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세가지 용법 권호덕교수

無益박병은목사 | 2017.04.04 12:05 | 조회 6110

율법의 세 가지 용법(usus legis triplex)

 

권호덕 박사(조직신학/천안대)

 

율법과 복음의 문제는 바울은 물론 종교개혁자들에게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 두 가지를 어떤 관점으로 보아야 가장 원활하게 해석될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율법''성령', '인간' 그리고 '복음' 이 네 가지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설명해야 가장 자연스럽게 그 의미가 규명될 것이다. 그러면 이 네 가지를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을까? 종교개혁자들은 '율법의 세 가지 용도'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이 중요한 주제가 대륙 계통에서는 매우 활발하게 연구되었으나 영미 계통에서는 덜 활발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 교회 신학에서도 지금까지는 유감스럽게도 이 주제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런 이유 때문에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 성도들은 율법과 복음 문제를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막힌 것으로 보인다. 본 논문에서는 율법의 이 세 가지 용도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차원에서 이 주제를 다룬다.

 

이 주제를 다루되 이 주제를 제일 먼저 언급한 멜란히톤으로 시작해서 루터와 칼빈의 견해를 차례로 다룬다.

 

A. 정치적 또는 시민적 용도(usus politicus seu civilis legis)

 

1. 멜란히톤은 제 1용도를 paedagogicus seu politicus usus(교육적 또는 장치적 용도) 또는 civilis usus로 표현했다. 하나님은 비록 중생하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규정에 따라 살기를 원하심을 지적함으로써 그는 제1 용도를 질서를 중요시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시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율법은 가르치며 공포와 형벌로써 사회일원들을 규정 아래, 외적인 행위에 대한 모든 계명에 따라 지키도록 강요한다"라는 그의 발언과 통한다. 그러면 이런 질서가 유지되려면 어떤 조치가 있어야 될까? 멜란히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몸의 지체의 절제를 명시함으로써 부패한 인간의 본성이 사회의 질서를 교란하는 요인임을 암시한다. 그는 여기서 세 가지를 지적했다. 혀로서 하나님에 대하여 분노의 말을 해서는 안되며 동시에 이웃에게 거짓을 금하며, 손을 남을 죽이고 남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되며, 몸은 외적으로 비도덕적인 것을 행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ibid.).

 

이를 이루기 위해 어떤 기구가 필요할까? 멜란히톤은 정부가 이런 치리를 위해 법, 교훈, 형벌, 육체적인 제재 등을 제정케 했다고 지적함으로써 율법의 제 1용도가 일반은총과 연관됨을 보여준다. 멜란히톤은 율법의 제 1용도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외적인 도덕을 지키는 것을 원하시며 그들이 이것을 지키지 않을 때 하나님은 여러 가지 재앙으로 벌주심을 강조함으로써 율법의 제 1용도의 주권자가 하나님임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는 이 제1용도가 죄용서함을 얻는데는 아무런 역할을 못함을 집고 넘어간다(ibid.).

 

그러면 멜란히톤은 율법의 제 1용도를 왜 paedagogicus usus(교육적 용도)로 표현하나? 그는 딤전 1:9에 근거하여 이 질문에 답한다: Lex est iniustis posita; id est, Deus coherceri vult etiam impius, ne externa delicta committant.그는 여기서 갈 3:24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율법은 그리스도 안의 교육자'라고 대답함을 통해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의 기능을 율법의 제 1용도와 연관시킨다(CR ibid.). 멜란히톤이 복음 곧 성령이 이를 통해 복음을 가르치고 듣는 것을 제 1용도에 포함시키는 것은 루터와 다른 점이다.

 

2. 그러면 루터는 율법의 제 1용도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우리는 루터의 주장을 그의 갈 3:19 주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여기서 율법의 제 1용도를 civilis usus로 표현한다. 루터의 주안점은 "하나님은 시민법, 진실로 모든 법을 제정토록 하시어 죄악을 어거하게 하셨다. 따라서 모든 법은 죄를 방해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는 말 가운데 나타난다. 루터는 세상과 타락한 인간의 문제점을 깊이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악하고 미친 세상과 인간을 묶고 어거할 '밧줄'이나 '사슬'을 반복해서 말한다(WA 40/1,479f.). 또 율법의 제 1용도와 연관하여 루터의 발언 속에는 '어거하다'(cohercio)라는 단어가 매우 자주 나온다. 그러면 이 죄악을 어거하는 수단은 무엇인가? 루터는 "정부, 부모, 선생, , 수갑 그리고 모든 시민 규정"(Magistratus, Parentes, praeceptores, leges, vincula et omnes ordinationes civiles)이라고 대답한다(WA 40/1, 480). 그는 멜란히톤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 수단을 지적한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루터가 이런 수단을 통해 죄악을 어거하는 것이 사단을 어거하는 것과 연관됨을 지적한 것이다(ibid.). 루터는 자연 속에 사단이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음과 또 이 세상이 사단의 지배를 받아 온갖 범죄를 저지르게 함을 주목한 것이다(ibid., 480). 이런 점에서 루터는 멜란히톤보다 인간 문제를 더 깊이 간파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루터의 이런 인간관 곧 인간이 외부의 어떤 권세와 연관되어 있다는 인간관은 철학적인 인간관 내지 세속적인 인간관과 구별되는 것이다. 이 후자들은 인간은 단독적인 존재로서 판단하고 자의로 행동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면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은 시민법을 설치하셨을까? 루터는 '공공의 평화, 만물을 보존하기 위하여 또 복음이 전진하는데 방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대답한다(ibid.). 물론 루터는 율법의 제 1용도가 인간의 삶에 필요한 것이지만 칭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확실하게 말한다.멜란히톤이 율법의 제 1용도를 하나님의 통치의 시각으로 해석했다면 루터는 복음의 확산의 관점에서 해석함을 볼 수 있다.

 

3. 칼빈은 루터나 멜란히톤이 말하는 율법의 시민적 용도(1용도)를 자기의 기독교 강요 초판은 물론 최종 판에서도 두 번째 용도로 다룬다. 칼빈도 위의 두 사람의 경우처럼 그 출발점을 부패한 인간의 본성에 둔다. 이런 점에서 "율법의 정치적 용도의 이념은 실제적인 인간본성에 뿌리를 박고 있다"라고 칼빈을 해석한 Donald MacLeod의 말은 정확한 것이다.

 

칼빈은 자연인을 가리켜 "제멋대로 부패한 생각을 가슴속에 간직하는" "날 뛰는 정욕을 공공연하게 발산하고자 하는" "자기를 억제할수록 정열의 불길은 강하게 되며, 마음속이 뜨겁게 끓어오르는"(II,7,10) 존재 등으로 표현한다. 칼빈은 심지어 이런 인간은 율법 자체를 미워하며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저주해서, 될 수만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을 없애려고 함을 주목한다(ibid.). 바로 이런 인간에게 율법이 '벌을 받으리라는 공포심을 일으켜' 죄를 억제한다는 것이다(II,7,10[1]).

 

"율법은 육의 미친 듯한 정욕, 내버려두면 한정 없이 뻗어 나가는 정욕을 억제하는 굴레와 같다"(II,7,10[10])라고 말함으로써 율법의 시민적 용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암시한다. 칼빈은 율법의 이러한 용도를 통해 야기된 의를 '억제된 또 강요된 의'(coacta expressaque iustitia)라고 표현한다(ibid[8]). 이로써 어느 정도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율법의 시민적 또는 정치적 용도와 연관하여 칼빈은 멜란히톤과 연관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우선 이 용도의 근거를 멜란히톤처럼 딤전 1:9-10에 두는 것이며(II,7,10[11])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을 이것과 연관시키는 것이다(II,7,11[1]). 칼빈은 율법의 시민적 용도가 '자기 '사상을 지닌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불행을 깨닫게 해서, 교만을 꺾고 겸손하게 만들어, 지금까지 자기에게 없는 줄을 몰랐던 것을 구하게 되도록 그들의 마음을 준비케 함을 지적하는 동시에 정욕이 날뛰는 인간에게 굴레를 씌어 아직 중생하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정한 때까지 안전하게 보존하심을(ibid., [6]) 말하여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의 의의를 지적했다. 이런 '교육적 용도'의 발언은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부르심을 받기 전에 또 성결의 영을 받기 전에(1:4) 어리석은 육의 정욕대로 날뛰는 동안은 이런 감독을 받는 것이 유익하다'라는 말과 통한다.

 

칼빈의 주장을 요악한다면 율법이 공포심이나 수치심을 불러 일으켜서 인간의 야성을 조금이나마 꺾어서 사회를 평안하게 만드는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마침내 구원을 얻는 시점에 도달하게 만드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칼빈의 경우도 죄를 어거하는 수단으로서 율법의 용도가 드러난다.

 

B. 신학적 용도(usus theologicus legis)

 

1. 멜란히톤은 '율법의 제 2용도'proprium legis divinae et praecipuum(하나님의 율법의 고유의 특유의 용도) 또는 usus Legis divinae et praecipuus (ibid., 717)로 표현했다. 말하자면 그는 율법의 제 2용도를 율법의 가장 중요한 용도로 여긴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루터와 같은 입장에 있다. 그러면 멜란히톤이 말하는 율법의 제 2용도의 기능은 무엇인가? 그는 '부패한 본성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의 죄를 보여주고, 고발하며, 공포에 질리게 하고 또 정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멜란히톤은 이것을 끝나지 않고 이 용도가 어떻게 수행되는지 그 과정을 설명한다.

 

사실 율법의 제 2용도에 대한 멜란히톤의 발언은 救贖史 전체를 요약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단어는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분노, 죄에 대한 심판, 원복음, 그리스도의 구속, 설교' 등이다.이 중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멜란히톤은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는 참지 못하고 그 분노를 쏟아 부으심을 먼저 열거한다: 38:13; 4:15; 4:24; 58:11; 62:12; 50:3,6; 1:2; 1:12; 9:2; 8:12,13; 12:13,14. 멜란히톤은 이 하나님의 공의가 죄인에게 마치 화살이 과녁을 꽂듯이 죄인을 공격함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우리 죄악의 마음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자기의 율법을 사용한다". 그러면 이런 율법이 죄인에게 전달되는 것은 무엇을 통해서인가?

 

멜란히톤은 여기서 설교의 직분을 언급한다(ibid., 124). 그는 이 설교의 기원을 에덴 동산에서 범죄한 첫 인류에게 원복음을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아들에게 둔다(ibid.). 그 선포 내용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죄에 대한 사망의 언도(3:13)와 이 사망에서 구원(3:15)이다(ibid., 125).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은 설교의 직분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또 그가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여 얼마나 고귀하게 취급했으며,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여 하나님을 떠나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으며 죄 안에서 더 이상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음 등에 대한 것이다(ibid., 125).

 

멜란히톤은 이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한다: 죄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ibid.).

 

만일 멜란히톤이 율법의 내용을 이것으로만 끝냈다면 인간에게는 비극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 위에 우리에게 퍼부을 자기의 진노를 퍼부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지혜의 속성을 언급한다. 멜란히톤이 lex moralis를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영원하고 불변한 지혜와 의로움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ibid.).

 

멜란히톤이 설교의 직분을 통해 율법이 선포될 때 한편으로는 율법의 제 2용도가 책망하는 기능을 발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이 전해짐을 지적한 것은 도덕법이 지닌 이런 내용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스도 자신도 십계명을 설교하고 해석하면서(ibid., 125) 그 당시 사람들의 죄악을 책망했지만 사도들도 십계명을 설교함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한편으로는 맹목적이고 거짓된 안전감으로부터 해방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126). 멜란히톤은 이 두 가지 내용을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으로 요약했다: "(Luk 24:47) kai; khrucqh'nai ejpi; tw'/ ojnovmati aujtou' metavnoian (kai;) ((eij")) a[fesin aJmartiw'n eij" pavnta ta; e[qnh. (ajrxavmenon) ((ajrxavmenoi)) ajpo; !Ierousalhvm: (그의 이름으로 회개와 죄사함을 모든 이방인에게 전파하라, 다른 사본은 죄사함을 위한 회개를 그의 이름으로 모든 이방인에게 전파하라)". 즉 이것은 책망인 동시에 위로의 복음이다.

 

그러면 멜란히톤은 율법의 이런 책망과 고발 정죄의 기능의 목적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마음의 이런 슬픔을 잘 느낀 사람은 누구나 다 그것이,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위로를 다시 인정하시지 않는다면, 죽음임을 안다"라고 말함으로써 율법의 제 2용도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암시했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멜란히톤이 율법의 제 2용도와 더불어 성령의 사역을 결부시킨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그가 지적한 성령의 사역은 율법을 거울처럼 이용해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무능을 보게 만드는 사역이 아니고 죄인을 책망하는 사역이다(125f.). 그리고 율법의 제 2용도와 더불어 중생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로 선행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십계명을 설교할 필요가 없다는 재세례파(Anabaptist)를 언급했다는 점이다(126). 루터가 이 재세례파들 때문에 율법의 제 3용도를 고려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특이한 것이다. 멜란히톤이 루터와 더불어 율법의 제 2 용도를 최고의 용도로 여긴 것은 바로 여기에 복음의 내용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2. 루터는 율법의 제 2용도를 legis usus Theologicus seu Spiritualis(율법의 신학적 또는 영적인 용도)로 표현했다. 루터는 모세 율법의 첫째 목적이 율법을 통해 죄가 성장하고, 특히 양심에, 번성하게 만드는데 있다고 본다. 루터에 의하면 바로 율법의 제 2 기능이 이 역할을 한다고 본다.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면 "율법의 고유의 직분은 사람들에게 그의 죄, 맹목, 비참, 악함, 무지, 하나님을 미워하고 무시함, 사망, 지옥, 심판 그리고 잘 준비된 하나님의 진노를 계시하는데 있다". 루터는 멜란히톤처럼 제 2의 용도가 율법의 고유의 으뜸 되는 직분으로 본다.

 

위의 단순한 정의만으로는 루터의 의도하는 바를 다 이해할 수 없다. 루터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그림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눈에 가증한 괴물이 있고 이 괴물을 쳐부수는 무기 내지 망치가 있는데 이 망치가 이 괴물을 어떻게 처치하는지 그 과정이 루터의 말하고자 하는 바의 내용인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 괴물은 무엇인가? 어떤 점에서 이 괴물은 하나님의 눈에 가증한 것인가? 이 망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망치는 그 기능을 어떻게 발휘하는가? 그 결과는 무엇인가? 등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 될 것이다.

 

-이 괴물은 무엇인가?: 루터는 이 괴물을 외식자들 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궤변자들과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나 자기 자신의 의 외람 됨에 따라 사는 모든 자들을 가리켰다. 루터는 이런 자들을 좀 심하게는 "자기 자신의 의의 외람 됨에 술취한 자기 의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 가장 널리 퍼져있는 페스트병과 같은 외식자들이다. 여기에는 물론 일반자연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해당한다.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율법주의자들이나 의식주의자들 그리고 행위의 의에 따라 사는 승려들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와 연관하여 루터는 매우 주목할만한 발언을 한다. 즉 이런 괴물들은 결고 율법의 제 2용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外飾하는 자들이 뻔뻔스러운 이유는 율법의 제 2용도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현대교회 내에 외식자들이 많다는 것은 현대 교회가 율법의 제 2용도에 대한 지도자들의 무지로 그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점에서 이 괴물은 하나님의 눈에 가증한 것인가?: 루터는 이 괴물들의 이성이 이런 외람된 인간적인 사상으로 오만해져서 이 의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공상함을 지적했다. 또 이들은 바리새인들의 경우처럼 외적인 죄는 범하지 않지만 마귀들에게 사로잡힌 체, 자신의 선행에 의존하며 자기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맹세함을 지적했다.루터는 또 이런 자들 속에 자기 사상이 남아 있는 한, 매우 교만하고, 자기를 신뢰하며, 잘난 채 하며, 하나님을 미워하는 동시에 은혜와 자비를 멸시하며 약속과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하다고 비판했다. 루터는 심지어 이런 인간을 사나운 짐승(bestia)이라 부른다(ibid.). 루터는 바로 이런 사람들의 마음과 오성 속에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죄사함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본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거대하고 단단한 암벽과 같은 자기 사상에 둘러싸여 하나님의 사역이 임해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루터는 자기 사상을 거대하고 소름끼치는 괴물이라고 부르면서 이것은 또 거역적이며 고집이 세며 목이 곧은 짐승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이런 자들은 자기 스스로 성을 쌓고 그 성 속에서 하나님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살겠다는 자율성의 인간이라는 말이다. 사실 성경이 정죄하고 타도하는 인간은 바로 이런 육신( )인 인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루터가 율법이 저주하는 부패한 인간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망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마디로 그것은 바로 율법인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이 괴물과 같은 짐승을 공격하기 위해 어떤 헤라클레스와 같은 것을 파견하신 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말이다.루터는 율법이 견고한 바위와 같은 이 '옛자아'를 파괴하는 것을 예레미아의 말을 이용해서 매우 정확하게 표현했다. "내 말이 불같이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서뜨리는 방망이 같이 아니하냐"(23:29)루터에 의하면 이 율법은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거대하고 강력한 망치인데 하나님께서는 이 망치로 자기-사고방식을 파괴하신다는 말이다. 루터는 견고한 성채와 같은 외식자들의 자아의 을 파괴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제 2용도라고 한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이런 외식자들을 죽이기로 결심하셨다고 한다. 루터에 의하면 이들을 죽이시는 이유는 거짓선행과 자기의 사상을 가진 자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내지 경외가 없는 곳에는 은혜와 생명에 대한 갈증도 없는 법이다라고 한다.

 

루터가 옛사람의 자아의 이 이렇게 견고하다는 사실을 매우 깊이 알았다는 점에서 그는 종교개혁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운동은 사실상 인간의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인간을 회복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이 망치는 그 기능을 어떻게 발휘하는가?: 루터는 율법이 죄인들에게 공포와 전율이 엄습하도록 함을 통해 자기의 비참함을 깨닫게 만들고 겸손하게 만든다고 했다. 루터는 마치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번개와 천둥과 나팔소리와 벼락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두렵게 만들어 자기 사상이라는 짐승을 불태우고 분쇄하는 것 같이율법이 우리에게 그렇게 임한다는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죄를 밝히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보여주어 그들로 하여금 절망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나 의 그리고 생명이 아니라 죄, 사망,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음 우리 모습 그리고 지옥을 보여주고 밝히는 불빛과 같은 것이다. 요컨대 루터의 경우 율법의 제 2용도는 인간의 죄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분노의 사역을 수행하며, 죄를 고발하고, 공포에 떨게 만들며, 인간의 마음을 절망의 지점까지 가도록 만드는데 그 의의가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MacLeod가 율법의 직분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동사로 표현한 것은 어울린다: accuse, terrify, condemn.

 

-그 결과는 무엇인가?: 루터는 우선 율법의 제 2의 용도를 통해 시민적인 범죄에 제동이 걸린다고 본다.영적이지 못하며 미개한 사람들의 방종을 율법의 두려움으로 어거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의 경우 제 2용도는 제 1용도와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루터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없는 사람에게 이런 주장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시민 생활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제 2용도가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영적인 범죄를 고발하기 때문에인간은 절망에 빠진 나머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율법의 제 2용도는, 루터의 경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접근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루터는 그 이유를 성경의 신관을 언급하여 설명한다. 즉 성경의 하나님은 절망에 빠져 겸손하게 된 죄인을 높이시는 분으로서 마침내 죄인을 칭의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의 제 2용도가 칭의론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임을 본다. 사실 루터의 경우 율법의 용도는 세 가지 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칭의론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루터의 '율법의 제 2용도론'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열거한 멜란히톤의 주장과는 달리 인죄론 중심적이다. 루터의 '율법의 제 2용도'에 대한 내용은 율법의 공포에 질려 살다가 마침내 구원의 은총을 맛본 그 자신의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성경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육의 문제를 공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루터가 '율법의 제 2용도'를 율법의 으뜸 되는 기능 내지 고유한 기능으로 본 것도 그는 이 속에서 성경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총체적으로 조직화 된 것을 보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루터의 '율법의 제 2용도론'은 현대인들의 '값싼 은혜' 신앙을 매우 강력하게 비판한 본 회퍼를 생각나게 한다. 왜 이들은 값싼 은혜론에 빠지게 되었을까? 이는 방망이처럼 두들기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실존이 무너져 보지 않는 사람들은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의 귀중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타락하는 현대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인 것 같다. 또 루터가 율법의 제 2용도를 신자들과 밀접하게 연관시킨다는 점에서 현대 교회에 경종을 주는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제 2용도는 기독인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주며 회개를 촉구하고 구원을 받은 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그 내용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다루겠지만 이런 점에서 루터의 경우 율법의 제 2용도는 제 3용도와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죄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가르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는 한국 기독인들이 이해하는 죄개념은 무속종교가 말하는 죄 또는 일반 자연종교가 말하는 죄 개념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다. 또 이런 죄에 대해 하나님의 분노의 반응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가르치는 일에 등한히 한 것 같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율법의 제 2용도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3. 칼빈은 율법의 세 가지 용도 가운데 이 '신학적 용도'를 첫 번째로 논한다(II,7,6-9). 칼빈은 여기서 이 율법의 용도의 명칭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는 모세 오경주석에서 usus theologicus(신학적 용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칼빈은 전형적인 명칭인 usus elenchticus(책망의 용도)를 기독교 강요는 물론 제네바 신앙교육서에서도 사용하지 않는다. 칼빈이 멜란히톤이나 루터의 경우 두 번째로 다루던 내용을 왜 첫 번째로 언급하는지 우리는 직접적인 근거를 알 수 없다. 짐작컨대 기독교 강요의 내용 목차 순서의 논리적인 흐름 때문일 것이다. 이것도 우리의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칼빈은 '율법의 신학적 용도'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의 --즉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유일한 --를 밝힘을 통해, 우리 각 사람의 불의를 경고하며, 알리며, 책하며, 결국 정죄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모세오경 주석에서 율법이 분노의 사역을 수행하며 우리의 불의를 들춤을 통해 사망을 가져온다고 율법의 신학적 용도를 적절하게 요약했다.

 

그러면 칼빈은 율법이 신학적 용도를 어떻게 수행한다고 보는가? 한 마디로 그는 루터와 비슷한 構圖로 율법이 신학적 용도를 수행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차이점은 표현방식이다. 루터의 표현이 공격의 대상에 원자탄을 떨어뜨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면, 칼빈은 상당히 온순하면서도 치밀하게 공격의 대상의 목을 죄는 법학자적인 징후를 드러낸다. 즉 그는 율법의 공격 대상인 인간의 문제를 설명한 다음 이런 인간에게 율법이 어떻게 간섭하며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하는 순서로 열거한다.

 

칼빈은 율법의 공격 대상으로서 인간의 문제점 세 가지를 지적한다(Inst II,7,6). 그것은 교만, 자만 그리고 탐심이다. 칼빈에 의하면 교만(prius)은 이기심에 눈이 어두워 정신이 마비되어 자기의 능력에 미친 나머지 우쭐해 있으며 자기의 판단기준으로 모든 것을 비판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 다음 자만(superbia)은 위선을 의라고 가장하고 가짜인 여러 가지 의로운 행위로 하나님을 반역하며(Inst II,7,6[10]) 자신은 죄악에 오염되지 않았다고 여기는 상태를 말한다.

 

세 번째는 탐욕의 죄인데 칼빈은 이 탐욕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그 무엇으로 표현한다. 칼빈이 묘사한 인간의 이런 상태는 하나님에 대해 전혀 의존적이 되지 못하고 자율성적인 존재로서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바로 육이다. 사실 루터가 공략했던 그 대상도 바로 육인 것이다. 루터가 묘사한 인간을 고집스러움으로 거역하는 거친 존재라면 칼빈이 묘사한 인간은 교묘하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을 말한다.

 

그러면 율법은 이런 인간에게 어떻게 반응하는가? 칼빈은 루터처럼 망치로 분쇄하는 그런 묘사를 하지 않고 율법이 거울의 역할을 수행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변화가 일어나는 듯이 묘사한다. 우선 칼빈은 우리가 거울에서처럼 율법을 통해 우리의 무력함(impotentiam)과 무력함에서 생기는 죄악(iniquitatem)을 그리고 결국은 그 두 가지에서 오는 저주(maledictionem)를 본다고 한다.

 

율법은 이렇게 개입하여 죄를 크게 만든다(5:20). 즉 인간은 율법을 통해 자기의 죄인됨을 깨닫게 되고 또 양심이 자기의 죄를 분명히 깨닫게 되면 죄가 더욱 커진다고 한다. 이는 율법의 개입과 더불어 입법자에 대한 완고한 불복종이 첨가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율법은 죄인을 멸망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진노를 무장시킨다. 율법이 이렇게 인간을 압박하면 두 가지 방향으로 결과가 나타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칼빈은 악인들의 경우 그들의 육적이고 부패한 본성 때문에 하나님의 영적인 율법과 결렬하게 싸우며, 그 징계를 받아도 결코 시정되지 않는다.오히려 이들의 마음이 완강하기 때문에 공포심을 일으키며 율법은 죄와 죽음의 원인으로 변화는 결과를 초래한다(II,7,7[13])고 지적했다. 칼빈은 "적합한 경청자를 만나면 구원을 주기로 계획된 율법이" 이들에게는 죽음의 원인이 됨을 지적했는데 그 이유를 여기서는 설명하지는 않는다. 즉 율법이 우리 앞에 명백히 지시하는 복된 삶을 우리가 누리지 못한 것은 우리 자신의 사악과 부패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가 '사망의 상태' 속에 있기 때문에 율법이 제시한 복을 누릴 수 없다는 말이다.

 

그 다음 율법은 중생한 자에게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칼빈은 이들이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 또는 율법이 그들에게 개입하면 "자기의 힘에 대해 어리석은 견해를 버리고 자기는 다만 하나님의 손이 받들어 주시기 때문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벗은 몸과 빈손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피난해서 완전히 그 안에서 쉬며, 그 안에 깊이 숨으며, 의와 공로를 얻기 위해서 그 자비에만 매달린다는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칼빈이 여기서 묘사한 것은 사실 믿음의 사람이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온건하게 대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칼빈은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 자비는 그리스도안에서 제공된다"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이 가련하고 무가치한 우리 죄인들을 대해서까지 은총과 인자로 빛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이라는 상태에 있으면 율법이 부드럽게 대한다는 말이다. 칼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칼빈은 이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찬양하는 데까지 인도함을 지적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칼빈이 율법의 신학적 용도를 요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위대한 체하는 우리를 작게 만들며, 우리 자신에게는 의를 얻을 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며, 무력하고 무가치하고 빈궁한 우리가 은총으로 피난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후에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한다" 율법의 신학적 용도에 대한 칼빈의 이런 발언은 그가 재빨리 성화론으로 나아가려는 인상을 준다. 만일 Beeke가 말한대로, 칼빈의 경우, 율법의 신학적인 용도가 자기 사상과 불경건한 자기 사상이 다시 일어서지 않도록 예방해 주며 매일 우리의 성화가 빈약함을 드러내 주고 우리 속에 육과 영 사이의 싸움을 인식시켜 준다면 이 용도는 율법의 제 3용도 내지 성화론에 밀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또 율법의 공격의 대상인 육을 말하면서 그것과 긴장 관계에 놓인 성령을 언급한 것은 성령의 신학자로서 칼빈의 특징을 드러낸다고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칭의에 관심을 집중시킨 루터와 구별되는 것이다.

 

위의 세 개혁자들은 율법이 구원을 얻는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함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동일한 신학적 선상에 있다. 이들은 인간의 육의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모두가 율법의 제 2용도를 언급하면서 교회 내에 있는 외식자들의 문제를 언급한 점이다. 이 사실은 현대교회가 주목해야 할 점이다. 겉으로는 기독인인데 그 삶의 방식이 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으면 육신인 외식자인 것이다.

 

이것은 마음 구조에 변화를 받지 못했다는 말인 동시에 율법의 신학적인 용도의 심각한 공격을 경험하지 못하고 단순한 종교인으로 산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외식자 때문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는 것은 물론 선교적인 차원에서 큰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외식자 문제는 일차적으로는 이런 교인을 길러낸 목회자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고 나아가 이런 목회자를 배출한 신학교가 책임을 져야 하며 동시에 신학교에 진리가 자유롭게 연구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이 큰 것이다.

 

이데올로기 신학에 갇히어 종교개혁자들의 발언까지도 자유주의신학을 내어 몰아 세우는 풍토가 되었다면 이미 그 교단은 이단적인 기질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왜곡된 보수주의 신학자들을 옹호하는 교회지도자들 속에서 이런 위험을 보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종교개혁신학을 견지하려면 적어도 신학교 내에 정직한 신학 작업이 육성되어야 할 것이다. 왜곡된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말만 믿고 그들의 견해에 추종하다가 교단은 생명이 없는 카톨릭화 될 것이고 나아가 세상사람들의 발에 밟힐 것이다. 율법의 신학적인 용도를 배우기 위해 성경의 죄개념을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 필자의 눈에는 이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으로 보인다. 만일 율법의 용도가 둘째로 끝나버렸다면 기독인의 삶은 진퇴양란에 빠져 고민할 것이다. 이제 기독인의 삶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 제 3용도로 들어간다.

 

C. 규범적 용도(normativus, tertius usus legis)

 

1. 멜란히톤

멜란히톤은 율법의 셋째 용도를 usus legis in renatis(CR 21,719)로 표현했다. 그러면 이 제 3용도가 적용되는 대상은 누구인가? 멜란히톤은 중생하고 믿음으로 칭의함을 받았으며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된 자들이라고 한다. 물론 여기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받았다는 말은 저주와 정죄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해방된 것을 의미한다. 그의 Loci Communes(1555)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기독인으로 하나님께서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둔다"(31:33; 32:37-41; 8:8-12)고 말씀하신 그런 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한다. 따라서 멜란히톤이 이 제 3용도를 특별히 교회와 연관시켜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영원하고 불변한 법 곧 lex moralis 또는 십계명을 주셨음을 강조했다.

 

그러면 멜란히톤은 이들에게 왜 율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그에 의하면, 한편으로는 이런 자들 속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들에게 빛을 주시며 그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합당하게 살도록 하시는데 바로 이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이 생애 동안 율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인간은 유한한 삶을 살면서 그 자체 많은 연약함, 죄를 지니고 살기 때문에 매일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하며 우리의 거짓 안정과 부정 때문에 울어야 한다는(ibid.) 것이다. 멜란히톤은 이런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이 받을 형벌을 생각함을 통해 일어난다고 한다(ibid.).

 

흥미로운 사실은 멜란히톤이 여기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것이다. 단지 그는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 율법의 설교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ibid.). 그렇다고 그가 성령을 완전히 배제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그는 Loci Communes(1521) 초판에서 율법의 셋째 용도와 더불어 성령이 육신을 죽이는 문제를 이미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멜란히톤이 율법의 제 2용도를 말하면서 '율법의 설교'를 언급한 내용을 생각나게 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설교의 내용은 십계명이라고 말한다ibid.).

 

멜란히톤은 이런 율법이 주어진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순종'이라고 대답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로 인해 칭의함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토록 하기 위함에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멜란히톤도 율법의 제 3용도가 성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사실 율법의 제 3용도에 대한 멜란히톤의 견해는 칭의론의 법정적 성격(forensic)과 연관하여 가장 잘 드러난다. 멜란히톤에 의하면 기독인이 첫째 의는 그리스도 안의 의이지만 둘째 의 곧 선한 양심의 의가 비록 불완전하지만 분명히 있어서 율법의 제 3용도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한다.

 

그런데 멜란히톤은 이런 순종을 통해 이루어지는 설계도 이를테면 하나님 형상을 여기에서는 직접 연관시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율법이 하나님의 뜻의 본질을 계시하고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뼈대를 제공한다고(ibid.) 말함으로써 율법과 하나님 형상 사이의 관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2. 루터

루터는 율법의 제 3용도를 거절했다는 논쟁이 더러 있었다. 이것은 루터와 그것을 거절한 그의 후예들을 혼동한 연고일 것이다. 루터파 학자들이 루터의 3용도론을 부정하는 이유는 루터가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대로 루터는 분명히 율법의 제 3의 용도에 대해 말했다. 그는 율법폐기론자들과 논쟁하면서 이것에 대해 말했다. "…… 세번째. 율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는 성화를 받은 자들이 하나님이 어떤 행동을 요구하시는지 곧 이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그런 행동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이다" 루터는 '주기도'를 주석하면서 계속해서 십계명을 주시했는데 이는 그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성령의 보내심을 통해 시작된 '사망의 권세'에 대항하여 싸우는 기독교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런 문제와 연관하여 usus alienus legis(다른 율법의 용도) usus practicus evangelii(실천적인 복음의 용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루터는 교회가 십계명을 지킬 것을 교훈하기 위해 "Von den Konziliis und Kirchen 총회와 교회에 대하여"(1539)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십계명을 지녀야 한다. 즉 십계명이 우리에게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바에 대한 율법의 방법론을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자기의 거룩함으로 어디까지 데려갔음을 보게 만들며 또 어느 정도까지 제한하여 우리가 안전하게 되지 못한 범위를 보게 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게 하고 우리가 성화 안에서 계속 자라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만들기 때문에 십계명을 지녀야 한다" 이 말은 루터가 율법의 제 3용도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을 주장했음을 보여준다.

 

루터는 율법폐기론자들과 논쟁에서 "그리스도를 지닌 자들은 율법을 바로 이루었다. 우리의 본성 속에 박혀있고 우리 마음에 쓰여져 있으며 타고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율법을 모두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이것은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일이다"(Table Talk CCLXXXVI) 또 루터는 그의 '기독교인의 자유'라는 저서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행위로부터 벗어나게 하지 않고 행위에 대한 거짓 견해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즉 칭의는 행위로 얻는다는 어리석은 주장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라고 했는데 칭의함을 받은 후에 율법에 따라 선행을 행함을 암시한 것이다.

 

그리고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주석하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선행에 대해 매우 자주 반복적으로 언급했다. 이를테면 "두려워말라. 나는 율법으로 너희들을 죽이고 너희들을 사망 가운데 머물게 하려고 율법을 준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나를 두려워하고 살게 하기 위해 주었다"라는 말은 칭의함을 받은 후에 율법의 필요성이 있음을 가리킨 것이다.

 

사실 율법의 제 3용도에 대한 루터의 주장은 '복음과 율법'을 구별하는 발언 속에서 구체적으로 계속 열거된다. 흥미로운 것은 루터가 율법의 제 3용도와 더불어 성령의 사역을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율법의 제 3용도에 대해서 더 깊은 내용은 루터에게서 기대하기가 힘든다. 그의 무게중심은 제 2용도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율법의 제 3용도의 최고의 열거자인 칼빈에게로 넘어 간다.

 

3. 칼빈

명칭: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2권에서는 율법의 셋째 용도의 명칭을 언급하지 하지 않고 단순히 '셋째 용도'(tertius usus)로 표현한다. I.J. Hesselink에 의하면 칼빈은 usus in renatis라는 표현을 좋아했다.John Ooms는 이 셋째 용도를 paedagogicus usus라는 명칭을 부여할 수 있음을 시사했는데 중생인을 교육한다는 의미에서 틀린 말은 아니다. Ooms의 주장은 콜부뤼게 학파의 한 사람인 John Wichelhaus의 지지를 받는다. 루터와 멜란히톤이 율법의 제 2용도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면 칼빈은 이들과는 달리 제 3용도를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으로 여겼다. 칼빈의 경우 율법의 셋째 용도는 신자들을 위한 생명의 규칙의 역할을 한다.

 

적용 대상: 칼빈은 매우 명확하게 '율법의 제 3용도'(usus tertius)가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거하시며 주관하시는 중생한 자들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율법이 기록되고 새겨져 있고(31:33; 10:16)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격려로 하나님께 복종하겠다는 열심히 있는 자들에게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멜란히톤이나 루터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우리는 율법의 제 3용도가 적용되는 중생인은 어떤 존재인지 칼빈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III,3,10-15에서 신자들은 성화를 체험하지만 현세 생활에서는 죄없는 완전성을 체험하지 못함을 지적함으로써 중생인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말하자면 신자들도, 비록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죄인이라는 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신자들은 아직도 정욕이 가득한 육체를 지니고 있으며 죄가 자기들 안에 살고 있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율법의 제 3용도가 적용되는 대상은 이런 신자들인 것이다. 그러면 칼빈이 이해한 중생인의 문제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열거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중생인 속에 죄악의 불길을 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와 같이 중생을 통해서 죄의 결박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그들은 육의 괴롭힘을 전혀 느끼지 않으리만큼 완전한 자유를 소유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들 안에는 싸워야 할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훈련이 계속된다. 그들은 훈련을 받을 뿐 아니라 자기의 무력을 더욱 깨닫게 된다" 여기 훈련을 받는다는 말은 중생인에 대한 율법의 어떤 역할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중생한 사람 안에는 악을 촉발시키는 불씨가 남아 있어서 끊임없이 정욕의 불길이 튀어나와서 죄를 짓도록 꾀며 자극하는 것이다" 칼빈은 성도들의 실제적인 상황을 주시하면서 "성도들이 육욕의 병에 잡혀 있어서 가끔 정욕이나 탐욕이나 야심이나 그 밖의 죄악을 저지르도록 하는 충동이나 자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칼빈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이런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한 마디로 그는 그것을 ''라고 단정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욕망의 충동을 느끼기만 해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런 종류의 욕망이 생기게 하는 패악성 자체를 죄라고 부른다" 우리는 여기서 존재론적인 이 세상 죄 개념이 아니라, 어떤 힘이 있어서 인간에게 능력을 행사하는, 성경이 말하는 역동적인 죄개념을 볼 수 있다. 기독인의 삶 가운데 율법이 어떻게 작용하여 이런 죄의 능력을 제압하느냐가 우리의 관심의 대상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죄의 힘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죄의 능력: 칼빈은 인간이 중생함을 통해 "죄의 지배력은 소멸되었지만 여전히 신자들 안에 거함"을 지적한다. 다른 말로 "죄의 법이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폐지되었지만, 다소의 흔적은 남아 있다고 한다" 중생한 인간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알려면 '죄의 법'이 그들에게 어떻게 역사하는가를 살펴보면 된다. 칼빈은 어거스틴이 율리아누스를 논박하는 글을 인용하면서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법의 문제를 인정한다.: "죄의 법은 영적 중생에 의하여 사함을 받는 동시에, 여전히 죽을 육 안에 남아 있다". 그는 계속 인용하기를 "죄의 법은 세례에서 사함을 받으나 제거되지는 않는다"라고 했고 이 글에 나오는 암브로시우스의 발언을 참고하여 "죄의 법은 비록 남아 있지만 그것으로 인한 죄책은 세례 때 사함을 받았다.

 

암브로시우스는 이 죄의 법을 불법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그것은 육신이 성령에 대항해서 정욕을 발동하는(5:17) 불법적인 기준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동의했다. 그 외 칼빈이 어거스틴을 동의하면서 인용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죄책으로 우리를 잡고 있던 죄는 죄책과 함께 죽었다. 그리고 매장이 완결되어 완전히 제거(치료)되기까지 죄는 비록 죽었으나 여전히 반항한다".

 

칼빈은 또 어거스틴의 롬 6:12 해석을(41설교) 비판 없이 그대로 인용했는데 "(어거스틴)는 죄를 없애라고 하지 않고 죄가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죄는 반드시 여러분의 지체속에 있다. 적어도 그 지배권을 빼앗아라 죄가 명령하는 것을 행하지 말라", 이런 표현들은 죄의 지배 체제가 비록 패잔병이지만 우리 속에 아직도 남아 있으면서 게릴라전을 벌리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우리의 관심은 죄의 법이 이렇게 게릴라전을 펼치는데 율법의 어떻게 작용하여 중생인을 성화시켜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 속에 있는 이 죄의 법이 인간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비밀은 이 세상 어떤 종교도 철학이나 윤리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인간론은 다른 모든 것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칼빈이 재세례파들의 문제점을 지적했을 때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순결한 상태로 회복되었기 때문에 또 성령의 직통 계시를 통해 지도를 받기 때문에 육의 정욕을 제어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을 때(Inst III,3,14[1]) 그들이 바로 중생인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법"에 대해 무지한 연고였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했다. 칼빈은 이들을 비판할 때 인간의 상태를 중심으로 논쟁하기보다는 성령이 어떤 분인지를 열거함을 통해 논쟁했다(ibid[9-19]). 필자의 견해로는 이 논쟁에서는 성령론을 중심으로 질문을 제기하는 것보다 인간의 실존적인 상태 내지 구조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효과적인 것 같다.

 

그러면 이런 죄의 법을 그 안에 지니고 있는 중생인에게 율법은 어떻게 역사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칼빈이 중생인에게 율법이 필요한 이유를 어떻게 말하는지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주장 곧 율법은 신자들에게 불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항해서 그 필요성을 매우 명쾌하게 열거한다. "율법이 비록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신자들의 양심에 관계할 수 없을 지라도, 신자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끊임없이 가르치며 충고하고 권고하기 때문이다."(Inst III,19,2[8])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생활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우리의 모든 생활에는 어떤 경건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살전 4:7; 1:4; 살전 4:3). 이 때에 신자들에게 의무를 알려주며 거룩과 결백에 대한 열의를 일으키는 것은 율법이 하는 일이다" 이런 발언은 Ed. A. Dowey의 지적대로 칼빈의 경우 율법 속에 성화에로의 힘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상에 기초한다.그러면 칼빈의 경우 율법이 '내포적 원리' 역할을 하는 것일까? 부분적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성령의 개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질문은 율법이 어떤 방법으로 중생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이 '중생인', '성령' 그리고 '율법' 사이의 관계를 통해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대로 율법을 지켜야할 인간과 율법 그리고 성령 사이의 역학적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두 가지 오류 곧 율법폐기론과 신율법주의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칼빈은 이미 율법의 제 3용도를 말하면서 중생인이 율법을 지키려할 때 성령의 사역에 대해 언급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격려로 하나님께 복종하겠다는 열심히 있지만, 역시 두 가지 방면에서 율법의 혜택을 입는다".

 

즉 율법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것을 철저히 배우고 확고하게 이해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며 율법에 대해서 자주 명상함으로써 복종하겠다는 열성을 얻으며 복종하는 힘을 얻으며 범법의 미끄러운 길에 들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Inst II,7,12[5]). 또 칼빈은 육의 짐 때문에 전진이 방해를 받을 때 율법은 채찍(flagrum)과 같은 부단한 자극이 되어 일시도 한 자리에 서 있지 못하게 함(ibid., [7-8])을 지적한다. 칼빈은 여기서 시 19:7-8과 시 119:105을 인용하여 율법이 영혼을 어떻게 소생함을 암시한다(ibid., [9-10]).

 

말하자면 중생인은 이 율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배우며, 진리를 배우고 나아가 은총의 약속을 붙들게 함을 통해([13-14]) 주어진 목적지를 향해 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Elert'칼빈의 경우 율법 그 자체가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이루도록 하는 자극제 역할을 한다'라는 말은 칼빈을 잘 이해한 발언인 것이다. 위의 내용은 율법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대한 칼빈의 발언과 일치하는 것이다(Inst II,7,12).

 

칼빈은 이것을 더 심층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자유', '양심', '율법' 그리고 성령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갈라디아서에 있는 논증 곧 율법의 정죄에서 풀려난 신자들의 양심은 자유를 얻었음을 지적한다(III,19,3). 그 다음에 칼빈은 "율법의 멍에를 벗은 양심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구절에는 성령의 사역이 전제된다. 칼빈은 갈라디아서 주석에서(4:5) 입양에 대해 말했는데 입양은 양자의 영이 전제되며 성령의 개입을 암시하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은 멜란히톤의 발언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령에 의하여 율법을 지키도록 독려를 받는다" 말하자면 입양되면서 양자의 영을 받으며 성령이 그 마음 속에 감동을 주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마음을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의 제 3용도가 그 기능을 발휘하려면 양심, 자유, 성령의 추진 그리고 율법 사이의 총체적인 관계가 전제됨을 보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을 그치지 않는다. 중생인 자신의 영적인 전투가 있어야 됨을 분명히 보여준다. "율법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6:5). 이 일을 실행하려면, 먼저 우리의 영혼에서 모든 다른 감정과 생각을 없애버리고,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욕망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우리의 힘을 이 한 점에 집중시켜야 한다". 칼빈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중생인도 육 때문에 약함을 지적한다.

 

따라서 기독교 강요 III,19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열거한 다음 III,20에서 기도를 길게 열거했는데 이는 율법이 중생인의 삶에 적용되어서 성화되는 일에 기도의 역할이 중요함을 암시한 것이다. 칼빈이 20장의 제목을 "기도: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라고 정한 것을 보면 연약한 육인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도를 통해 얻음을 암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칼빈에 의하면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감사의 삶을 배운다. 즉 율법은 감사의 삶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감사가 중생인이 성화되는데, 즉 목적지를 향해 가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Ooms의 지적은 평가할만하다. 그는 칼빈의 주석 딤후 3:16-17 그리고 갈라디아 주석(Comm on Galations, 109-110)을 참고로 이 사실을 언급했다.

 

율법의 제 3용도의 목표: 그러면 율법의 제 3용도가 중생인에게 역사하여 어떤 목표에 도달하게 만들까? 우리는 이에 대해 칼빈에게서 비록 내용은 동일하지만 형식상 다양한 대답을 볼 수 있다. 그는 율법 전체의 목적이 "의를 실현해서 하나님의 순결을 본 받아 인간 생활을 이루어 나가라는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II,8,51[1]), "의의 완전한 모범"(iustitiae examplar eminere. II,7,13[5])인 동시에 "완전성"(perfection. II,7,13[9])이라고 했다.(II,7,13).

 

그러면 이 '모범' 또는 '완전성'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 형상'과 연관하여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은 율법에서 자기의 성격을 충분히 윤곽으로 그리셨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들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의 생활에서 이를테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Ita enim suum ingenium Deus illic delineavit, ut siquis factis quicquid illic praecipitur repraesentet, imaginem Dei quodammodo sit in vita expressurus Inst. II,8,51[2])라고 말했다.

 

그러면 칼빈은 하나님 형상을 어떻게 이해했나? 필자는 이것을 주제로 이미 논문을 쓴 바 있다(아직 출판되지 않음. 원고지 300). 거기서 필자는 칼빈이 하나님의 형상을 '피조물', '성경'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 등으로 이해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칼빈은 인간과 관계하여 하나님 형상을 실체론적 동시에 관계론적으로 이해했음을 지적했다. 우리는 이 방금 언급한 논문과 연관하여 여기서 칼빈이 율법의 제 3용도와 연관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본다. 칼빈의 경우 율법이 목표로 삼고 있는 하나님 형상은 기독론적, 인간론적 그리고 종말론적인 관점을 보아야 한다.

 

Victor A. Shepherd가 이것을 잘 요약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par exellence이기 때문에, 율법의 순종이 이 형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율법의 셋째 용도는 믿음의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 닮아가게 하는 도구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들은 율법을 통해 그들이 종말론 적으로 되어야 할 그런 존재가 된다".

 

칼빈은 십계명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암시했다. 우리는 칼빈의 경우 실체론적 하나님 형상이 나타나려면 관계론적 하나님 형상이 이루어져 됨을 볼 수 있다(권호덕 논문, 한국개혁신학회 논문집 24200쪽 이하). 칼빈의 경우 이 후자는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로 명확하게 요약할 수 있다. 칼빈은 첫 계명을 해석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하게 만들어야 한다"(II,8,16)라고 한 것이나 둘째 계명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만 굳게 붙어 있어야 한다"(II,8,18)라고 또는 "우리를 교회의 품안에 받아들이심으로써 우리와 맺으시는 인연은 거룩한 혼인과 같으며 …… 하나님은 진실하고 성실한 남편의 모든 의무를 다하시는 대신에, 우리에게는 사랑과 정조를 요구하신다"(ibid.)라고 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를 인간의 온전한 삶을 이루는데 본질적임을 지적한 것이다.

 

셋째 계명은 말할 것도 없고(ibid., II,8,22) 넷째 계명은 일 중에 하루인 안식일날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를 구체적으로 한번 경험하고 실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II,8,28). "신자들은 자기의 일을 제쳐놓고 하나님이 자기들 안에서 일하시게 하라는 것이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일정한 날에 서로 모여 율법을 배우며 의식을 행하며 적어도 그 날은 특히 하나님의 행적을 명상하는 데 바쳐서, 이렇게 회상함으로써 경건의 훈련을 받으라는 것이었다"(ibid., II,8,28[9-10])

 

칼빈은 십계명 중에 수평적인 차원에 대한 내용인 5-10계명은 II,8,35-50에서 열거했다. 그는 여기서 이웃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매우 구체적으로 또는 심층적으로 열거했다. 그 다음 그는 율법의 요약을 말함으로써(II,8,51) 십계명을 정리했다. 여기서 칼빈은 실체론 적인 하나님 형상(하나님의 순결)이 나타나려면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가 온전해져야 함을 암시했다(ibid.). 동시에 그는 수직적인 관계가 이루어져야 수평적인 관계가 온전해짐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펠라기안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쐐기와 같은 것이다. 칼빈의 경우 이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칼빈이 신 10:12-13 내용 속에서 율법의 목적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붙어있게 만드는 것(믿음)임을 지적한 것에서 보인 것이다(ibid.). 칼빈은 인간이 성결하게 되려면 수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수평적인 차원에서 이웃을 사랑해야 됨을 지적한다. "율법의 목적은 순결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다"(딤전 1:5) "양심과 진실한 믿음을 선두에 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경건이며 이 경건에서 사랑이 생겨나는 것이다"(ibid.).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50개(1/3페이지)
조직신학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50 NT Wright의 신학적 기여와 그 문제점 이승구 교수 無益박병은목사 545 2020.12.03 21:50
49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읽는 존 칼빈의 "영혼의 깨어있음에 관하 無益박병은목사 3253 2018.10.25 15:35
48 박영돈 교수와 예장 고신의 성령론의 변화 고경태박사 無益박병은목사 4649 2017.12.24 23:22
47 무천년설의 개혁신학적 타당성 無益박병은목사 5984 2017.10.28 00:32
46 <개혁주의신앙강좌> 개혁교회의 성만찬에 대한 이해 이남규목사 無益박병은목사 4436 2017.10.26 17:52
45 믿음을 얻는 10 단계 윌리암 퍼킨스 無益박병은목사 5253 2017.05.04 11:45
>> 율법의 세가지 용법 권호덕교수 無益박병은목사 6111 2017.04.04 12:05
43 "칭의와 성화" 개념에 대한 이해 노승수 목사 無益박병은목사 6534 2017.02.02 16:58
42 삼위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 김병훈목사(조직신학,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無益박병은목사 6773 2016.07.23 19:16
41 칼빈의 칭의론 신동수 목사 사진 無益박병은목사 7291 2016.04.18 17:03
40 Jonathan Edward 속죄론 (Atonement) 연구 박재 無益박병은목사 7905 2016.03.01 01:08
39 바빙크의 종말론 요약 無益박병은목사 8001 2016.01.30 18:46
38 하나님의 예정과 구원의 신비 황대우 목사 無益박병은목사 7190 2015.10.21 16:07
37 천주교와의 교류 및 영세에 대한 우리의 이해 박동근목사 無益박병은목사 8413 2015.09.19 19:04
36 17세기 개혁신학내에서 일치된 은혜언약 교리 배현주 목사 無益박병은목사 7652 2015.07.25 01:56
35 그리스도는 택자를 위하여 죽으셨다. 김영규목사 無益박병은목사 8232 2015.04.07 17:35
34 Karl Barth의 신학과 그에 대한 개혁신학적 비판 한상호 無益박병은목사 9668 2015.02.26 05:15
33 개혁신학과 복음주의 연관성 Richard Gamble 번역 안명준 교 無益박병은목사 10476 2014.12.07 12:07
32 퓨리탄과 에드워즈의 모형론적 해석과 한국교회 정성욱 교수 無益박병은목사 13832 2014.11.07 23:56
31 성례에 대하여: 어떤 떡과 포도주를 사용할 것인가? 이성호 목사 고려신 사진 無益박병은목사 8759 2014.11.06 1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