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적 관점에서 본 박윤선과 개혁신학 -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하여1)

無益박병은목사 | 2012.12.04 22:34 | 조회 8780

본고는 정암신학강좌에서 행한 강의안을 요약 발췌한 것으로 원문은 본사 홈페이지(www.rpress.or.kr) ‘디지털개혁신보’ <열린자료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주

< 김병훈 목사, 합신대학원 교수 >

 

1. 들어가는 말

박윤선은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에 물량주의로 인한 한국교회의 타락상을 지적하며 바른교리와 바른생활에 기초한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러한 상황 인식은 구체적으로 합동신학교의 출범과 연관을 갖는다.

합동신학교는 한국교회의 개혁이 절실하다고 판단을 할 때, 이에 대한 대응책이며 또한 필요적 요청에 의하여 나타난 결과였다. 따라서 1980년에 출발한 합동신학교는 학교의 설립과 관련하여 설립이념은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 등 3대 개혁이념의 구현을 통하여 개혁신학을 재확인하고, 그리스도만을 주인으로 섬기는 교회를 세우며, 신앙과 윤리가 일치하는 경건 생활을 정착시키는 일”이라고 천명하였다.

왜 박윤선은 개혁신학에서 교회개혁의 가능성과 희망을 보려고 했을까? 그것은 박윤선의 신학사상에는 믿음과 행함에 대한 개혁신학의 원리적인 이해가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윤선은 개혁신학이 성경적인 신학이며, 개혁신학을 충실히 배우고 따를 때 올바른 믿음 생활이 가능하며 그에 합당한 열매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개혁신학은 한국 교회개혁의 요체이며 또한 가능성이었다.

요컨대 개혁신학은 성경에 입각한 교훈을 제시하는 바른 신학이며 바른 믿음을 낳고 그것은 또한 바른 생활을 이루는 바른 행함을 이끌어 내는 신학 원리이기 때문에, 박윤선에게 있어서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따르지 않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개혁하기에 합당한 단 하나의 신학인 것이다.

2. 개혁신학과 박윤선에 있어서의 믿음과 행함

개혁신학에 있어서의 믿음과 행함에 대한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론의 중심인 칭의론과 성화론을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 개신교 칭의론이며, 그러한 은혜를 받은 자가 또한 행함의 열매를 맺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 성화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칭의론과 성화론의 구별은 종교개혁 신학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특별히 종교개혁 당시에 - 지금도 여전히 동일하지만 - 천주교회는 후기 중세 스콜라 신학의 전통을 따라 칭의론과 성화론을 동일시하여 하나의 주제로 다루어 왔기 때문이다.

칭의와 성화의 구별

개신교회가 칭의론과 성화론을 구별한 것과는 다르게, 천주교회는 의롭게 됨과 거룩하게 됨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은 채 소위 의화론(義化論)이라는 주제 하에 관련된 논의를 행한다. 이러한 흐름은 세미-펠라기우스적인(semi-Pelagian) 프란시스칸 교단이 16세기 천주교회의 신학의 주류를 형성한데서도 나타나지만, 어거스틴의 은혜에 대한 이해와 강한 연속성을 가지고 있었던 도미니칸 교단에서도 여전히 나타나는 천주교회 신학의 중심 원리이었다.

어거스틴이 비록 종교개혁자들에게 “오직 은혜”의 신학적 영향력을 강하게 준 것은 사실이지만, 어거스틴에게서도 “의롭게 함(iustificare)”은 신자가 전 생애에 걸쳐서 믿음과 사랑으로 의롭게 변하여 가는 것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종교개혁 이전의 신학은 어거스틴의 ‘은혜론’을 따르는 자들이나, ‘세미-펠라기우스적’인 견해를 따르는 자들이나 모두 의롭게 됨과 거룩하게 됨을 동일한 실재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천주교회는 트렌트회의(1545-63)에서 행함의 순종이 없이도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개신교의 신학을 저주받을 이단적 가르침으로 정죄를 하였다.

하지만 개혁신학은 칭의란 소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 죄사함을 받는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받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성화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새롭게 되는 전인격적인 변화의 은혜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이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의롭게 됨이란 죄사함만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은혜을 받아 속사람이 거룩해지고 새롭게 되는 것이라는 천주교회의 주장과 근본적이 차이를 보인다.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란 무엇인가?

결국 논쟁의 초점은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관련한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있다. 개혁신학과 박윤선은 성경에서 말하는 의롭다 함의 교훈은 성화론과는 별개의 것이며 단지 칭의론만으로 설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천주교회는 성경에서 말하는 의롭다함은 결코 개신교회가 말하는 칭의론이 아니며 성화론을 포괄하는 의화론으로 풀이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천주교회의 의화론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주입된 의’(iustitia infusa)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는 반면에, 개혁신학의 칭의론은 그것은 ‘전가된 의’(iustitia imputata)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개혁신학과 박윤선에 따르면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만을 근거로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천주교회는 성화도 신자의 사죄받을 근거로 여겼으며 더욱이 그리스도의 공로마저도 칭의의 간접 근거라고 말하는 커다란 오류를 범하였던 것이다.

개혁신학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박윤선에게 있어서 의롭게됨의 근거는 죄인이 은혜로 전가를 받는 그리스도의 의외에 다른 어떤 것일 수가 없다. 그는 말하기를 “칭의의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으심으로 확정된 그의 의(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피동적 순종으로 성립된 의로움)로만 성립된다”고 하였다. 속죄에 대한 법적 선언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만 근거할 따름인 것이다.

의롭다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음인가? 아니면 믿음과 더불어 행함으로 말미암음인가?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sola Gratia)에 덧붙여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하였다. 그 까닭은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은혜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의롭다함을 받는 신앙의 원리를 다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혁신학은 물론이거니와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 일에 대한 설명은 그것이 오직 은혜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점에 더하여 또한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일이 어떠한 방식을 따라 죄인에게 이루어지는가의 논의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완성이 되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일이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믿음에 더하여 행함이 있어야 이루어지는가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 칼빈과 박윤선은 간명하게 의롭다함을 받는 길은 오직 믿음뿐이지 결코 행함이 아니라고 단언을 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도구일 뿐이며, 또는 일종의 그릇과도 같은 것이다. 박윤선은 로마서 4장 4-5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의롭다함을 받는 방편은 오직 믿음뿐임을 확고히 밝힌다.

‘칭의의 믿음’과 ‘성화의 행함’의 관계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이 주입된 의로 인한 변화, 곧 의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정적 선언에 따라서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칭의를 말한다는 주장은 곧 바로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칼빈과 박윤선에게 있어서 의와 거룩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원리에 의하여 서로 구별이 되지만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박윤선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이신칭의의 원리를 포도나무가지와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면서 핫지(Charles Hodge)를 인용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의 관계를, 그리고 바빙크(Herman Bavinck)를 인용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성화의 관계를 설명한다.

신자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의롭다함을 받으며, 아울러 그러한 자는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로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며 신자의 거룩함을 이루어 간다고 말한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연합의 이해는 믿음과 행함, 칭의와 성화의 비분리적 연결성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본질적인 원리이다. 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 그와 연합을 이룸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의롭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나뉠 수가 없는 이치에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이루어 가게 된다. 따라서 거룩함에 합당한 선행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이라 할 수가 없다.

칼빈은 이러한 이해를 따라서 천주교회가 믿음을 사랑을 행하는 형성된 믿음(fides formata)과 사랑의 행위가 없는 미형성된 믿음(fides informata)을 구별을 비판한다. 천주교는 이러한 구별을 기초로 개신교의 이신칭의의 믿음은 미형성된 믿음이라고 말하면서, 이신칭의는 행함이 없이도 의롭다고 주장을 하는 잘못된 교리라고 비판을 한다.

이에 대해 칼빈은 믿음을 형성된 믿음과 미형성된 믿음으로 구별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천주교회의 비판에 반론을 전개한다. 칼빈에 따르면 의롭게 하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받는 믿음에 사랑이 없는 믿음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개념일 뿐이다.

박윤선 또한 천주교회가 말하는 ‘사랑의 행위가 결핍된 미형성된 믿음(fides informata)’이란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구원을 얻는 믿음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에게 있어 구원을 얻는 믿음이란 단순한 지식적 동의가 아니라 열매를 맺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주교회에서 말하는 바를 따르면 박윤선이 생각하는 구원에 합당한 믿음은 형성된 믿음(fides formata)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천주교회가 이 말을 사랑이라는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을 한다는 점에 대해서 박윤선은 단호히 거부를 한다. 박윤선에게 있어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란 칭의의 믿음이 항상 다른 구원의 은혜들과 함께 역사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데에 있을 따름이다.

3. 박윤선에 대한 정훈택의 비판과 이에 대한 반론

정훈택은 “행위의 구원론적 의미”의 제목을 달은 여섯 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한국교회는 신자들에게 “자신의 행동,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윤리적인 행위, 윤리 의식의 변화 없이도 기독교인으로 불리울 수 있었고, 참된 기독교인으로 천국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큰 잘못을 범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정훈택은 박윤선에게 문제의 책임이 있으며 그를 극복하는 것이 답이라고 주장한다.

이신칭의에 치우친 성경 해석의 오류?

정훈택은 박윤선이 성경 본문의 해석을 이신칭의라는 구원론적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몰아부친 오류를 범하였다고 강하게 비판을 한다. 그 비판은 박윤선이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성경해석의 방법론을 따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신학적 틀”을 성경에서 증명해 내고자 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본문에 신학적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주관적 해석”이었다고 소리를 높였다. “성경을 더 이상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해석자의 해석과 그 해석의 배후에 있는 해석자의 신학사상을 의존하게 된 것, 이것이 박윤선의 주석과 설교에서 발견되는 치명적인 약점이며 동시에 한국교회의 문제”라고 지적을 한다.

박윤선 주석의 실례

그러나 정훈택이 지적하고 있는 박윤선의 주석적 실례들을 살펴보면 정훈택의 비판이 매우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박윤선의 팔복 주석을 언급하면서 정훈택은 팔복의 윤리적 행동들은 구원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박윤선이 팔복의 윤리적 행동을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증거로 잘못 해석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박윤선과 함께 칼빈은 팔복의 교훈은 팔복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수고의 보상으로 천국이 주어질 것임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팔복을 비롯하여 성경에 기록된 어떤 복도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있으며, 어떤 복도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에 부족하며, 따라서 죄의 용서를 받음으로 얻는 복이 가장 중요하며 으뜸이 되는 복이라는 칼빈의 설명은 산상수훈의 팔복 또한 죄 용서를 전제로 하여 누리는 복임을 말하여 준다. 정훈택의 생각과는 달리 팔복은 구원을 얻기 위한 전제조건일 수가 없다.

정훈택은 빛과 소금의 비유에서 박윤선이 빛과 소금이 가리키는 신자의 책임을 풀이함에 있어서 윤리적이며 사회적인 면을 축소시키고 단지 복음을 바르게 가르치고 전하는 책임에 국한하였다고 비판을 하였다.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서도 소금과 빛은 사도들에게 위탁되어진 복음의 말씀이다. 따라서 소금과 빛의 책무는 복음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는 박윤선의 주석은 칼빈의 것과 일치한다. 맛을 잃은 소금은 부패하여 진리의 말씀을 전하기에 합당치 않은 제자들을 가리킨다.

정훈택은 박윤선이 마태복음 5장 17절 이하의 산상수훈의 의미에 대하여 말하기를 율법의 바른 해석에 따른 도덕적 표준이 무엇인지를 보이면서 그 율법을 실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하여 결국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도록 하는 몽학선생의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고 지적한다.

그의 생각에 그렇다면 박윤선의 해설은 예수님이 사실상 불가능한 명령을 행하라고 주신 것이 되기 때문에 잘못된 해설이라고 비판을 하였다. 과연 그런가? 칼빈도 또한 박윤선과 같이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거룩한 삶의 규범으로 제시하신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다만 우리가 연약함으로 율법의 표준에 이르지 못함을 말한다.

정훈택은 율법의 기능이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다고 해서, 신자가 행하여야 할 거룩한 삶의 규범으로서 그 기능이 부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하는 듯이 여겨진다. 박윤선이나 칼빈이나 산상수훈에서 해설이 된 율법의 거룩한 삶의 규범이 육신이 연약한 죄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죄인됨을 자각케 하지만 또한 동시에 성도가 마땅히 살아야 할 표준적인 규범이기도 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박윤선은 칼빈과 다를 바가 없다.

박윤선은 산상수훈이 율법에 말하는 탁월한 도덕적 표준을 밝혀준다고 말하며 그 표준대로 힘써 행하여 할 것을 주석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강조한다. 박윤선의 주석 속에는 산상수훈도덕적 표준이 너무 높으니 이는 지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고 해설한 구절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해석이 얼마나 잘못된 해석인가를 대조하여 밝혀주고 높은 도덕적 표준에 따라 순종해야할 의무와 적용적 교훈을 서술해주고 있다. 그러나 칼빈이나 박윤선이나 산상수훈의 교훈이 그 교훈을 행하여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태복음 5장 20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에 있어서 박윤선은 칼빈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해석을 취한다. 박윤선에게 있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인본주의적이며 외식이며 실질에 있어서는 불의요 죄악이다. 칼빈에게 있어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란 오직 율법의 외적인 의무에만 국한된 외식과 위선일 뿐이며 거짓 의기에 사악한 것이었다.

반면에 이것들보다 더 나은 의란 박윤선에게 있어서는 서기관들의 의와는 본질상 다른 새로운 의이며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의이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율법의 순수한 형태로 회복된 의이다. 즉 박윤선과 칼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는 서로 다른 종류의 의인 것이지, 정훈택이 생각하듯이 같은 종류의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행한 것보다 더욱 더 많이 행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말함도 아니다.2)

야고보서 2장 21-24절의 박윤선의 주석에 대한 정훈택의 비판은 칼빈에 의해서 전혀 지지를 받지 못한다. 칼빈은 박윤선이 그러한 것처럼 아브람이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은 시점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시점보다 훨씬 이전인 것을 지적한다.

그런데 왜 야고보서는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말하는가를 자문하고 칼빈은 답하기를 우선 이것은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에 믿음으로 인한 의의 전가를 받았다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참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순종과 선행으로 그 의를 증거함으로 그가 의로운 자임을 인정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행함의 증거를 통하여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임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뜻한다.

따라서 칼빈과 박윤선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믿음만이 아니라 이삭을 재물로 바친 것과 같은 행위가 함께 작용을 했다는 정훈택의 주장은 전혀 동의를 받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야고보서는 칭의가 믿음과 더불어 행함으로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선한 행실을 낳는 믿음으로 칭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정훈택은 누가복음 10장 25-37절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그 비유가 도입이 되는 첫 머리에 율법사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자 주님께서 이에 대한 대답으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심으로써 율법의 대 강령을 제시한 것으로 인해 박윤선이 당황했을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단언한다. 정훈택의 말대로라면 칼빈도 당황했어야 한다. 박윤선의 인용에 담긴 해석은 칼빈의 해석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도 박윤선도 당황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칼빈도 박윤선도 둘 다 율법의 정죄 기능과 몽학선생의 기능을 본문에서 살피고 있으며 그것이 율법사에게 주신 주님의 대답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임을 밝히고 있다.

정훈택은 박윤선과도 어긋나며 또한 칼빈과도 어긋나 있다. “행하면 살리라”는 박윤선에게만 영생의 길이 아닌 것이 아니라 칼빈에게도 영생의 길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박윤선이나 칼빈이나 본문에서 구원을 얻기 위한 어떤 전제조건으로서의 행함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한 가지 사례만 더 살피고 정훈택의 비판에 대한 검토를 마치도록 하자. 정훈택은 요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 비유에 대한 주석에서 박윤선은 신자가 열매를 맺지 못해도 찍힘을 받지는 않고 단지 찍힘을 받을 위태로운 자리에만 있게 된다고만 말하였음을 지적하면서 비판을 한다. 포도나무 비유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면 나무에서 가지가 끊어진다는 심판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담고 있지만, 박윤선은 포도나무 비유를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여, 이들은 끊어지지 않는 것으로 해석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본래 하시고자 한 말씀이 퇴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훈택이 인용한 박윤선의 설명은 8절에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는 주석을 하면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자는 나무와 같이 찍힘을 받을 위태로운 자리에 있는 것이라” 했을 때,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하는 신자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8절이 열매를 많이 맺는 자에 대해서 말하는 바에 비추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자”라는 표현으로 박윤선이 뜻하고자 한 것은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하는 신자”를 말함으로 보아야 한다.

즉 성령의 은혜로 행실의 열매를 풍성히 맺지 못하고 전도를 많이 하지 못하는 신자를 뜻하는 것이다.

박윤선뿐 아니라 칼빈도 또한 2절과 6절에서 언급이 되고 있는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하는 가지란 외식자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를 한다. 이들은 주 안에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밖에 있는 외식자들인 것이다. 따라서 정훈택의 비판은 박윤선의 논지를 바르게 반영하지 못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4. 정훈택의 신학적 오류: 행위의 구원론적 가치(?)

정훈택은 개혁신학 신앙고백서와 한국 교회의 개혁신학자 박형룡 박사, 그리고 장로교 헌법이 성화와 선행에 대하여 말하는 부분을 발췌하여 나열한 후에 말하기를 비록 “구원론적이라는 단어를 채용하지는 않았지만 행위(삶)의 구원론적 가치를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어 말하기를 다만 한국교회가 “이 교리를 제대로 설득하거나 소화하거나 발휘하지 못했다”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정훈택이 말하는 행위의 구원론적 의의나 가치는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바처럼 행위는 의롭게 만드는 믿음은 선행을 필연적으로 결과하며, 선행은 믿음의 필연적인 감사의 열매이며 또한 증표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듯이 보인다. 고의적으로 죄의 행습을 계속하며 성화의 과실을 맺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강조를 더하고자 하는 듯이 여겨진다.

만일 그렇다면 정훈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박윤선이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정훈택은 박윤선을 비판할 아무런 신학적 이유를 갖지 못한다. 하지만 실제로 정훈택이 박윤선에 대해 계속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정훈택은 자신이 요약한 개혁신학의 교훈, 또는 박윤선의 이해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행위의 구원론적 의의와 가치를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정훈택이 믿음과 행위에 관한 개혁신학의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만일 믿음으로만 구원이 확정이 된다면 누구도 윤리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정훈택은 ‘칭의’의 의를 강조하며 천국행이 보장이 된다면 윤리적 순종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이 단지 상급의 크고 작음과 관계가 될 뿐이며, 그렇다면 아무도 윤리적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며, 기독교인들의 바른 삶의 원동력은 찾을 길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을 한다. 이와 같은 정훈택의 생각은 너무가 강력하여 개혁신학이 그에게는 아무런 답이 되지를 못한다.

그렇다면 정훈택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행위가 구원의 결정에 어떠한 의미에서이건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윤리적 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정훈택은 스스로 자신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복음이나 십자가의 은혜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성경에서 강조하는 윤리적 삶의 실천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에 있다고 한다. 정훈택 자신이 제시하는 한 가지 해결 방안은 미래의 천국이라는 종말론적 의미를 행위에 부여하는 것이다.

정훈택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이라는 구별된 두 개념에 있어서 행위의 의의와 가치를 각각 부여한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관련하여서 행위는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결과인 “열매, 증거, 표식”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자연스러운 발로”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관련하여서 행위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관련하여 신자의 윤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의 통치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열매이므로 이때의 천국과 윤리는 뿌리와 열매, 혹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행위는 이미 받은 천국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즉 이미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며,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관련하여서는 사뭇 행위의 의의와 가치가 달라진다. 그것은 행위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구원론적 전제조건이라는 어마어마한 무게를 갖는다.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행위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며, 반대로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행위에 대한 약속이며 보상이며 또한 복이다. 말하자면 현재의 하나님 나라에 속한 신자들은 이미 받은 하나님 나라의 은혜의 결과로 행위의 열매를 맺게 되고 이러한 행위들이 오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들이 된다는 설명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의 전제 조건이며,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의 약속이며 보상이며 복인 셈이다. 이러한 정훈택의 설명은 그가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의 점진성에 따른다.

믿음으로 주어지는 현재의 하나님 나라와는 다르게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윤리적 삶을 제대로 산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믿음으로 현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이루는 방편으로써 윤리적 삶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을 때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보상으로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전제조건으로서의 윤리적 삶은 현재의 하나님 나라가 점진적으로 발전되어가는 과정 중에 누리는 은총에 대한 체험이며 소유이므로 결국 현재의 하나님 나라에 속한 믿음의 사람들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행함의 사람들로 인정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정훈택의 답이 긍정적이라면 그의 설명은 개혁신학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며, 또한 박윤선에 대한 날선 비판도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부정적이라면 심각한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매우 위태롭게도 정훈택의 답은 후자인 듯하다.

정훈택이 말하는 바는 이렇게 이해된다. 첫째, 미래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에 하나님의 아들다운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원리는 필연적이다. 즉 현재의 선한 행위가 없이는 미래의 아들됨도 없다.

둘째, 현재의 선한 행동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져 있다. 셋째, 인간에게 있어서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기 때문에 이미 받은 현재의 은총을 기초로 미래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미리 감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정훈택의 이러한 판단은 두 가지 이해와 맞물려 있다. 하나는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산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란 과거에서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해가는 과정으로 보는 이해이다. 이러한 이해는 인간에게 있어서 미래의 결과란 아직 주어진 것이 아니며 오직 현재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이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결과를 미리 확신하고 현재 나태하거나 방종하는 일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가 나타난다. 이것을 바르게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정훈택 자신의 고민, 곧 어떻게 하면 복음이나 십자가의 은혜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성경에서 강조하는 윤리적 삶의 실천을 도모할 수 있게 하겠는가에 대한 핵심적인 대답이 된다.

컨대 정훈택이 찾은 답은 이렇다. 현재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허상인 미래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복을 받기 위하여서는 현재에도 항상 최선을 다해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한 자극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신칭의로 인한 윤리적 나태와 방종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정훈택의 판단이다. 하나님 나라란 본래 이러한 불확실한 미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현재의 윤리적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확장되어가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행위는 구원론적 의의와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행위에 이러한 구원론적 의의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개혁신학과 근본적인 충돌을 일으킨다. 일찍이 칼빈은 처음에는 믿음으로 의를 얻지만 그 후에는 선행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천주교회의 주장을 거부하였다. 믿음은 의의 시초에 불과하며 그 이후에는 행위가 의를 준다는 생각은 성경의 교훈에 어긋난다.

물론 개혁신학에 있어서 신자의 윤리는 종말론적으로 천국에 이르기에 합당한 자임을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 즉 구원받는 참 믿음을 가진 자는 행함을 통하여 자신이 천국에 합당한 자녀임을 말하는 증거를 보이게 된다. 그렇다면 개혁신학에서도 역시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윤리가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정훈택이 말하는 행위에는 그 이상의 의의와 가치가 부여된다. 정훈택에 따르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현재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된 신자가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자녀됨에 대해 미리 감사를 드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하나님의 자녀는 불확실한 미래에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노력을 해야 할 뿐이다.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면 현재의 행함이 미래에 반드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윤리와 미래의 보상 사이의 필연성을 강조한다하더라도 여전히 현재의 행함의 동기는 미래의 결정을 위한 기반이며 근거가 된다.

개혁신학은 정훈택의 이러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거부를 한다. 무엇보다도 개혁신학에서는 현재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 믿음에 합당한 행위의 열매를 맺는 동기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실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개혁신학에서는 현재나 미래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은혜로 인한 것이지, 어떤 의미에서도 보상을 받는 수고나 공로가 아니다.

개혁신학에서의 신자의 윤리는 현재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곧 미래의 백성으로 이어져 가기 때문에, 현재나 미래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불러주신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 이외에 다른 어떤 동기나 자극이 갖지 아니한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나중에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음을 말하는 정훈택의 주장은 중세 후기의 세미-펠라기우스적인 구원론에 매우 근접해 있다.

5. 나가는 말

한국교회가 윤리적으로 좀 더 개혁이 될 수 있을까? 종교적 열심은 있지만 거룩한 삶으로의 변화의 증거들은 미약한 한국교회에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 곳곳에서 모이는 기관들과 집회 그리고 학회들에서는 회개를 통한 신앙의 질적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와 외침이 나오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경고의 소리는 한국교회가 중세 후기의 타락상에 못지 않게 타락하여, 돈, 권력, 명예, 그리고 차마 드러내 소리를 내지는 못하지만 간음의 죄악들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정도가 회개를 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과 더불어 교회 성장이 둔화되고 결국에 성장률의 감소, 더 나아가 절대 교인수마저도 감소하는 추세가 나타나자, 수 몇 년 동안에만도 회개를 외치는 얼마나 많은 집회들이 있었는가? 그러나 한국교회는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는 듯하다. 목회자들과 관련한 여러 소식들은 여전히 사회윤리적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개인도덕적인 면에서도 부끄럽기만한 일을 여전히 담고 있다.

신학의 문제인가? 아니면 신학을 배우지 못한 탓인가? 그것도 아니면 신학대로 신앙을 행하지 않는 문제인가? 박윤선에게 있어서는 모두가 문제였다. 그는 선교 100주년을 바라보는 1984년에 마치 오늘의 교회를 미리 바라보듯이 교회개혁이라는 거룩한 과제와 올바른 교리의 선포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박윤선의 외침은 지금의 한국교회의 문제가 최근 몇 년 사이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이 되어온 것임을 말해준다. 한국교회가 숫적 성장을 급격히 경험한 7,80년대에 이미 부패의 양상도 함께 확산되어 가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케 한다.

박윤선은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한 동력과 가능성을 개혁신학에서 찾았다. 그에게 있어서 개혁신학은 곧 바른신학이었다. 그리고 바른신학의 기초 위에서 바른교회를 이루고, 바른교회를 통해서 성경의 교훈에 합당한 삶을 이루어가는 바른생활을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였다. 이 모든 일 가운데 중요한 신학의 원리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과 행함의 관계이며, 또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행함으로 거룩하다함을 이루는 것의 관계이다.

박윤선은 개혁신학에 매우 충실한 개혁신학의 선포자였다. 박윤선의 신학은 개혁신학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지 않고 구별하며,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란 죄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해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것을 뜻하였다. 그러한 의를 덧입는 일은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굳건히 함으로써 복음이 전적인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명료하게 가르쳤다.

그렇다면 박윤선의 개혁신학이 오늘날 한국 교회들의 신앙 모습에 어떠한 변화를 줄 수 있을까? 박윤선은 의롭게 하는 믿음이 거룩하게 하는 행함과 구별이 되지만 분리되는 것이 아니며, 칭의는 필연적으로 성화를 낳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의롭다함을 받는 자는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거룩함을 이루어 감을 잘 드러냈으며 또한 충분히 강조를 하였다. 그 결과 개혁신학의 믿음이란 결코 입술로만 고백하는 믿음 또는 지식뿐인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결과로 반드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임을 가르쳤다.

이로써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개혁신학에 근거하여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의 세 가지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였던 박윤선은 먼저 개혁신학을 자신의 신학으로 정립하였으며, 아울러 한국교회에 소개하며 뿌리를 내리도록 하는 충실한 개혁신학자로서의 사역을 이루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왜 박윤선을 다시 읽어야 하며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박윤선의 신학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절실히 필요한 신앙의 원리, 곧 믿음과 행함은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믿음은 필연적으로 선행을 열매로 맺으며 칭의는 바로 성화로 연결이 된다는 신학적 기반을 충실히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보배로운 영적 유산이다.

1) 본 글은 제 23회 정암신학강좌)2011, 은평교회)에서 발표한 것을 요약한 것으로, 전문을 보기 위하여서는 신학정론 29/2(2011), 458-534(출간예정)을 볼 것.

2) 박윤선, 『공관복음(상)』, p. 175; 『칼빈주석: 공관복음』, p. 275-7 (2011년 11월 29일 자 기독교개혁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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