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티스트 논쟁에 대한 역사적 재해석 이현준 박사

無益박병은목사 | 2017.03.31 23:36 | 조회 6108

- 도나티스트 논쟁에 대한 역사적 재해석

이현준박사

 

* 역사적 배경

 

기원후 311, 당시 북아프리카의 가장 융성한 도시였던 카르타고의 감독 선임을 둘러싸고 북아프리카 교회는 극심한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북아프리카 지역의 신학적 전통 및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한 주류 측과 수적인 열세를 해외 교회들과의 연대를 통해 극복해보려는 소수파가 대립하면서 북아프리카 교회는 카르타고에 두 명의 주교를 배출함으로써 두 개의 교회로 나눠지게 된 것이다.

 

분열 이후 다수파 교회는 소수파들을 배교자들’(traditores)이라 부르며 그 정통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가톨릭을 자칭한 소수파들은 다수파를 도나티스트들’(Donatists)이라는 경멸적인 수식어와 함께 이단자 내지는 분파주의자로 간주하였다. 1세기 동안 지속된 북아프리카교회의 분열과 대립은 마침내 기원후 411, 카르타고(Carthage) 종교회의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끄는 가톨릭교회가 반대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최종적인 매듭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승리로 알려진 이 종교회의는 피상적인 승리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는 못하였다. 이단으로 정죄 받은 이후에도 도나티스트교회는 2세기 이상 여전히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다수를 차지하였고, 철저히 고립된 채 독자생존의 길을 걷던 그들은 7세기 초 이슬람의 침공으로 쓸쓸히 역사적 종말을 맞이하였다. 그로 인해 북아프리카 지역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기독교의 불모지요 가장 왕성한 이슬람 지역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되었다.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고 했던가.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은 도나티스트 논쟁으로 알려진 북아프리카 교회분열 사건을 승자의 입장, 곧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가톨릭교회의 시각으로 접근하면서 정통과 이단이라는 교리적이고 이분법적인 해석을 답습하였다. 때문에 북아프리카에서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 수적 우위에 있었던 토착적인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사에서 여전히 도나티스트라는 굴레 속에 고대의 전형적인 이단자 내지는 고집불통의 원리주의자, 천년왕국적 종말론자, 위험한 열광주의자, 심지어 사회 반란자로까지 묘사되고 있다.

 

* 승자의 입장에서 본 편향적 시각의 결과

 

그러나 북아프리카 도나티스트들에 대한 이러한 일방적 해석과 부정적 이미지들은 역사를 승자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편향적 시각의 산물일 뿐이다. 특히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와 키프리아누스(Cyprianus)로 이어지는 북아프리카 신학 전통을 충실히 계승한 도나티스트들의 입장을 여전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각에서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옳은 판단이 아니다.

 

정통 기독교사는 테르툴리아누스를 서방 신학의 아버지로, 그리고 키프리아누스를 서방기독교 교회론의 토대를 놓은 위대한 교부로 추앙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상적 후계자인 도나티스트들을 정통신앙의 이단자들로 취급하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도나티스트 이단 정죄의 이유

 

그렇다면 도나티스트들은 무엇 때문에 이단으로 정죄를 받아야만 했을까? 역으로, 그들은 왜,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혹독한 박해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저항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것일까? 과연 북아프리카 두 라이벌 공동체들의 신학적 입장 차는 본질적으로 정통이단으로 구분될 만큼 대단한 것이었을까?

 

도나티스트들에 의해 직접 쓰여진 저술들이 거의 소실된 상황에서 부득이 역사학자들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반() 도나티스트 서술은 과연 얼마만큼 신뢰할 만한 것일까? 또한 최근의 비판적 연구 업적을 바탕으로 도나티스트 신학은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인가?

 

도나티스트 논쟁은 그 성격에 있어서 미시적인 신학논쟁에서부터 거시적인 전환기적 충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학자들은 도나티스트 논쟁의 성격규정의 문제를 놓고서 다양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1) 교리적인 이단논쟁이라는 주장에서부터 2) 전환기적 희생양 사건, 3) 콘스탄티누스가 야기한 문제, 4) () 제국적 사회저항운동 등 학자들의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들이 등장하였다. 도나티스트 논쟁의 성격규정 문제와 더불어 도나티스트 신학의 역사적 재구성 문제 역시 최근에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과제이다.

 

도나티스트 논쟁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사료들은 거의 모두가 역사적 승자인 가톨릭 신학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과연 이들에 의해서 기록된 역사가 얼마만큼의 진정성을 갖고 있는지는 보다 세심한 주의와 비판적 분석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만약 현존하는 사료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문자적 접근방식을 벗어나 시대적 정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료에 대한 냉철한 비평작업을 시도한다면 도나티스트 신학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설명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논문은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염두에 두면서 지금까지 도나티스트라는 이단의 굴레에 갇혀 있는 북아프리카 토착교회에 대한 역사적 재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특히 4세기 역사적 전환기 상황에서 그들이 추구하였던 교회론의 실체와 성격을 북아프리카의 신학적 전통과 역사적 정황의 빛에서 세심한 사료비판을 통하여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1) 초기 북아프리카 교회분열 사건의 본질적 성격을 역사적 정황으로부터 해석하고, 2) 도나티스트 논쟁의 구심점이 되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반 도나티스트 저작들 속에 나타난 쟁점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도나티스트 신학, 특히 그들의 교회론을 재구성하며, 3) 북아프리카 교회분열 사건이 향후 교회사의 전개에 미친 영향과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 아프리카 교회 분열의 본질적 성격

 

팔레스타인에서 유대교의 한 분파로 시작된 기독교가 로마제국 전역의 세계적인 종교로 발돋움하고, 잔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다양한 계층들을 흡수하면서 제국의 문화적 체제로 성장했을 때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질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Quid sit christianum esse?) 이것은 기독교인의 자기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자 동시에 교회의 경계선(boundary)에 관한 질문이었다. 박해기의 많은 기독교 공동체들, 특히 북아프리카의 열정적 신앙공동체는 언제나 이 질문에 대해 단호한 답변을 내놓았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이며 임박한 종말을 준비하는 성인들의 교제 공동체이다. 너무나 자명하게 받아들여졌던 이런 대답도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으로 시작된 시대의 변화 앞에서는 가장 문제투성이의 답변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마르쿠스(R. A. Markus)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4세기의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그들 자신의 과거였다.’

 

마르쿠스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기독교의 몰락과 중세기독교의 정착과정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는 도나티스트와 펠라기우스 논쟁을 통하여 소수의 영적 엘리트 중심의 완전주의적

교회론을 극복하고, 새로운 상황에 맞는 평범한 기독교인’(Christian mediocrity)의 시대를 활짝 열어 젖혔다.

 

그의 혼성체 이론, 절대은총의 교리, 예정론, 인간론 등 그의 주요 신학사상은 새로운 중세 기독교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얻은 것이 있으면 잃은 것도 있는 법. 북아프리카의 경우, 가톨릭교회의 승리는 결과적으로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 그리고 도나티스트들로 이어지는 초기기독교 시대에 가장 풍요로운 원천들 가운데 하나였던 북아프리카의 신학적 전통과 교회를 잃고 말았다.

 

* 프랜드 존스 논쟁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소위 도나티스트 논쟁이라 일컬어지는 북아프리카의 치열했던 교회분열 사건의 성격을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 가운데서도 프렌드(Frend)와 존스(Jones)의 논쟁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프렌드는 신학적 요인뿐만 아니라 민족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요인 등 실로 거의 모든 인간 삶의 영역에서 북아프리카 기독교 분열의 원인을 찾았다.

 

반면 존스는 도나티즘은 로마제국 내의 여느 다른 이단 종파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족적이거나 사회적인 차원의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었음을 주장하였다. 존스는 결론짓기를, 당시에 신학적 문제가 민족주의나 사회주의보다 훨씬 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하였다.

 

이런 형태의 논쟁은 보는 입장에 따라 개인의 주관성이 많이 개입되기 때문에 쉽게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그들의 논쟁은 학계의 고전적인 논쟁으로 자리 잡으면서 거의 반세기가 지나도록 아직까지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북아프리카 교회분열 사건의 성격 규정과 관련하여 한 가지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는 초기기독교 시대에 신학이라는 범주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영역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북아프리카 교회분열 사건은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가톨릭 신학자들에 의해 도나티스트 논쟁이라는 교리적, 신학적 분쟁의 형태를 취하였지만, 키르쿰셀리온들(Circumcelliones)이 종교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사회 경제적 좌절감을 표출하였던 것에서 보듯이, 그 본질에 있어서는 신학적 분쟁이자 동시에 사회적 저항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것이 존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오늘날 민족주의차원의 저항운동은 아니었을지라도 이 논문 III(초기 북아프리카 교회분열의 역사적 전개)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북아프리카 두 공동체들 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상이성은 초기 북아프리카 기독교가 안고 있었던 가장 본질적 특성이자 난제였다.

 

* 교회론 논쟁은 단순한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야

북아프리카 교회분열에 대한 순수 신학적 해석은 그 기원에서부터 딜레마에 봉착한다. 스스로 배교자임을 고백한 실바누스(Silvanus)305년 키르타(Cirta)의 주교로 선출된 반면, 카르타고의 카에킬리아누스(Caecilianus)는 동일한 이유에서 도나티스트들에 의해 311년 주교 임직이 무효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을 풀어주는 실마리는 아비티니안(Abitinian) 사건으로 인한 대중들의 반()카에킬리아누스 정서이다. 이후 두 공동체는 콘스탄티누스 치하의 박해(317-21)와 마카리안 박해(347), 키르쿰셀리온들의 약탈 등을 경험하면서 서로를 향한 적대감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4세기 후반, 로마정부에 의한 종교적 박해가 휴면기에 들어가자 두 공동체 간의 감정적 적대감은 상당 부분 완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길도(Gildo)의 반란(398)이 실패로 돌아가고, 다시금 로마정부와 결탁한 가톨릭들의 대반격이 개시되면서 두 공동체들 간의 오랜 싸움은 결국 411년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끄는 가톨릭교회가 도나티스트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전략

가톨릭을 승리로 이끈 아우구스티누스의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신학적으로 도나티스트들의 오류를 입증함으로써 그들의 신학적 전거를 박탈하는 것이요, 둘째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저항하는 도나티스트들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전략이 대화와 설득의 과정이라면, 두 번째 전략은 물리적 힘을 통한 최후의 해결 수단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두 전략들은 모두 기대하는 것만큼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대화와 설득을 통해 북아프리카에서 교회일치를 이루기에는 아우구스티누스는 너무 극단적 논쟁가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라이벌 공동체의 신학과 현실에 대한 이해도 상당히 취약하였다. 세속권력에 의한 종교적 탄압정책 역시 서로마제국의 몰락과 반달족의 침입으로 결국 일시적인 성공에 그치고 말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본질이 의인과 죄인의 혼성체(Corpus Permixtum)임을 강조하면서 도나티스트들의 완전주의적 교회론의 허구성을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끊임없이 반박하였다. 그러나 실제 도나티스트 교회론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해한 것처럼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거룩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교회론은 틸리이(M. A. Tilley)‘collecta’로 표현한 것처럼16) 공동체성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교회의 거룩성은 구성원 개개인의 완전함이 아니라 제의적 순결성과 하나님의 법(the Law)을 지키고 있는 공동체적 거룩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곧 아우구스티누스가 이해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거룩성과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 교회론 논방

411년 카르타고 종교회의 셋째 날, 도나티스트들과 가톨릭들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그물의 비유를 놓고서 구별의 때에 관해 열띤 공방을 벌였다. 그날 발표된 도나티스트들의 공식 성명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그들[가톨릭들]은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한 그물 안에 잡혀서 해안까지 가져온다는 것이 곧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가 함께 종말의 때까지 공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나쁜 고기란 죄가 드러난 자가 아니라] 죄가 숨겨진 사악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인 줄은 깨닫지 못한다. 바다에 던져진 그물에 관해 말하자면, 어부들-곧 사제들-[해안에 도착할 때까지 분별을 늦추는 것은] 해안에 도착해서 고기들을 내려놓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는 과정을 거치기까지는 어떤 것이 좋고 나쁜지 그 내용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종말론적 심판을 언급하면서 마태복음 312절을 인용했을 때 페틸리안(Petilian)은 이렇게 반박하였다. ‘복음서 기자는 감춰진(hidden)이라고 표현한 것을 당신들은 혼합된(mixed)이라고 부른다.’

 

도나티스트들이 보기에 가톨릭교회는 악이 그 정체를 드러냈을 때조차도 그것을 치리할 수 없는 무능한 공동체였다. 도나티스트들은 비록 자신들의 회중 가운데도 죄인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의 죄가 드러났을 때는 곧바로 치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들이 곧 참 교회공동체임을 주장하였다. 교회는 행악자들을 자신의 거룩성과 상관없이 포함할 수 있고, 또 포함하고 있다는 가톨릭의 주장은 도나티스트들에게는 이미 드러난 죄조차 치리할 수 없는 그들의 방종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교회도 공적인 죄인들을 출교를 통해 치리하기 때문에 방종이라는 말은 전혀 맞지 않는 얘기라고 반박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때때로 교회의 권위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경우에 사랑, 평화, 일치를 위해 사악한 자들을 묵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그의 주장의 신빙성을 약화시키고 말았다.

 

* 도나티스트 교회론은 카톨릭과 큰 차이 없어

교회의 본질에 대한 가톨릭과 도나티스트의 신학적 입장은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학적 입장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교회의 거룩성의 근거가 구성원들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서로가 부인하지 않는 한, 그들의 교회론의 차이는 생각 밖으로 그리 큰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에노(Eno)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교회의 역사에서 흔히 보는 것처럼,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가 약하거나 결여되어 있다면 차이가 그리 크지 않는 문제들조차도 해결되는 일들은 거의 없다.’22)

 

교회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자격이 없는 성직자에 의해 거행된 성례의 유효성 문제에 있어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티스트들의 입장을 과장하고 확대 해석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도나티스트들이 성례를 집행하는 사제는 도덕적으로 전혀 죄가 없는 완전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묘사하였다. 그러나 파르메니아누스(Parmenianus)의 교회론23)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도나티스트들은 집례자의 개인적인 거룩성을 성례의 전제조건으로 삼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집례자가 속한 공동체가 성령이 활동하실 수 있는 참 교회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문제 삼았을 뿐이었다. 물론 그 기준은 순교자 전통의 교회인가 배교자 전통의 교회인가 라는 것이었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핵심 정죄는 교회 분열의 죄

아우구스티누스는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해 제기된 이래 북아프리카 기독교의 오랜 전통이 된 죽음에 이르는 죄목들’(deadly sins), 곧 살인, 간음, 배교의 3대 중차대한 죄들의 구별을 거부하였다.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용서받을 수 없는 가장 큰 죄악은 이런 전통적인 죄목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분열의 죄였다.

 

그러나 도나티스트들이 말하는 자격이 없는 성직자란 제2의 세례, 곧 순교가 아니고서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한 성직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305년에 티기시스(Tigisis)의 대주교 세쿤두스(Secundus)에 의해 소집된 종교회의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실제로 도나티스트 공동체 안에서도 일부 배교자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리마타(Limata)의 퍼퓨리우스(Purpurius)처럼 조카들을 살해한 경우도 있었지만, 311년 교회가 분열된 이후로는 그와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점으로 미루어 대체적으로 이런 원칙이 지켜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기독교 황제 시대를 살아가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이런 죄의 구분은 더 이상 설득력도, 필요성도 없는 것이었다.

 

재세례의 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례의 정당성과 효력을 나누어 설명하였다. 성례는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적 형식으로 거행된 세례는 이단이나 분파 공동체에서 집행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죄사함, 중생, 구원과 같은 세례의 효력은 오직 가톨릭교회만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공동체들의 세례가 온전한 것이 되기 위해서 가톨릭교회로 돌아와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은 상당히 정교하고 심오한 측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효력을 상실한 세례의 정당성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낳게 만든다. 세례의 정당성과 효력의 구분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재세례의 부당성을 밝혔지만, 오직 가톨릭교회의 세례만 효력을 갖는다는 그의 주장은 결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고, 따라서 참다운 교회공동체 밖에서 행해진 세례는 유효하지 않다는 키프리아누스와 도나티스트들의 세례관과 내용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 재 세례의 문제는 신학적인 것 보단 환경적인 문제와 관련

더욱이, 재세례로 인한 로마교회와 북아프리카교회 간의 갈등은 재세례 제의(祭儀) 그 자체로 인한 것보다는 서로 다른 교회적 환경 및 지역교회 혹은 감독의 자치권과 관련된 문제가 보다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곧 재세례 문제가 신학적인 논쟁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정치적 문제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재세례의 부당성을 밝힌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증이 제아무리 그럴 듯한 것이라 할지라도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에 의해 이미 북아프리카 신학 전통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은 재세례 관행을 쇄신하기에는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겠다.

 

도나티스트 논쟁 중 성례론과 교회론에 관한 부분이 일반적으로 사색적 신학의 영역에 속한다면, 교회일치와 분파 문제, 그리고 교회와 국가 문제는 교회의 실천적 영역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도나티스트 논쟁에 관한 전통적인 서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각을 답습하면서 주로 성례론과 교회론을 중심한 신학적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경향을 보여 왔다.

 

* 양 측간의 교회론의 차이는 근본적이지 않아

그러나 북아프리카 기독교의 역사적 정황의 빛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도나티즘에 대한 이 논문의 신학적 재구성의 결과는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게 하였다. , 신학적으로 두 공동체들은 아우구스티누스와 근대 교회사가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본질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도나티스트 교회론이 구성원들의 도덕적 완전함을 요구한다든지, 성례의 효력이 집례자의 자격에 의존한다는 식의 전통적 설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편협한 시각과 수사학적 과장이 빚어낸 결과로써 마땅히 재고되야만 한다. 오히려 두 공동체들 간의 본질적 차이는 신학적인 문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회일치의 방법론과 세상과 국가에 대한 상이한 시각차 등 실천적인 부분에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티스트교회가 참 교회가 아닌 결정적 증거로 그들의 지역적 제한성을 제시하였다. 보편적(세계적) 교회로부터 분리된 채 자신들만이 참 교회공동체라는 도나티스트들의 주장이야말로 그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틸리이에 따르면, 실제 도나티스트들은 북아프리카 외에는 정통교회가 없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세계교회가 북아프리카 가톨릭들과 연합함으로써 교제의 대상을 잘못 선택했다는 것을 지적했을 뿐이었다.

 

346년경에 대 도나투스(Donatus the Great)가 콘스탄스 황제에게 올린 탄원은 이 같은 틸리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도나투스는 이 탄원을 통해 카르타고 감독으로서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나아가 세계교회와의 교제를 회복함으로써 북아프리카교회의 분열을 종식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시도가 결과적으로는 마카리안 박해라는 대재앙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아무튼 도나티스트들의 정적은 북아프리카 가톨릭교회였지 세계교회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티스트들이 세계교회로부터 스스로 분리되어 자신들만이 구원의 담보자라고 주장한 것처럼 확대 해석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보편적 교회도 사실은 상징적, 추상적 개념이었지 실제로는 로마교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 기독교는 아직 신학적으로나 제도적으로 통일성을 갖춘 명실상부한 기독교왕국(Christendom)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도나티스트 교회와 마찬가지로 동방교회는 로마 주교의 지상권(primacy)을 인정하지 않았고, 당시 기독교는 삼위일체 논쟁, 기독론 논쟁 등 다양한 형태의 교리적 분쟁들로 보편적 통일성을 주장하기에는 때 이른 측면이 없지 않았다. 따라서 도나티스트 논쟁은 북아프리카 토착교회 대 보편적 교회의 분쟁이라기보다는 북아프리카 기독교 전통과 로마교회 전통과의 갈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실체적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 교회 일치 노력은 양측간 지속되어왔음

아우구스티누스는 끊임없이 도나티스트들의 분파적 행위를 비판하였지만, 그들 역시 교회일치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과연 교회일치가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에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해한 교회일치는 로마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앞세운 다분히 일방적인 중앙집권적 일치였다. 이러한 방식의 일치는 이미 키프리아누스와 스테펜(Stephen) 사이의 갈등을 유발한 바 있었다.

 

3세기 중반 이후로 이미 로마교회와 필적할 만큼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북아프리카 교회로서는 로마교회를 중심한 중앙집권적 일치보다는 오히려 지역적 자율권을 담보한 동방교회 식의 수평적, 혹은 평등주의적 교회일치를 선호하였다. 특히 로마제국의 정치적 압제에 시달려 왔던 북아프리카 토착민들은 황제와 결탁한 로마교회의 개입을 종교적 제국주의의 한 형태로 간주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티스트들을 보편적 교회로부터 분리된 분파주의자들로 규정했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북아프리카 가톨릭들이야말로 배교자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지역 전통까지 저버린 반항자들이었다.

 

*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성은 양측간 선명한 차이를 보여

한편, 교회와 국가 문제는 두 라이벌 공동체들 간에 가장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주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을 새 시대의 여명으로 간주한 가톨릭들과, 황제가 개종하였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한 도나티스트들의 세계관과 국가관은 결코 합치될 수 없는 평행선 같은 문제였다. 프렌드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도나티스트 논쟁의 진정한 본질임을 강조하였는데, 이 논문 역시 그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황제의 개종에도 불구하고 도나티스트교회는 여전히 국가권력으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그 구성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던 기층 민중의 입장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현실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로마정부뿐만 아니라 대지주를 비롯한 사회의 기득권층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로마적 현상(status quo)을 떠받드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게다가 가톨릭교회는 엄청난 재산을 보유함으로써 토착민들의 질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회적 시스템을 신성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예를 들어,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 그리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처럼 오직 복종만이 요구될 뿐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인은 노예를 자기 마음대로 구타하거나, 맷돌에 묶거나, 감옥에 넣을 수 있지만, 노예가 자신의 조건을 보다 나은 상태로 바꾸려는 것은 사도적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보았다.28) 같은 맥락에서, 경제적 고통으로 인한 민중들의 봉기는 신앙의 이름으로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문제였다.

 

* 3 세기 후반의 위기

3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로마제국의 전반적인 경제 침체는 4세기에 들어서자 더욱 위기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는 아프리카도 예외가 아니었다. 4세기 중후반을 휩쓴 키르쿰 셀리온 운동과 잦은 농민봉기들, 그리고 피르무스(Firmus)와 길도의 반란 등은 당시의 경제적 피폐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들이었다. 북아프리카 가톨릭 지도자들은 일반적으로 기층 민중들이 당하는 경제적인 고통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고, 키르쿰셀리온들의 활동만 없으면 모든 것이 평화롭고 번영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실제로 북아프리카 가톨릭교회는 기존의 사회적 억압과 경제적 비참함을 개선하고자 하는 그 어떤 진지한 움직임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래서 호노리우스 치하 때 지방민들을 위해 세금을 감면해 달라고 탄원을 낸 쪽은 그렇게 많은 시간을 법정에서 보낸 가톨릭 주교들이 아니라 바로 이방인들이 주를 이룬 지방의회였다.30) 원로원들과 제국 관료들에 의해 초래된 지방민들의 고통에 대하여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일체 언급을 회피하든지, 아니면 입을 연다 할지라도 그들의 말은 침묵하는 것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의 전기를 집필한 포시디우스(Possidius)교회가 그 소유한 땅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도나티스트 지도자들은 달랐다. 그들 역시 가톨릭 교회 만큼은 아니었겠지만 어느 정도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고, 존스가 지적한 대로 재산의 공유, 노예해방, 혹은 빚의 탕감 같은 혁명적 조치를 취한 것도 아니었다. 또한 파르메니아누스, 티코니우스(Tyconius), 페틸리아누스 같은 세련되고 로마화된 계층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직자나 평신도 할 것 없이 복음주의적 가난의 실천을 강조하면서 대중들의 삶의 현실에 깊이 다가서 있었다. 키르쿰셀리온에 비판적이었던 힙포(Hippo)의 마크로비우스(Macrobius) 주교는 411년 이후에 스스로 키르쿰셀리온의 지도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가톨릭교회로의 개종을 통해 얼마든지 개인적인 안일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았겠지만 일부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박해 받는 토착교회의 지도자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로마정부와 결탁한 가톨릭교회의 신학과 정책에 정면으로 저항함으로써 불의와 모순으로 가득 찬 사회 질서를 부정하고 순교자 전통의 계승자로서 고난과 박해의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 아우구스티누스 적극적으로 정치 환경을 이용해 사회 문제에 접근함으로 교회의 무기력함 제공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일치를 위해 로마정부의 종교적 탄압을 합리화하고 이를 적극 활용하였다. 대신에 그의 신학은 로마적 현상을 유지시키는 정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제공하였다. 굳이 로마정부와의 결탁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을 총괄하고 있던 북아프리카의 신학적 함의(connotation)도나티스트 논쟁이라는 순수 신학적 영역에 너무 좁게 적용함으로써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삶의 현실로부터 분리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서방기독교는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데는 언제나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으며, 시대 시대마다 예언자적 운동의 도전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늘날 서구 기독교사에 대한 제3세계 신학자들의 비판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인간의 총체적 삶으로부터 분리된 신학은 추상적이고 피안 지향적인 성향을 갖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성(De Civitate Dei)에 나타난 역사인식과 종말론 사상도 다분히 추상적이다. 그는 종말론적 신의 도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을 생략한 채, ‘언젠가이루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미래를 지칭하였다. 게다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그의 입장은 대단히 부정적이어서 그의 신학적 체계 속에 사회적 모순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개혁적 책임이나 교회의 역할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을 뿐이다.

 

* 아우그스투스는 기독교의 회의론적 종말론을 제시

이런 형태의 회의적종말론은 현실의 삶과 유리된 피안적 종말론일 뿐이다. 프렌드가 지적한 것처럼, 두 도시, 두 왕국 개념은 티코니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한 북아프리카 기독교의 전형적 특징이었다. 그러나 초기 북아프리카 기독교의 종말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종말론과는 내용상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티코니우스를 예로 들면, 그의 종말론은 모든 초점이 막연한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에!’(hear and now!) 있었다. 때문에 종말론 사상에 입각한 그의 글은 듣는 이로 하여금 언제나 현재적 결단과 회개를 촉구하였다. ‘종말론 사상의 현재성은 종말의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의 경우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에게 종말론적 각성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부정하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동인(動因)이었다.

 

* 도나티스트의 종말론은 대안 공동체로서의 적극성을 보여

북아프리카 종말론은 기독교인들을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미 펼쳐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대안 공동체로 잡아끄는 동력이었다. 때문에 세례를 통해 중생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기독교인들은 마땅히 하나님 나라의 윤리관에 따라 살아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노예들을 형제라 부르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며, 순교의 위협 속에서도 기꺼이 생명을 내던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공동체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편안한 도시를 떠나 사막으로 고행의 길을 떠나는 것도 부정적 의미의 현실 부정이나 현실 도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대안 공동체적 삶을 위한 새로운 긍정을 위한 부정이었다.

 

초기 북아프리카 기독교에 대한 연구를 통해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깊이 고민해야 될 문제가 바로 이런 세계관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지난 수 세기 동안 과학과 기술의 혁명으로 현대사회의 지배적 세계관은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시공의 세계를 실체(reality)로 여기는 일차원적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이런 세속적 세계관의 영향으로 인해 오늘날 한국교회도 온통 눈에 보이는 성공과 번영을 추구하는 일차원적 종교가 되어버리지 않았나 염려스럽다. 이에 반해 초기기독교인들은 물질과 영의 이중적 세계관 속에 살면서 후자를 보다 궁극적인 실체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그들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대안 공동체를 이루며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았고, 순교의 제물이 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했던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런 외침의 소리를 듣는다. 이는 초기기독교의 순교자들이나 사막의 수도사들처럼 세상을 적대시하고 등지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과 동화되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대망했던 그들의 신앙의 얼을 되찾자는 얘기일 것이다.

 

*초대교회로의 신앙 복원시도는 비극

그러나 초대교회, 나아가 초기기독교의 신앙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한편으로는 기독교사의 비극이다. 초대에서 중세, 중세에서 종교개혁 시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교회는 역사적 단절을 경험하였다. 때문에 오늘의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는 교회사적 전통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특히 초기기독교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사에 미친 아우구스티누스의 빛나는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가슴 한편에 남는 진한 아쉬움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에큐메니칼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에서 북아프리카 교회 분열은 가장 가슴 아픈 사건들 가운데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7세기 이슬람교로 집단적 개종을 단행한 도나티스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에큐메니칼 정신의 의미와 중요성을 되새겨보게 된다. 초기 북아프리카 기독교 역사는 나만이 옳다고 하는 독선의 결과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현준 l 박사는 전남대 역사학과, 한신대 대학원(M. Div.), 미국 보스턴대학교(S.T.M.)을 졸업하고, 버클리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박사과정(Ph. D.)을 수료했으며, 서울기독대학교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현재 새순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편집자 주 : 이 논문은 대한기독교서회가 창립 12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공모한 대한기독교서회 학술상에서 우수상을 수여한 이현준 박사의 논문 초기 북아프리카 교회론 연구 - 도나티스트 논쟁에 대한 역사적 재해석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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