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박윤선 박사의 복음이해, 변종길 목사(신약신학, 고신대학원 교수)

無益박병은목사 | 2012.12.04 22:36 | 조회 9158

 

본고는 정암신학강좌에서 행한 강의안을 요약 발췌한 것으로 원문은 본사 홈페이지(www.rpress.or.kr) ‘디지털개혁신보’ <열린자료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주

I. 한국교회의 현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윤리 약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여기저기서 비판과 탄식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복음을 잘못 이해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주장이 많이 들려온다. 너무 믿음만 강조하고 행함을 강조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국교회가 그 동안 금과옥조처럼 받들던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예수님은 분명히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가르치셨는데 신학자들이 이것을 ‘이신칭의’ 교리로 바꾸어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왜곡되고 한국교회의 윤리 약화를 가져왔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비판의 대상 가운데는 박윤선 박사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성경 해석과 신학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한국교회를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윤리 약화의 주된 책임을 박윤선 박사에게 돌리는 사람들도 있다.

총신대의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가 산상설교에서도 행함에 대한 강조들을 이신칭의의 관점에서 잘못 해석하고 말았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박윤선 박사에 대해 “칼빈주의라기보다 루터주의식의 사고에 깊이 빠져 있었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주장이 과연 옳은지를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박윤선 박사가 복음을, 특별히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바로 이해했는지를 검토하였다.

박윤선 박사를 비판하는 정훈택 교수의 주장이 과연 옳은지, 그가 과연 박윤선 박사를 바로 이해했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했는지를 검토하고 평가하였다. 많이 논란되는 구절들인 마태복음 5:20, 5:22, 7:21과 요한복음 5:29을 살펴보고, 이어서 이신칭의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야고보서 2장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지면관계상 대표적으로 몇 구절만 간단히 살펴보겠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논문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현재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후기(後記)로 간단히 덧붙였다.

II. 마태복음 5:20

이 구절은 우리에게 큰 위협과 당혹감을 준다. 왜냐하면 여기서 예수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의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그래서 박윤선 박사는 이 구절을 아주 신중하게 해석하였다.

먼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외식(外飾)과 인본주의임으로 높은 것이 아니고 악한 것이다. 둘째,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의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 의이다. 셋째, 이 새로운 종류의 의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의이다.

그러나 정훈택 교수는 이러한 박윤선 박사의 견해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성경 자체의 의도를 왜곡했다고 본다. 정훈택 교수에 의하면, 박윤선 박사는 여기의 ‘너희 의’를 그저 ‘칭의의 의’로 보고 말았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너무나 쉽사리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로 설명하고 말았다고 한다.

하지만 박윤선 박사는 여기의 ‘너희 의’를 단순히 ‘칭의의 의’로 보고 만 것이 아니다. 박윤선 박사는 산상보훈에서 이신칭의의 가르침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잘못을 범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조심스럽게, 그리스도인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실제로 더 나은 의를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이 의는 질적으로 우수한 의이며, 거듭난 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진 의이다.

이에 반해 정훈택 교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예수님의 평가와 정반대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외식(外飾)하는 자’라고 하셨으며(마 6:2,5,16 등),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며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책망하셨다(마 23:25,28). 칼빈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아주 낮게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정훈택 교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높게 평가함으로써 웨슬리의 입장에 서 있으며, 예수님과 칼빈의 평가에 반대되고 있다. 이에 반해 박윤선 박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낮게, 악한 것으로 평가함으로써 예수님과 칼빈의 평가와 입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II. 마태복음 7:21

여기서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신다. 마치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그래서 박윤선 박사는 이 구절에 대해 ‘구원의 이법(理法)’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구약 시대에서처럼 ‘심판 곧 정죄의 법칙’으로 이해하였다.

한편 정훈택 교수는 본 구절을 구원론으로 이해하면서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곧 <믿음> +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그는 여기의 “주여 주여 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곧 참 믿음의 고백으로 본다. 그러면서 현재 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가지만, 미래 천국은 ‘행함’으로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여 주여 하는 자”는 참 믿음이 없이, 형식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자를 가리킨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거짓 선지자들’과 같은 자들이다. 이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22절).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고 하신다(23절). 이들은 예수님이 한 번도 안 적이 없었으며, 참 믿음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것이 우리말 성경에는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으나 원문에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다”로 되어 있다. 즉, 여기서 ‘알다’는 동사가 현재형이 아니라 ‘아오리스트’(aorist)로 되어 있다(에그논). 우리말로는 ‘알았다’로 번역될 수 있다. 그래서 원문의 뜻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다”, 곧 “내가 너희를 한 번도 안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영어 성경에는 다 “I never knew you”로 바로 번역되어 있으나, 우리나라 번역은 (필자가 살펴본 바로는) 모두 다 ‘현재 시제’로 잘못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처음에는 ‘믿음’이 있었으나 나중에 ‘행함’이 덧붙여지지 않아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오해되고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들은 처음부터 참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참 믿음이 있는 자를 가리킨다. 참 믿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고, 선한 열매를 맺게 된다(17절). 따라서 이 구절의 말씀은 ‘형식적인 믿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참 믿음’이 있어야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참 믿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믿음> +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라 참 믿음이 있어야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참 믿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IV. 야고보서 2장

야고보서 2장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본문이다. 야고보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24절)고 말함으로써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 주장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박윤선 박사는 이를 의식하고서 야고보서 2장에 대해 조심스럽게 주석하고 있다.

물론 그가 이 본문의 구절들을 다 분명하게 설명한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예를 들어 21절 주석에서 박윤선 박사는 아브라함의 선한 행실(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일)을 ‘칭의의 증거’로 이해한다.

그러나 정훈택 교수는 박윤선 박사의 이러한 해석을 못 마땅히 여기면서 “그는 법정적 칭의 개념을 완벽하게 전개하지도 못하고, 본문을 제대로 살려주지도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야고보서 논지는 아주 분명하다. 칭의와 순종의 행위를 결합하여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위가 함께 작동했다는 점을 알리는 것이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야고보가 말한 의미를 ‘해석’한다기보다 문자적 의미를 그대로 취하면서 칭의와 행위를 결합시키려는 시도로 보인다. 이러한 것이 일견 매우 성경적이고 문자에 충실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저자가 말하는 ‘의도’를 무시한 해석은 매우 위험한 것이 되고 만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바울과 야고보가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우선 ‘행위’ 또는 ‘행함’이라는 단어(헬: 에르가)가 같이 사용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서로 다르다.

바울에게 있어서 ‘행위’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하는 노력으로서의 행위를 가리킨다. 곧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모든 행위들을 가리키는데, 이런 것들은 하나님에게서 의롭다 함을 받는 데 아무런 공로가 될 수 없다.

이에 비해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 믿음에서 나오는 선한 행위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믿음의 열매로서의 행함이며, 이것이 있어야만 참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과 야고보가 동일한 ‘행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할지라도 그 담고 있는 ‘내용’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의롭다 함을 받는다’(디카이오오마이)는 단어의 개념도 서로 다르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용어를 어떤 사람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인정된다’는 의미, 곧 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정훈택 교수는 바울과 야고보가 사용하는 용어들의 ‘개념상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믿음과 행함을 결합시키고 있다. 이것은 야고보가 사용하는 ‘행함’이나 ‘의롭다 함 받다’의 의미를 고려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는 주장에 대한 지지 구절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박윤선 박사도 야고보서 2장 해석에 있어서 ‘행함’과 ‘의롭다 함 받다’라는 용어들에 대한 바울과 야고보의 ‘개념상의 차이’를 분명히 보지 못한 약점이 있다. 또한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믿음’과 ‘행함’의 대비라기보다도 ‘단순히 말함’과 ‘행함’ 사이의 대비, 곧 ‘거짓된 헛된 믿음’과 ‘참 믿음’ 사이의 대비임을 분명하게 보지 못한 것도 약점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런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박윤선 박사의 주석은 건전한 개혁주의적 견해를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V. 종합적 평가

박윤선 박사의 성경 해석은 대체로 올바른 방향의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산상보훈 해석은 천국 백성의 ‘삶의 표준’을 제시하는 말씀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지나치게 ‘정죄적 기능’ 또는 ‘몽학선생적 기능’에 치우쳤으며, 따라서 어떤 점에서는 ‘루터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요소가 ‘어느 정도’ 있다는 점은 인정된다. 특히 마태복음 7:21 주석에서는 ‘심판 곧 정죄의 법칙’을 말한다고 봄으로써 그 구절의 원래 의미를 놓치고 말았다. 또한 23절의 동사 ‘에그논’의 시상(時相, 아오리스트)에 주목하지 않음으로써 21절을 푸는 핵심 실마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박윤선 박사가 산상보훈의 말씀을 항상 율법의 제2 효용 차원에서만 해석한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 5:20의 해석에서는, 정훈택 교수가 생각한 것처럼 ‘칭의의 의’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좀 불분명하긴 하지만 ‘실제적 의’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마태복음 5:22에서는 율법의 엄한 표준을 말하였고, 중생한 자만이 지킬 수 있음을 말하였다. 24절 해석에서도 우리가 형제 앞에서 해결해야 할 것은 해결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40절 해석에서도 “이것은 기독 신자의 처세 원리(處世原理)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신 예(例)이다”고 하여 율법의 제3 효용(삶의 표준이 되는 기능)을 말하고 있다. 그 외에도 산상보훈의 숱한 구절들에서 오늘날 우리의 삶을 위한 표준으로서, 우리의 윤리에 대한 명령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박윤선 박사가 산상보훈을 ‘정죄적 기능’으로만 이해하고 ‘루터주의적 해석’에 빠졌다고 보는 것은 온당한 결론이 아니다. 물론 박윤선 박사에게 그러한 경향이 있고 또 그렇게 해석한 부분들이 ‘더러’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박윤선 박사는 율법의 제2 효용과 제3 효용을 골고루 강조하고 있다.

이에 반해 정훈택 교수는 복음을 체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그는 마태복음 5:20 해석에 있어서 칼빈보다는 웨슬리적 입장에 서 있으며, 7:21 해석에서는 ‘행함’이 천국에 들어가는 ‘전제조건’이라고 함으로써 복음적 진리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그는 “주여 주여 하는 자”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 대해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다. 또한 23절의 ‘우데포테 에그논’(한 번도 안 적이 없다)에 대해 주목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

야고보서 2장 해석에서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야고보의 진술(21절, 24절)을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구절로 보면서, 야고보가 말한 ‘행함’과 ‘의롭다 함 받는다’는 표현의 ‘의미’를 따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대체적으로 올바른 박윤선 박사의 주석을 자기의 잘못된 견해로 비판하고 있다.

비록 박윤선 박사의 성경 해석은 간혹 부족함을 드러내거나 잘못된 곳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따라 올바른 개혁주의적 해석을 제공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그를 비판하는 학자들은 박윤선 박사를 오해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이 많으며,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오해하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무너뜨리고 있으며 천국 가는 길을 잘못 소개하고 있다. 인간의 행함을 구원의 ‘전제조건’ 또는 ‘필수조건’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부정하고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VI. 감사의 규칙

그러면 이신칭의의 가르침은 행함을 약화시키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이신칭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진리를 바로 깨우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에 크게 감사하게 된다. 그래서 이신칭의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감사함’으로 선(善)을 행하게 한다.

이에 반해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왜냐하면 내가 도대체 ‘얼마나’(how much) 선을 행해야 구원받을 수 있을지, 소위 구원의 ‘커트라인’이 몇 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다. 그들은 구원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에 의해 선행을 행하지만, 그런 선행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공로’로서 선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 의지하여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선을 행하게 된다. 이것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감사의 규칙’이라고 불렀다. 우리의 ‘공로’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리는 선행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고 영광 받으신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의 삶은 ‘감사의 삶’이요 ‘찬송의 열매’가 된다.

VII. 후기: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러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왜 윤리가 문제이고 사회에서 지탄을 받는가? 한국교회는 믿음을 아주 강조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행함이 따르지 않는 것일까?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그것은 한국교회가 ‘성경 말씀’을 바로 가르치지 않아서 그렇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다(롬 10:17). 그리스도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으면 믿음이 자라고, 믿음이 자라면 감사함으로 선행을 행하게 된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함으로, 감사함으로 행하게 된다. 그런데 행함이 없는 것은 결국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믿음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그렇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아니, 한국교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성경공부를 많이 하는 나라가 또 어디 있는가?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저 형식적인 예배만 많이 드린다고, 설교만 많이 듣는다고 믿음이 자라는 것은 아니다.

참 믿음이 생기고 자라려면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치우친 말씀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말씀’을 골고루 들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한국교회는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씀만 편향적으로 전하는 경향이 있다. 은혜 되는 말씀, 부담 주지 않는 말씀만 전하려고 한다. 그래야만 교회가 부흥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듣기 좋은 말씀, 재미있는 말씀을 들어놓고서는 은혜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저 재미있는 인간적인 이야기이거나 경건한 코미디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실제로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갈급해 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참 믿음’이 자라지 않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기보다 ‘성공 철학’을 전하고 있다. ‘긍정적인 생각’이나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전하는 교회들도 많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그래서 교회에는 열심히 다녀도 사회에서는 부정부패를 대수롭지 않게 행하며, 가난한 자들과 약자들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이다. 그 원인은 ‘믿음’은 좋은데 ‘행함’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좋지 않거나 잘못되어서 그렇다. 그 근본원인은 그들이 교회에서 참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전체의 말씀’을 바로 듣지 못해서 그렇다.

따라서 한국교회와 우리나라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교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데 있다. 성공 철학과 인간적인 심리학을 버리고, 재미있는 이야기나 경건한 코미디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데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말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바로 전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한국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본분을 회복하게 될 것이며, 우리 사회는 다시금 밝게 빛나게 될 것이다(2011년 11월 29일 자 기독교개혁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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