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리탄과 에드워즈의 모형론적 해석과 한국교회 정성욱 교수

無益박병은목사 | 2014.11.07 23:56 | 조회 13842

퓨리턴과 에드워즈의 모형론적 해석과 한국 교회
(A Typological Hermeneutics of the Puritans and Edwards, and the Korean Church)
정성욱 교수(미국 덴버신학교) (Prof. Sung Wook Chung)


1. 들어가는 말


본 논문의 목적은 청교도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모형론적 성경해석 (typ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Bible)을 고찰하고 그 해석학이 현재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에 던져주는 시사점과 적용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선 필자는 모형론적 성경해석이 무엇인지를 천착하고, 초대교회 이후 청교도 시대와 조나단 에드워즈까지의 모형론적 성경해석의 역사를 탐구할 것이다. 그 후 앞으로 모형론적 성경 해석이 한국교회에서 회복되고 정착되는 것과 관련하여 몇가지 중요한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2. 모형론적 성경해석이란 무엇인가?

1) 상징적 성경 해석
우선적으로 기억할 것은 모형론적 성경해석이란 성경에 대한 상징적 해석이라는 상위 범주에 종속된 하위 범주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상징적 성경해석의 본질을 먼저 다룬 후 상징적 성경해석과의 관련 속에서 모형론적 성경해석을 다루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여진다.


상징적 성경해석이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좁은 의미에서의 상징적 성경해석이다.

그것은 상징적 언어를 사용한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방법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3:1)고 노래했다. 여기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여호와가 짐승인 양을 치는 인간 목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비유적인 혹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여호와께서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같은 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비유적인, 상징적인, 시적인 표현이다. 이렇게 비유적인, 상징적인, 시적인 언어와 표현을 사용한 성경본문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할 때에는 심각한 혼란과 오류를 초래할 수 밖에 없다. 여호와는 문자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목자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목자이기 때문이며, 우리 역시도 문자적인 의미에서 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상징적 표현법에는 직유, 은유, 제유, 비유, 유비 등이 포함된다. 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상징적 언어와 표현을 해석하는 방법이 바로 좁은 의미에서의 상징적 성경 해석을 의미한다.


둘째, 넓은 의미에서의 상징적 성경해석이 있다.

 

그것은 성경 본문을 일단 문자적/문법적/역사적(literal/grammatical/historical)인 방법으로 해석한 후 그 성경 본문이 가지고 있는 보다 충만한 의미’ (sensus plenior)196)를 밝히는 해석법이다. 여기서 보다 충만한 의미영적 의미’(spiritual sense), ‘상징적 의미’ (symbolic sense) 혹은 신학적 의미’ (theological sense)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상징적 성경해석의 전제는 성경 본문이 원래의 기록자가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본래적 혹은 문법적, 역사적 의미를 넘
어서, 성경의 원저자이신 하나님께서 담아 놓으신 보다 깊고, 풍성하고, 충만하고, 숨어 있는,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성경 해석법이다. 그래서 성경본문에 대한 상징적 해석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어떤 성경본문이 단일한 의미(single sense)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중적 (double
senses) 혹은 다중적 의미 (multiple senses)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2) 모형론적 성경해석
ensus Plenior를 지지하는 저술에는 Raymond E. Brown, The ‘Sensus Plenior’ of Sacrid Scripture (Baltimore: St. Mary’s University, 1955); Douglas J. Moo, “The Problem of Sensus Plenior” in Hermeneutics, Authority, Canon, ed. D. A. Carson and J. D.
Woodbridge (Grand Rapids: Zondervan, 1986), 177-211; William Sanford LaSor, “Prophecy, Inspiration, and Sensus Plenior” Tyndale Bulletin 29 (1978), 49-60; Douglas A. Oss, “Canon as Context: The Function of Sensus Plenior in Evangelical Hermeneutics” Grace Theological Journal 09:1 (Spring 1988) 등이 있다.

상징적 성경해석과 관련해서 오랜 교회 역사 동안 기독 교회 내에서 큰 영향을 미친 해석법이 바로 모형론과 예표론(typology)이다. 모형론과 예표론이란 구약성경에 기록된 사람, 사물 (동물, 식물 포함), 사건, 제도들이 그 당시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 속에서 문자적인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모형과 예표로서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상징하는 이중적 혹은 다중적 의미를 갖는 다고 보는 성경해석법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구약의 사람, 사물, 사건, 제도들을 모형 (type), 예표(prefigurement), 그림자 (shadow)라고 부르고, 신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원형 (antitype), 실체 (substance), (body)이라고 부르는 해석법이다.

여기서 기억해야할 것은 신약성경 자체가 모형론과 예표론을 사용해서 구약성경을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히브리서이다. 히브리서 10장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는니라” (10:1)고 증거한다.


이 말은 구약의 율법은 그림자, 모형, 예표일 뿐이며 그것의 원형, 참형상,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대속사역임을 의미한다. 신약성경 자체가 구약에 대한 모형론적/예표론적 해석을 실행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 해석은 구약성경에 대한 정당한 해석방법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지적하고 넘어가야할 것은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이 상징적 성경해석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상징적 성경해석은 모형론과 예표론을 중요한 일부분으로 포함하되 그것을 넘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기본적인 통찰에 기초해서 다음 절에서는 교회 역사상 상징적 성경해석법과 모형론적 성경해석법이 어떻게 발흥하고 전개되고 발전되어 왔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3. 상징적 성경해석과 모형론의 역사

1) 예수님과 사도
(1) 상징적 성경해석
우선 논자가 먼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하셨고, 상징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셨다는 것이다.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대표적인 실례가 요한복음 2장에 나타난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19)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성전이란 예루살렘에 물리적으로 건축된 성전이 아니라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사도 요한은 해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신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 (8:12) “양의 문” (10:7) “선한 목자” (10:11) “참 포도나무” (15:1) 등의 상징적 표현을 사용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계시하셨다.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한 성경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은 문자적/문법적/역사적 해석을 넘어서 상징적인 해석 방법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이 문자적인 의미에서 밀가루나 쌀로 만든 떡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영적인 양식을 주시는 분이며,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다양한 비유를 사용하시고. 그 비유을 풀어주시는 상징적 해석작업을 친히 수행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좁은의미에서의 상징적인 성경해석의 기초를 놓으셨다.


(2) 모형론적 성경해석
예수님은 또한 넓은 의미에서의 상징적 성경해석을 수행하셨다. 즉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을 실행하셨다. 대표적인 실례가 요한복음 314절에서 모세가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민수기에 기록된 대로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사건이 그 시대의 문자적/역사적 의미를 넘어 장차 죄인의 대속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한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유대인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 자신을 비교하셨다. 광야의 만나는 참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예표요, 그림자였
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모형론적 성경해석의 본질과 방법을 요약해 주는 구절이 바로 요한복음 539절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역사와 율법과 시와 잠언과 예언 등 다양한 장르의 본문을 포함하고 있지만, 결국 모든 구약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증언임을 확언하신 것이다. 동시에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 문자적/문법적/역사적 해석을 넘어서, 영적/신학적/상징적/예표론적/모형론적/기독론적 해석으로 나아가야 함을 확증하신 것이다.


신약계시를 기록한 사도들 역시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을 따랐다. 대표적인 것이 사도바울의 예표론적/모형론적인 구약 해석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그들이 단체적으로 세례를 받은 사건으로 해석하고, 광야에서 물을 낸 반석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과 예표로 해석함으로써 구약성경에 대한 상징주의적, 예표론적 해석을 수행했다.

사도 바울만이 아니라 사도 요한, 사도 베드로, 사도 마태 그 외의 다양한 신약성경의 기자들 역시 모형론적/예표론적인 관점에서 구약성경을 해석하고 그 해석 내용을 신약계시 기록에 포함시켰다.

 

따라서 우리는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이 성경본문 자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정당한 성경해
석방법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2) 교부시대

(1)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
마지막 사도였던 요한이 죽은 시점이었던 주후 100년경 부터 어거스틴의 사역이 마무리되는 시점인 주후 430년까지의 기간을 학자들은 대체로 교부시대 (patristic period)라고 칭한다. 이 기간 동안 수많은 교부들이 등장해서 상징적인 성경해석의 신약적 전통을 계승했다.(/ 교부시대의 성경해석에 대해서는 Rowan A. Greer, The Captain of Our Salvation: A Study of the Patristic Exegesis of Hebrews (Tubingen: Mohr, 1973), John J. O’Keefe & R. R. Reno, Sanctified Vision: An Introduction to Early Christian Interpretation of the Bible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5) 그리고 Manlio Simonetti, Biblical Interpretation in the Early Church: A Historical Introduction to Patristic Exegesis (Edinburgh: T & T Clark, 1994) 등을 참조하라.)

 

우선 먼저 이해되어야 할 것은 교부시대 성경해석학은 크게 두 전통으로 나눠진다는 것이다. 첫째는 소아시아의 안디옥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안디옥 학파로서 성경 본문에 대한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더 강조하였다. 둘째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알렉산드리아 학파로서 성
경본문에 대한 풍유적 (allegorical) 해석을 더 강조하였다.

(2) 크리소스톰
안디옥 학파의 대표적인 신학자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크리소스톰 (349-407)이다. 크리소스톰은 황금의 입을 가진 사람이라는 칭송을 들을 만큼, 그 당시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주창해온 풍유적 (allegorical) 해석을 거부하고, 성경본문의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강조하였다. 그러면서도 성경해석에 있어서 상징의 중요성을 거부하지 않고, 신약기자들이 활용했던 예표론적, 모형론적 성경해석학을 더 세련되게 다듬음으로써 상징적 성경해석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3) 오리겐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표적인 신학자는 오리겐(185-254)이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고대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필로 (Philo)의 알레고리적 (allegorical), 철학적, 풍유적 해석방법을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성경 본문의 문법적, 역사적 의미를 약화시키고, 영적, 풍유적 의미를 강조
하였다. 그는 살전 5:23절에 기초해서 인간의 구성요소를 영, , 육의 삼분설로 파악했고, 몸은 성경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혼은 도덕적 의미를, 영은 풍유적, 알레고리적 의미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오리겐의 풍유적 해석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그는 풍유적 해석을 통해서 성경의 영적, 상징적 의미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다가, 이단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 그는 삼위일체론과 관련해서 종속론의 이단을 주창했고, 구원론과 관계해서 만유구원 또는
만유회복론의 이단을 주창하였다.


(4)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통합하여 교부신학을 완성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전적타락, 오직 믿음과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 등 바른 구원론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철학적, 알레고리적, 풍유적 해석학의 영향을 받은 티코니우스 (Tychonius)의 성경해석법을 변용시키면서 자신의 해석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좀더 풍유적인, 알레고리칼한 해석을 중용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 결과 요한계시록 20장이 증거하는 천년왕국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교회시대와 동일시하는 무천년주의를 확립하였다.

 

어거스틴의 저술을 검토해보면 성경적인 상징주의 또는 모형론적, 예표론적 해석을 고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의 해석에는 오리겐적인 풍유적, 알레고리적 오류 역시 발견되고 있다. 이 점은 부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3) 중세시대
중세 시대의 성경해석학은 어거스틴이 전달해준 풍유적 해석을 4중적 해석법 (quadriga)으로 확대해간 역사였다. 중세신학자들은 어떤 한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 1. 문자적/문법적/역사적 의미, 2. 도덕적 의미 (tropological or moral sense), 3. 풍유적 의미 (allegorical sense), 4. 신비적/천상적의미 (anagogical/heavenly sense)를 추구했다.

 

도덕적 의미란 신앙인의 윤리적 행동에 대한 교훈과 연결되고, 풍유적 의미란 구약 본문의 예표론적/모형론적 의미와 연결되며, 영적/신비적/천상적 의미란 그 본문의 영원적/천상적 의미와 관련되었다.


중세신학자들이 4중적 해석법을 통해서 교부들의 예표론적, 상징주의적 해석을 계승한 측면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상징주의적, 풍유적 해석이 성경적이고 정통적인 교리에 의해서 통제되지 않고 무질서하고 자의적인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성경 본문의 참된 의미를 왜곡시켰고, 복음의 명료성을 약화시켰으며, 동시에 비정통적인 교리들을 산출한 부분은 비판되어야 한다. 중세시대의 성경해석학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서에는 제임스 프루스 (James Samuel Preus)가 저술한 [그림자에서 약속까지] ( From Shadow to Promise: Old Testament Interpretation from Augustine to Young Luther)198)와 앙리 드 루박 (Henri de Lubac)의 대표적인 저서 [성경의 사중적 의미] (The Four Senses of Scripture, vol. 1 of Medieval Exegesis)199) 가 있다.


4) 종교개혁시대
중세시대의 4중적 해석이 성경본문의 참된 의미를 왜곡 시켰고, 복음의 명료성을 약화시켰고, 비정통적인 교리들을 산출한 사실에 대한 반작용으로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은 문자적/문법적/역사적 해석을 재강조하게 되었다. 문법적/역사적 해석의 재강조를 통해서 종교개혁자들은 정통적인 인간론과 구원론을 바르게 확립했다. 이 부분은 종교 개혁자들의 탁월한 공헌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 예표론적/모형론적 성경해석을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루터와 칼빈 공히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라는 점을 강조했고, 구약 성경의 모형론적/예표론적 해석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종교개혁시대의 성경해석학에 대하여는 William Yarchin, History of Biblical Interpretation (Peabody, Mass.: Hendrickson, 2004), 171-94 를 참조하라.)

 

물론 루터와 칼빈이 모형론적 극대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와 칼빈이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것은 후대의 청교도 신학자들이 모형론적/예표론 적 성경해석을 더 적극적으로 추구하도록 이끌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5) 청교도시대
루터와 칼빈과 같은 1세대 개혁자들이 세상을 떠난 후 영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청교도 운동은 성경에 대한 모형론적/예표론적 해석을 더 적극적으로 강조하게 된다.(/ 뉴잉글랜드 청교도 신학자들의 예표론적/모형론적 해석에 대해서는 Mason Ira Loawance Jr. , Images and Shadows of Divine Things: Puritan Typology in New England from 1660-1750 (Atlanta: microform, 1967) 청교도 시대의 모형론적/예표론적 해석학을 견인한 대표적인 신학자들 중에 윌리엄 길드 (William Guild,1586-1657), 존 윔스(John Weems, 1579-1636), 토머스 테일러 (Thomas Taylor, 1576-1632), 사무엘 메더 (Samuel Mather, 1626-1671), 존 오웬 (John Owen, 1616-1683), 벤자민 키치 (Benjamin Keach, 1640-1704)) 그리고 뉴잉글랜드가 낳은 최대의 청교도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Edwards, 1703-1758)가 있다.)


(1) 윌리엄 길드 (1586-1657)
윌리엄 길드(William Guild)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목회자, 학자, 신학적 저술가였다. 그의 대표작 [모세의 수건을 벗김] (Moses Vnuailed: or Those Figures PointingOut the Messiah Christ Iesus, briefly explained ,1620)에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인물, 사건, 사물, 제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와 모형으로 해석하는 모형론적/예표론적 해석학을 개진했다.

(2) 존 윔스 (1579-1636)
존 윔스 (John Weemes)는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University of St. Andrews) 출신의 스코틀랜드 국교회 목회자로서 히브리어와 구약 분야의 학자이자 성경 주석가로 활동했다. 그는 자신의 주저 [기독교 회당](The Christian Synagogue ,1620)에서 모형론적, 예표론적 관점에서 구약성
경을 해석했다.

(3) 토머스 테일러 (1576-1632)
토머스 테일러 (Thomas Taylor)는 잉글랜드 출신의 청교도로서 캠브리지 대학과 옥스퍼드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했다. 그는 그의 대표작 [계시된 그리스도] (Christ Revealed: Or the Old Testament Explained, 1635)에서 모형론적, 예표론적, 기독론적 성경 해석학을 제시했다.
(4) 사무엘 메더 (1626-1671)
뉴잉글랜드 지역의 청교도였던 사무엘 메더 (Samuel Mather, 1626-1671)는 자신의 주저 [구약성경의 상징과 예표](The Figures or Types of the Old Testament, Dublin, 1683)[구약의 복음] (The Gospel of the Old Testament, 1705)에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들과 상징들에 대해서 논의했다.

(5) 존 오웬 (1616-1683)
청교도의 황태자로 불리는 존 오웬 역시 구약에 대한 모형론적 해석을 수행했다.(/ Henry M. Knapp, “Understanding the Mind of God: John Owen and Seventeenth-Century Exegetical Methodology” ( Ph. D. dissertation, Calvin Theological Seminary, 2002); Kelly M. Kapic, “Typology, the Messiah, and John Owen’s Thelogical Reading of Hebrews,” in Christology and Hermeneutics: Hebrews as an Interdisciplinary Case Study (ed. Dan Treier and Jon Laansma, T&T Clark/Continuum, 2012), 136-155.)

 

존 오웬 (John Owen) 역시 그의 주저인 [하나님과의 교통] (Of Communion with God, Oxford, 1657)에서 모형론적, 예표론적 성경해석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6) 벤자민 키치 (1640-1704)
청교도시대의 상징주의적 성경해석학을 집대성한 사람은 벤자민 키치 (Benjamin Keach)였다. 벤자민 키치는 그의 주저 [성경의 모형과 비유 설교] (Preaching from the Types and Metaphors of the Bible)를 통해서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 해석학을 깊이 있게 발전시켰다.


(7) 조나단 에드워즈 (1703-1758)
최후의 청교도이자 최대의 청교도 신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 역시 모형론적, 예표론적, 상징적 성경해석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의 대표작 [구속사] (The History of Redemption)를 통해서 자신의 해석학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동시에 예일대 출판부에서 출간되고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11[모형론적 저작] (Typological Writings)(/Jonathan Edwards, Typological Writings, vol. 11 i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93). 203.)

을 통해서 모형론을 혁신적으로 확장시켰으며, 모형론을 성경해석을 넘어 역사와 자연의 영역에 적용시켰다. 에드워즈는 구약이 신약의 모형인 것처럼, 자연세계는 영적세계의 모형이라고 주장했다. 에드워즈의 [모형론적 저작]신적인 것들에 대한 이미지와 상징들”(Images of Divine Things), “모형노트” (Types Notebook), 그리고 메시아의 모형들” (Types of the Messiah)이란 소 논문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모형론적 해석방법을 잘 보여주는 실례를 그의 로마서 5장 주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에드워즈의 주장을 인용해 보자.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이 말의 뜻은 타락 이전에 있었던 일들이 그리스도의 구속과 관련된 일들의 모형이라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인간의 창조는 그리스도의 구속과 같고, 생명나무는 그리스도의 모형이기 때문이다기독교 모형론의 이론과 용어는 성경 본문들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사용될 때 최초의 교회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모형론적인 해석 개념은 부분적으로 구약성격에 언급된 특정 인물, 제도, 사건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비유, 예표 또는 예시로 간주하는 신약본문들에서 기원한다. 예를 들어 로마서 5;14에서 사도 바울은 아담이 오실 자곧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고 진술한다. 이 본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성경을 신약성경에 비추어 해석하는 방법을 제공해 주었다. 유대 역사에 속한 것으로 앞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사건들은 유대 민족의 실제적, 역사적 현실을 넘어 선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 사건들을 앞으로 일어날 일 곧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자신을 충분히 계시하신 것의 예언적 표상으로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Jonathan Edwards, The Power of God: A Jonathan Edwards Commentary on the Book of Romans, edited & compiled by David S. Lovi & Benjamin Westerhoff, 김귀탁 역 (서울: 복있는 사람, 2014), 166.

위에서 인용된 에드워즈의 주장에 따르면 1. 에드워즈가 모형론적인 성경해석을 적극적으로 승인했고, 2. 에드워즈는 모형론이 구약성경을 신약성경에 비추어 해석하는 방법임을 인정했고, 3. 구약의 사건들이 구약의 실제적 역사절 현실을 넘어선 보다 더 충만한 의미” (sensus plenior)를 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음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주장을 좀 더 인용해 보자.
창조되었을 때 또는 지음받은 상태에서 아담은 주목할 만한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아담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아담은 흙으로 지음받은 첫 삶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첫 사람이셨다. 곧 무덤 또는 흙에서 처음으로 부활하신 분이었다. 또 그리스도는 사람의 죄의 열매들인 비천하고 낮은 상황, 연약함, 치욕과 비참에서 일으킴을 받은 첫 사람이었다. 아담은 모든 인간 가운데 처음으로 지음 받은 존재였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모든 피조물 가운데 처음으로 나신 분이었다. 아담이 깊이 잠들었을 때 그의 가슴에서, 그의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 취해져 여자가 만들어졌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그 분의 죽음의 깊은 잠에 계셨을 때, 말하자면 그 분의 초월적인 사랑에서 교회가 만들어졌다. 아담은 모든 인간의 자연적 조상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새 창조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의 영적 조상이시다. 아담은 자기의 모든 후손의 연합적 머리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자신의 모든 후손의 연합적 머리가 되신다.”(/ Ibid., 167.)

에드워즈에 의하면 모형인 아담과 원형과 실체인 그리스도 사이에는 여러 가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아담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모형론적인 해석을 진행한 후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상으로 보아 다음 네 가지 사실이 예표 관계에 있다. 첫째, 아담의 대형이신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그 분의 인격의 명백한 형상. 둘째, 신적 인간이 되시기 위하여 신성과 연합하게 되는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셋째, 신인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신 그리스도. 이것은 세상을 통치하고 심판하시는 대리인으로서 성부 하나님의 인격을 대표한다. 넷째,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연합의 획기적인 진전. 이것을 통해 사람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아름다움, 생명, 존귀, 기쁨 속에 참여하고, 따라서 그분의 영과의 친교를 통해 신들이 됨으로써 신성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Ibid., 168.)


논자가 보기에 에드워즈의 모형론은 성경이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모형론적 해석을 뛰어넘는 다는 면에서 모형론적 극대주의를 향하고 있다.

4.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의 유익
그렇다면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의 유익은 무엇인가? 모형론적/예표론적 해석학이 한국교회내에서 회복되고 정착 되어야할 당위성은 무엇인가?

1) 성경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유익은 모형론적/예표론적 해석학이 전체 성경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재발견하게 해 준다는 데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많은 강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에 대한 설교는 점점 사라져 버리고, 무시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간의 처세술, 성공학, 자기개발원리, 긍정적 사고방식, 기복주의, 번영주의, 율법주의가 수많은 강단을 지배하고 있다. 모든 성경이 곧 자신에 대한 증거요 증언이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은 성경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단의 중심에 회복시킬 수 있는 최선의 길 중 하나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특별히 구약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할 때 오늘날 수많은 목회자들은 구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구약을 여자적으로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주의적 설교나 기복주의적 설교 또는 윤리적 모범을 제시하는 설교에 머물러 있다. 율법주의나 기복주의는 저주를 받아 마땅한 다른 복음 (1:6-10) 이다. 이 사실을 고려할 때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은 한국교회 내에서 시급하게 회복되어야 한다. 한국교회 내에서의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은 한국교회를 다른 복음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책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126-28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복 주신 사건은 인간 창조와 하나님 형상론과 같은 인죄론적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은 성경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 즉 기독론적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126-28의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자 예표이다. 아담이 옛 인류의 대표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새인류의 대표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자체이시다. 아담에게 주어진 자손 번창, 땅 정복, 만물 통치의 복 (1:28)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라는 위임이었다. 이 복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아담이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선언한다. 첫 인류의 대표로서 아담의 실패는 둘째 인류의 대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공과 대조된다.

 

고린도전서 15 장에서 바울은 아담은 산영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증거한다. 결국 모형론적, 예표론적 성경해석은 구약의 모든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해 주며, 그 안에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해 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구약에 대한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을 수건이 벗겨지는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3-18)

바울에 의하면 구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지 못하는 것은 바로 수건이 그 마음을 덮은 해석, 완고한 해석이다. 그러나 구약을 읽고 해석할 때 주께로 즉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겨지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게 된다. 성경이 주어진 목적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면 (딤후 3:17), 구약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즉 모형론적, 예표론적 관점에서 읽고 해석되어야 한다.


2) 구약에 대한 복음적 해석
오늘날 한국교회를 짓누르고 있는 다른 복음인 율법주의와 기복주의는 구약성경에 대한 복음적 해석의 결핍에 기인한다. 일반 성도들 뿐 아니라 수많은 목회자들도 구약은 율법, 신약은 복음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를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생각의 저변에는 구약에는 복음도, 은혜도 없고 오직 율법과 정죄만이 있는데, 신약에 와서야 복음과 은혜를 발견할 수 있다는 편견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복음을 설교하고 싶어하는 일부 뜻있는 목회자들도 구약에 대해서 좀처럼 설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도 신약은 복음이지만 구약은 율법이라는 도식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설교하겠다는 그들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구약에 대한 복음적 설교를 향해서는 한 발자욱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구약을 모형론적으로 예표론적으로 해석할 때 우리는 구약에 계시되고 있는 복음을 참되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결혼 사건은 결혼이라는 제도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제도라는 역사적, 윤리적 교훈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니다. 그 정도의 해석에서 멈추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복음적 해석이 아니다. 창세기 2장의 아담과 하와의 결혼 사건은 모형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 때에야 그 본문은 복음적으로 더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예표다. 아담의 신부요 아내인 하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요 아내로 부름받은 교회의 모형이요 예표다. 아담이 하와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부른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자기의 이라고 부르실 것에 대한 그림자요 모형이요 예표이기 때문이다. 즉 복음적인 사건에 대한 모형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라는 말씀 역시 그냥 결혼의 연합과 서약에 대한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멈추어서는 안된다. 더 심오한 복음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617절이 말씀하는 바와 같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아담과 하와가 결혼을 통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 사건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영적인 연합을 통하여 한 영이 될 것 즉 심오한 복음적 사건에 대한 모형과 예표로 해석되어야 한다. 에베소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5:31-33)고 증거한다. 아내가 남편의 몸인 것처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구약의 초두로 거슬러 올라가 아담과 하와의 결혼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 연합에 대한 그림자요, 모형이요, 예표였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조직신학 구원론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론이 가지는 중대한 신학적 의미를 조금이라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창세기 2장의 아담과 하와의 결혼 사건이 얼마나 심오한 복음적 의미를 담고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에 대한 모형론적 해석이 구약에 가득 차 있는 복음을 재발견하게 해 줄 수 있는 놀라운 길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또한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계시된 이스라엘의 제사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건과 복음의 그림자요 모형이었다. 이점에 대해서 자세히 증거하는 책이 바로 히브리서이다. 제사제도를 구성하는 세 요소는 성전과 제사장과 제물이다. 구약의 제단, 성막, 성전은 참 성전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구약의 모든 짐승제물들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참된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요 모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가지고 계신 메시아의 삼중직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구약의 왕, 제사장, 선지자들은 모두 에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예표이다. 특별히 구약의 다윗 왕은 다윗의 뿌리이자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예표이다. 제사장 아론과 여러 다른 제사장들 그리고 레위지파에 속한 자들은 참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모두 참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도,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사사들도, 왕들도,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 모든 선지자들도 장차 오실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요 모형이었다.

구약 전체는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사도 따지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 사건의 예표요 모형이었다. 이스라엘의 고난과 영광은 바로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예표요 모형이었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은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24:25-27). 단 한마디로 말해서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과 예표로 가득 차 있다.

5.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의 회복을 위한 과제

한국 교회와 신학계는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을 회복하고 부흥시키며 더 정교하고 세련되게 발전시켜야 하는 시대적 요구에 직면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과제들을 확인하고, 이 과제들을 해결하는 바른 길을 모색해야 한다.

1) 문법적/역사적 해석의 바른 역할 확인(Confirmation of the Appropriate Role of Grammatical/Historical Interpretation)

16세기 종교개혁, 17세기 청교도 운동을 통해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을 회복한 개혁신학계와 복음주의 신학계는 18 세기 계몽주의 운동과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비평적 해석학의 도전으로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20세기에 들어와서 서구 복음주의 신학계에서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이 회복되고 부흥됨으로 새로운 흐름을 형성해 가고 있다.(/G. P. Hugenberger, “Introductory Notes on Typology, “ in G. K. Beale, ed., The Right Doctrine from the Wrong Texts? (Grand Rapids, MI.: Baker, 1994), 331-41.)

 

하지만 아직까지도 한국교회와 신학계에서는 문법적/역사적 성경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에 대한 의심과 우려가 불식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선적으로 극복되어야할 과제는 문법적/역사적 성경해석의 바른 자리와 역할에 대한 확인이다. 많은 사람들은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을 주창하는 자들이 문법적/역사적 성경해석을 무시함으로써 성경 본문의 바른 의미를 왜곡시킨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단순한 오해요 기우일 뿐이다.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이 정당하고 바르게 이뤄지기 위해서는 문법적/역사적 해석의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하며, 또 그 해석과정이 정당해야한다. 정당하고 바른 문법적/역사적 해석이 무시된 채, 모형론적/예표론적 해석만 배타적으로 수행될 경우 그야말로 자의적이고, 무질서하고, 무책임한 왜곡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이 사실이 한국 교회와 복음주의권에서 면밀하고 철저하게 논구되고, 합의되고, 확립되어야 한다.

또한 문법적/역사적 성경해석만을 통해서도 기독교의 정통 교리의 체계가 확립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정통 교리 체계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문법적/역사적 성경해석이라는 것이다.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은 문법적/역사적 해석에 의해서 확립된 기독교 정통 교리에 근거해서 영적으로 더 풍요롭고 충만한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이다. 정당하고 건강한 문법적/역사적 해석이 무시된 채 모형론적/예표론적 해석만으로 기독교의 정통교리가 확립될 수는 없다. 도리어 자의적이고, 무질서한 해석에 의해서 이단적인 교리만 산출될 수밖에 없다.


2)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의 필요성과 유익성(Necessity and Benefits of Typological Interpretation)

그러면서도 문법적/역사적 성경해석은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의 준비과정으로서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사실또한 면밀하고 철저하게 논구되고, 확립되어야 한다. 문법적/ 역사적 성경해석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의 정통 교리가 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문법적/역사적 성경해석에 근거해서 영적/신학적 해석으로 나아가야 한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의 필요성과 유익성은 무엇인지를 따져 물어 보아야 한다.


첫째, 성경 본문에 대한 문법적/역사적 성경해석의 단계에서 멈출 경우 모든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더 풍부하고, 충만하고, 숨겨져 있는, 영적, 신학적 의미를 놓치게 된다. 특히 구약성경에 대한 문법적/역사적 성경해석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은 수건을 쓰고 구약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둘째, 그 결과 바로 지금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없게 되며,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매개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통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그로 인하여 성도 개인이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는 성화,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자라나는 성숙과 같은 거룩한 열매들을 맺을 수 없게 된다.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을 통하여 모든 성경, 특히 구약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때 성도의삶은 구체적으로 변화되며, 교회는 성숙한 영적 군사와 전사가 될 수 있다.

3) 모형론적 극소주의로부터 극대주의로 나아감(From Typological Minimalism to Maximalism)


모형론적 극소주의란 오늘날 한국 교회와 복음주의권에 널리 확산되어 있는 관점이다. 그것은 성경 자체가 모형론적/ 예표론적 성경해석을 수행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성경 본문 자체가 모형론과 예표론에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부분에 대해서만 모형론적 해석을 허용하는 입장이다. 즉 모형론적해석을 문법적/역사적 해석의 한계 내에 가두어 놓는 관점이다.

예를 들어 모형론적 극소주의자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에서 광야에서 장대에 높이 들린 놋뱀을 십자가에 달리실 자신에 대한 모형과 에표로 해석한 부분을 모형론적 해석의 실례로 인정한다. 하지만 모형론적 극소주의자는 그 이상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모형론적/예표론적 원리를 확대하고 적용해서 여리고성의 라합이 걸었던 붉은 줄, 아담과 하와의 몸을 가리기 위해 희생된 짐승의 피 등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모형과 예표로 해석하는 것을 수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잡아서 번제로 드리는 창세기 22장의 사건 조차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켜 우리를 죄를 대속하실 사건에 대한 모형과 예표로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야곱의 생애 속에서 야곱이 라헬을 지극히 사랑한 모습은 결국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적이고 일편단심적인 사랑에 대한 모형이요, 예표였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요셉의 고난과 비하와 승귀의 과정을 포함한 인생사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비하와 승귀에 대한 모형과 예표라는 해석도 수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형론적 극소주의자의 태도는 신약성경 안에 내재된 모형론적/예표론적 해석에 머무름으로써 안정감을 주는 장점이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모든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언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너무나 축소해서 적용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대해서 무지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예수님의 임재에 대한 생생한 체험과 예수님과의 풍성한 영적 교통을 막을 뿐만 아니라 성도 개인과 교회 공동체의 성화와 변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성경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인격과 삶과 사역, 십자가와 부활 (초림)과 재림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모형론적 극대주의가 우리가 택해야할 바른 방향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많
은 교부들과 중세의 건강한 신학자들과 청교도 신학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에드워즈가 모형론적 극대주의를 선택했다는 사실 또한 매우 중요하다.


4) 통제된 극대주의(Controlled Maximalism)
그러나 모형론적 극대주의의 길을 택할 경우 우리는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역사상 모형론적 극대주의의 길을 걸었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오류를 범해왔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대표적인 실례가 오리겐이다. 물론 오리겐은 필로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오리겐이 모형론적 해석을 넘어 풍유적 해석방법을 수용하고 또 풍유적 극대주의의 길을 택한 결과 그는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오류 즉 이단적인 교리를 주창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 성자와 성령이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종속론의 이단을 주창했고, 모든 인간 심지어 사탄까지도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만유회복론의 이단을 주창했다.

 

사실 이런 오리겐의 오류는 성경적 모형론과 상징주의의 건강하고 균형잡힌 발전을 오랫동안 지연시켰고, 수많은 사람 들에게 모형론적/상징적 성경해석에 대한 불안감과 염려와 의심을 심어 주었다.

또한 19세기 영국의 앤드류 죽스 (Andrew Jukes, 1815-1901) 역시 극명한 실례이다. 죽스는 19세기에 있어서 모형론을 가장 정교하고 세밀하게 발전시킨 모형론적 극대주의자였다. 하지만 그 역시도 끝내 오리겐이 주장했던 이단 즉 만유회복설을 주장하게 됨으로써 모형론과 예표론의 발전에 끼친 그의 긍정적인 공헌마저 뭍혀버리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20세기 중국계 사역자 위트니스 리 (Witness Lee,1905-97))도 마찬가지이다.208) 위트니스 리 역시 모형론적 극대주의자였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 그의 모형론적/예표론적 통찰력이 번득이고 있음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역시도 교리적 혼란과 오류 더 나아가서 사이비적인 교리의
주장이라는 비극의 길을 노정하게 되었다.


결국 모형론적 극대주의가 어떤 한계 내에서 적절하게 통제되지 않을 경우, 모형론적 극대주의는 자의적이고 무질서하고 무책임하고 왜곡된 성경해석을 낳게 되고, 그 결과 교리(/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The All-Inclusive Christ), [시편에서 계시되고 예표된 그리스도와 교회] (Christ and the Church Revealed and Typified in the Psalms)적 오류를 범하고 이단과 사이비에 빠지게 할 위험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고 분명하게 직시해야 한다.

 

건강하고 균형잡힌 극대주의와 이단과 사이비의 길을 가게 되는 왜곡된 극대주의 사이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한 모형론적 극대주의의 길은 반드시 적절하게 통제된’ (appropriately controlled) 극대주의의 길이이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모형론적 극대주의를 적절하게 통제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논자는 성경에 나타난 모형과 예표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과 삶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해석하는 것은 모형론적 극대주의를 적절하게 통제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철저한 기독론적 집중을 통해서 모형론적 극대주의의 무질서와 자의성과 왜곡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논자는 모형론적 극대주의의 위험성을 적절하게 통제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독론적 집중을 넘어 조직신학의 전체적인 틀을 총체적으로 사용하는 통제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조직신학의 전체적인 틀이란 성경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전체를 포함하는 성경적 교리의 전체계를 의미한다. 특별히 신론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모형론적 극대주의를 수용했던 오리겐이 삼위일체론을 반대하는 종속론의 이단을 주장했고, 위트니스 리 역시도 삼위일체론의 왜곡이 심각하다.

 

그리고 앤드류 죽스는 종말론에서 만인구원론이라는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 정통 삼위일체론에 뿌리박힌 성경적이고 정통적인 교리의 전체계가 모형론적 극대주의 해석을 통제할 때에만 모형론적 극대주의가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왜곡과 위험을 근원적으로 봉쇄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논자는 성경을 가장 풍성하게 해석해 주는 모형론적 극대주의의 길을 우리가 바르고 온전하게 걸어 가기 위해서는 건강하고 균형잡힌 조직신학과 교리에 대한 바르고 철저하고 면밀한 지식이 절대적으로 동반돼야 한다고 믿는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신학과 조직신학간에 맺어
져야할 바른 관계에 대한 단초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모형론적 극대주의를 통해 풍성해진 성경신학은 조직신학 작업을 더 풍성하고, 심오하게 해 주며, 역으로 건강하고 균형잡힌 조직신학은 모형론적 극대주의를 적절하게 통제해 줌으로써 건강한 성경신학 작업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성경신학과 조직신학간의 건강한 상호의존 관계가 형성되게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적으로 말하면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건강한 상호내주의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6. 결론: 나가는 말
이제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다. 논자는 모형론적 극대주의를 수용하는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의 길이 한국교회와 복음주의 신학계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여러 방향들 중 하나라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이 길을 건강하게 걸어가기 위해서는 네 가지 중대한 과제를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첫째, 문법적/역사적 해석의 바른 자리와 한계를 확인하는 것이다.

둘째, 모형론적 해석의 필요성과 중요성과 유익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세째, 모형론적 극소주의를 넘어서 모형론적 극대주의로 나아가면서, 그렇게 나아가야할 정당한 이유를 확인하는 것이다. 네째, 모형론적 극대주의의 길을 가되 정통 조직신학과 성경적인 교리의 전체계에 의해서 적절하게 통제되는 극대주의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 네 가지 과제를 적절하게 극복할 때, 우리는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통을 누리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우리 개인과 교회 공동체가 더 새로와지고 성화됨으로써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신실하게 예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거룩한 복이 우리 조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속히 임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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