20에도 비슷한 경우가 나타납니다. 요시아 왕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합니다. 요시아는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평안히 묘실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 말의 뜻을 이렇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 요시아는 거룩한 사람이었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평안 가운데서 묘실에 들어간 것입니다. 다가오는 악을 보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그를 평안 가운데서 묘실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제롬(Jerome)은 그의 친구 네포티안(Nepotian)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오! 이런 온갖 궂은일을 보지 않고, 폭풍 가운데서 빠져나와서 천국에 안전하게 이르렀으니 내 친구 네포티안은 얼마나 행복한가!” 마틴 루터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 독일에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죽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의인은 죽더라도 형통한 것입니다. 재난이 오기 전에 그들을 데려가셔서 그 끔찍한 재난을 보지 않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죽임을 당하여도 형통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죽음이 그들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의인의 육체도 영혼도 상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죽어도 형통한 것입니다. 성도의 육체는 죽어도 진멸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성도의 육체는 아주 고운 흙입니다. 아주 고운 흙이란 말입니다! 주님은 이 보배들을 마치 장롱 서랍 속에 넣어두듯 그렇게 무덤 속에 넣어서 잠가 두십니다. 성도의 육체는 묘실 속에서 그 복된 부활의 때까지 익어갑니다. 오오! 신자의 흙이 얼마나 고운지요! 세상은 비록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는 지극히 고귀합니다.

 

농부는 곳간에도 거두어 놓은 곡식이 있고 밭에도 곡식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밭에 있는 곡식이나 곳간에 있는 곡식이나 다 똑같이 귀합니다. 부활의 때가 오면 성도의 육체는 과거 살아 있을 때보다도 더 영광스럽고 복된 상태가 될 것입니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부활한 성도의 육체를 가리켜 천사와 같은 육체라고 불렀습니다. 그 아름다움과 광채 때문이지요. 비단을 붉은 색이나 진홍색 물감을 들여 채색하면 훨씬 더 아름다와지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의 때가 오면 성도의 몸도 더 좋은 색깔로 채색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3:21). 그러므로 의인은 죽임을 당하여도 형통하는 것입니다.

 

또한 의인은 죽을 때에 그 영혼이 잘 됩니다. 오오! 그 때야말로 과연 복된 때입니다. 성도의 죽음의 때는 마치 바울이 로마를 향하여 항해하던 때와 똑 같은 것 같습니다. 배가 깨어져 산산 조각났지만, 바울은 안전하게 해변으로 올라갔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신자의 몸이라는 배가 죽음으로 깨어져도, 그 영혼은 하늘의 항구에 무사히 안착하게 됩니다. 여러분, 신자가 죽는 날은 바로 그의 축복이 출생하는 날입니다.

 

그 날은 신자가 하늘로 승천하는 날입니다. 신자의 죽는 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하는 날입니다. 믿음이 혼인을 성사시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 속에서는 약혼 상태였으나, 죽을 때에 혼인 예식이 영광 가운데 치러지는 것입니다. 의인이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게 됩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기쁨으로 천국에 들어간 다음 성도는 하나님을 몸소 뵙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쁨이 그들 속으로 들어오고 그들이 기쁨 속으로 들어갑니다. 영원한 샘에서 흘러나오는 그 순결한 생명수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 여러분, 세상의 일이 어찌 되든, 의인은 이처럼 형통합니다. 환난이 오고 죽음이 올지라도 의인은 형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이 말씀에서 위로를 얻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의인이 되기 시작한다면, 그 처럼 귀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이 본문은 우리 모두 의인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아무리 어렵고 큰 환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에게는 만사가 형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환난을 만나기를 기다리고 사모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일이 잘 될 때에도 우리는 기뻐합니다. 그러나 의인에게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한 것입니다. 그는 이미 인침을 받은 자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기업으로 받을 상속자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요, 천국이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의인이 형통하지 않을리가 있습니까? 이런 축복을 받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 이제 본문의 첫 부분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마칩니다. 경건한 사람은 사나 죽으나 위로가 있고, 만사가 형통한다는 말씀 말입니다.

 

2. 악인에게는 화

, 이런 말씀을 듣고도 죄를 벗어버리고 의인이 될 마음이 생기지 않으신다면, 본문의 그 다음 부분을 말씀드려서, 무서워서 죄에서 벗어나고, 두려워서 악을 버리도록 만드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 . .”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구름 기둥의 어두운 면입니다. 이 말씀은 제 말씀을 듣는 악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게 할 것입니다.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이 말씀 속에 나타나는 뜻은 이것입니다. 악인이 형통하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그에게 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악인이 누리고 있을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결국 그 모든 것이 그 사람에게 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8:13). 진리의 하나님께서 친히 악인이 형통하지 못할 것임을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진리이시듯, 그 말씀도 진리입니다.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라는 말씀 말입니다.

 

1) 네 가지 증거

이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네 가지로 이 점을 증명해 보여드리겠습니다.

 

(1) 악인은 이 세상의 삶에서 화를 당합니다.

 

오늘 제 말씀을 듣는 이들 가운데 악인이 있다면, 이들은 이런 말씀이 납득이 되지를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귀를 누리고 겉으로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무슨 화를 당한다는 말이냐? 라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기름을 먹고, 달콤한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데,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만 한다니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저주가 그 사람 위에 임하여 있는데 어떻게 화가 있지 않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이 과연 삶이 번창하겠습니까? 진노의 홍수가 악인의 머리 위에 퍼부어집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모든 재앙을 유업으로 받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저주가 그 죄인의 몫입니다. 그러니 죄 가운데서 죽으면, 반드시 자기 몫을 받고야 맙니다.

 

악인에게 화가 있습니다! 악인이 먹는 빵 한 조각 한 조각마다 저주가 담겨 있습니다. 마치 독약이 들어 있는 빵과도 같습니다. 악인이 포도주를 마실 때에 그 한 방울 한 방울마다 저주가 스며있습니다. 악인에게 화 있을진저! 그의 포도주 잔에도 저주가 있고, 식탁에도 저주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화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벨사살 왕이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해서 그것으로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술을 마셨습니다(5:2-3). 벨사살은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술잔을 나누며 아주 흥겨워했습니다. 그러나 악인에게 화가 있을진저!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 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딛힌지라”(5:5-6). 벽에 저주가 씌어진 것입니다. 죄인은 비록 백세를 산다 해도 여전히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의 백발에 저주가 담겨 있는 법입니다.

 

(2) 악인은 이 세상의 삶에서 뿐 아니라 임종(臨終)의 때에도 화가 있습니다.

 

죽음으로 인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위로가 사라지고 맙니다. 육체의 탐욕에 빠지고 쾌락에 잠기는 일도 이제는 사라졌습니다. 포도주 잔도 이제는 없습니다. 음악 소리도 이제는 소용이 없습니다.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 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18:14). 멋있고 아름답던 모든 것들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하프와 나팔수의 아름다운 연주도 끝이 났습니다. 로마의 멸망에 대한 말을 악인에게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즐거움, 기쁨도, 음악도, 우아함도 다 사라졌습니다. 죄인이 누리던 감미로운 맛도, 그의 찬란한 진홍색 겉옷도, 번쩍이는 다이아몬드도, 죽음 앞에서는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죽음이 오면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죄인의 즐거움이 죽음으로 끝을 맺는 것처럼, 또한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슬픔이 시작됩니다. 아아,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의 눈이 감기기 시작하기 전에, 먼저 그의 양심의 눈이 떠지게 됩니다. 죽음의 시간이 오면 모든 죄가 칼을 들고 그의 앞에 섭니다. 그가 지나간 생애 동안 그렇게도 즐거워하던 그 죄들이 이제는 그를 찌르는 것입니다. 즐거움과 흥겨움이 깊은 슬픔으로 뒤바뀝니다. 설탕을 축축한 곳에 놓아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설탕이 녹아버리는 것으 보지 않습니까?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면 악인이 누리던 설탕 같은 기쁨이 물처럼 녹아버리고 맙니다. 기쁨이 녹아 슬픔의 눈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3) 악인에게는 심판 날에 화가 있습니다.

 

살아생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스스로 판단했지만, 이제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그의 삶에 대해서 심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벨릭스 총독은 바울이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을 듣고 두려워 떨었습니다(24:25). 유대인 역사가 요셉푸스(Josephus)는 벨릭스가 악인이었음을 지적합니다. 벨릭스는 드루실라라는 여인을 꾀어서 그 남편에게서 빼앗았고 그리하여 그 여자와 함께 부정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바울이 심판에 대해서 하는 말씀을 듣고 떨었습니다. 여러분,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떨었다면, 정작 그 심판이 올 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심판 때가 되면, 은밀하게 지은 그의 모든 죄가 환히 드러나고 한 밤 중에 저지른 온갖 악행들이 그 이마에 기록되어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게 될텐데, 그렇게 되면 과연 어찌하겠습니까?

 

심판의 날에 법적인 심문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이름을 부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똑바로 서서 그대의 죄목에 대한 논고를 들으라. 이 논고에 대해서 그대가 대답할 것이 있는지를 살피라. 안식일을 어긴 것과 살인한 것과 술 취한 것과 위증한 것들에 대해서 변명해 보라. 그대의 복수와 악행에 대해서, 나의 권속들을 핍박한 일에 대해서도 변명해 보라.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그대가 죄가 있다고 보는가, 아니면 무죄하다고 보는가? 이 철면피야, 그대의 모든 악행들을 내가 친히 목격하였으니, 감히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하리라. 그대의 양심의 책과 나의 전지(全知)의 책이 함께 일치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너는 감히 무죄하다고 탄원하지 못하리라.”

 

그러니 죄인이 얼마나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멸망 속으로 들어가겠습니까? 이러한 법적인 심문이 끝나면, 선고가 이어집니다: “, 저주 받은 자여, 내게서 떠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들어가라.” ? 그리스도의 존전(尊前)에서 떠나라구요? 기쁨이 가득 찬 그의 임재에서 떠나라구요?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말하기를, “떠나라는 말이 떠나는 고통 그 자체보다 더 심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죄 가운데서 계속 살다가, 결국 이런 선고를 받게 되면, 그 다음에는 돌이킬 수가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것은 최고의 법정의 선언이요, 그 선고에 대해 탄원이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 법정에서 안되면 그 다음 법정으로 옮아가며 자기의 일을 탄원할 수가 있습니다. 지방 법원에서 안되면, 그 다음 고등 법원에 상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심판 날에 내려진 선고에 대해서는 탄원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최고의 법정이기 때문입니다.

 

(4) 죄 가운데서 그대로 죽는 악인에게는 심판 날 이후에 화가 있습니다. 오오, 심판 이후에는 오로지 한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 길을 가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들에게는 오로지 지옥 밖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 . . 보고”(16:23). 지옥은 비참의 중심입니다. 고통의 정수(精髓)입니다.

 

2) 지옥의 극심한 고통

 

성경은 말씀하기를, 지옥에는 다음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 어두움과 불, 그리고 사슬이 그것입니다. 지옥을 가리켜 어두운 곳, 캄캄한 곳이라고 합니다.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13). 어두움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것 아닙니까? 캄캄한 어둠 속을 걸어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 발자국 앞도 예상할 수가 없습니다. 지옥은 이처럼 캄캄한 곳입니다. 캄캄한 흑암 이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빛 되신 하나님의 임재에서 떠나 있어야 하니 캄캄한 어둠 이외에 아무 것도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어거스틴은 지옥에 유황에서 나오는 빛이 약간 있기는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정죄받은 악인은 그 유황 빛 가운데서 자기의 처참한 상태를 보고 스스로 고통을 받는 것 이외에 아무 유익도 얻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지옥에는 어두움 이외에 불이 있습니다. 지옥을 가리켜 불 못이라 하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20:15).

 

여러분, 불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런 요소가 아닙니까? 육체에 가장 끔찍한 느낌을 가져다 주지요. 그런데 지옥이 바로 불이 있는 곳입니다. 식자(識者)들 사이에서 과연 그 불이 어떤 불일까 하는 문제에 대해 갖가지 논란이 있습니다만, 그 불이 어떤 불인지는 우리로서는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그 불이 물질적인 불이라고 말합니다. 물질적인 불이긴 하지만 우리의 용광로에 있는 불보다 무한히 더 뜨거워서 그 지옥의 불에 비하면 우리의 용광로 불은 그저 그림 속에 있는 불과도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이 정죄 받은 자가 받는 이 불은 일부는 물질적이고 일부는 영적인 불이라고 생각됩니다. 육체를 위하여 일부는 물질적이며, 영혼이 하나님의 진노의 고통을 당하도록 일부는 영적인 성격을 띄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못입니다.

 

아아, 하나님의 진노의 권능을 누가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불 가운데 누가 거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을 견딘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요, 또한 그것들을 피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옥에는 또한 사슬이, “어두움의 사슬”(벧후 2:4)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매어 있지 않은 그 죄인들에게는 어두움의 사슬이 매어집니다. “어두움의 사슬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지옥에 있는 악인은 일어섰다 앉았다 할 수 있는 자유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편안할 텐데 그런 자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사슬에 묶여 있어서 꼼짝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어두움의 사슬에 완전히 매어 있는 것입니다. 오오,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여러분, 평생 꼼짝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묶여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사슬에 묶여서 항상 하나님의 진노의 통열한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게다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조금도 움직일 수도 없으니,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 아니겠습니까! 지옥의 어둠과 불과 사슬, 이것이 바로 악인에게 있을 형편인 것입니다!

 

악인에게 화가 있으리라는 말씀에 대해서 두 가지를 더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그 첫째는, 구더기입니다. 그 정죄 받은 심령들에게 고통을 주는 구더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양심의 구더기입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 .”(9:48). 아아! 이런 구더기가 있다니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멜랑크톤(Melancthon)은 양심의 고통을 가리켜 지옥 같은 격정”(a hellish fury)이라고 불렀습니다. 독이 가득한 구더기가 마치 사람의 마음을 빨아 먹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양심의 음성을 듣기를 거부한 이 죄인들은 지옥에서 양심의 구더기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고통의 구더기 이외에 또 뱀이 있습니다. 옛 뱀이라고도 일컫는 마귀(12:9)가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구더기의 독이 있고, 또한 옛 뱀의 쏘는 것이 있습니다. 정죄 받은 자들은 지옥에서 억지로라도 마귀를 바라보게 됩니다.

 

안셀름(Anselm)의 다음과 같은 말이 생각납니다: “두 눈으로 마귀를 직접 보느니 차라리 이 세상의 온갖 고통을 당하며 견디는 편이 더 낫다.” 그런데 악인은 원하든 원치 않든 마귀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눈으로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옛 뱀 곧 마귀의 쏘는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사탄은 인류를 향한 격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에게는 자비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미혹하기 위해 갖은 교묘한 수단을 다 쓰듯이, 인류에게 고통을 주기에 온갖 잔인함을 다 동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고통과 지옥의 혼란이 영원토록 계속된다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 14:11을 보세요: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지옥의 상태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죽지 않습니다. 죽을 수가 없습니다. 항상 죽어가지만 절대로 죽지는 않습니다. 용광로의 연기가 세세토록 그치지 아니하고 올라갑니다. 영원토록 계속되는 그런 고통을 도대체 누가 견딜 수 있단 말입니까? 세세토록이란 말이 마음을 찌르지 않습니까? 악인들은 지금 안식일이 너무 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이 날이 도대체 언제 끝날까 하고 한숨을 쉽니다. 설교가 너무 길다고 하고, 기도가 너무 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옥에 영원토록 세세토록 있는 그 시간은 얼마나 길고 깁니까? 수백만 년의 고통이 지나도, 그 고통을 절대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처음 시작될 그 때나 여전히 똑같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지옥의 고통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은 지옥에 있는 정죄 받은 자들에게는 아무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병들거나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 옆의 동료가 위로를 주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옥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런 친구가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그런 불쌍히 여김이 오히려 격분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천사들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고통에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그의 원수들에게 시행되는 것을 보고 기뻐 뛰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아아,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뜨거운 하나님의 진노의 용광로 속에 누워 고통을 받고 있으나 아무도 불쌍히 여기지를 않습니다. 고통 가운데서 소리를 지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웃음을 던지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죄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사람들이여,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러니 여러분, 죄에서 돌아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마치 사자가 사람을 갈갈이 찢듯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찢으시면 아무도 여러분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어찌 할 수 없이 떡 먹듯이 죄를 짓고, 목마르다고 하며 술에 취하여 있는 이 모든 악인들에게는 이 얼마나 끔찍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지금처럼 악이 넘치는 때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훼방할 것처럼 죄를 짓고, 하나님이 벌하시기를 감히 바라고 있습니다.

 

마치 지옥문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문이 잠겨 있으면 어찌할까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람들마다 제각기 죄를 짓느라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용감하게들 죄를 짓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지 모릅니다. 죽음이 다가올 때에, 심판 날에, 그리고 심판 이후에 이들이 과연 어찌 되겠습니까? 악인은 저주 받은 삶을 살며 정죄 받은 상태로 죽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적 그 자체입니다. 걸어다니는 표적이요, 하나님은 절대로 그 표적을 빗나가시는 법이 없습니다.

 

성경에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지요? 라티머(Latimer)는 말하기를, “이것은 슬픈 요금(料金)이다. 첫째 코스를 위해서는 슬피 우는 것을 요금으로 내야 하고, 그 다음 코스를 위해서는 이를 가는 것을 지불해야 한다.”

 

무엇 때문에 이를 갈겠습니까? 그것은 악인이 당하는 고통이 너무나 극심하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데, 피할 방법도 없으니 이를 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지옥의 악인이 이를 가는 것은, 경건한 자들이 천국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분해서 이를 가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그렇게 핍박하고 조롱하고 놀리던 그 사람들이 천국에 있는 것을 보고, 또 자기들이 지옥에 있는 것을 보니, 도저히 분이 나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13:28). 악함과 하나님의 저주는 함께 나란히 갑니다. 그러니 악인에게는 도무지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 가운데는 악인의 무리에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를 바랍니다. 마귀의 색갈의 옷을 입고 마귀의 깃발 아래서 싸우는 저 검은 무리들에 속하지 않도록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죄인과 불못은 절대로 서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옥 불에 들어가게 만드는 그런 죄악 가운데 있지 않도록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베르나르(Bernard)는 말하기를, 지옥 불에 들어가게 만드는 맹렬한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죄가 과연 무엇입니까? 악의의 불이요, 격렬한 감정의 불이요, 탐욕과 호색의 불이요, 복수의 불이라고 합니다. 이 맹렬한 죄악들이 사람에게 맹렬한 재앙을 가져다주고, 지옥 불에 들어가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악에 시험을 받을 때에 여러분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아아, 영원히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의 맹렬한 불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즙 틀 위에 어떻게 영원토록 누워 있겠는가?” 라고 말입니다. 지옥의 고통 가운데 집어 넣고야 말 그 죄들을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어떤 처녀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일이 있습니다. 한 청년이 함께 음행을 하자고 하며 어떤 처녀를 유혹했다고 합니다. 그 처녀는 말하기를, “내게 딱 한 가지 청이 있는데, 그것을 들어주면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하겠소라고 했답니다. “그게 무언데요?”라고 청년이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처녀는, “그냥 이 촛불에 한 시간만 손가락을 대고 있으면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처녀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당신은 나를 위해서 한 시간 이 촛불 위에 손가락을 대는 일도 해주지 못하면서, 내 영혼을 영원토록 지옥에서 불타게 만드시렵니까?” 그 처녀는 이렇게 해서 유혹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탄이 악을 행하도록 유혹합니까? 그렇다면 이 본문의 말씀을 방패로 삼아서 사탄의 맹렬한 화살을 막으십시오. “오오, 사탄이여! 그대의 유혹을 받아들였다가는 내가 영원토록 그대가 주는 고통 가운데 있게 될 것이오라고 말하십시오. 여러분, 그러므로 의인이 되기를 힘쓰십시오. 의인이 형통하고 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경계하십시오. 죄인에게 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거스틴(Augustine)의 말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의인에게는 수고는 지나가도 기쁨이 남는 법이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기쁨은 지나가고 찌르는 고통이 남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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