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칭의론 신동수 목사

無益박병은목사 | 2016.04.18 17:03 | 조회 7298

[기독교강요 연구노트 6] 칼빈의 칭의론 (III권 11-18장을 중심으로)


I. 들어가는 말

  

칼빈의 사상 속에서, 구원의 서정 (ordo salutis) 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으로부터 시작하여, 복음을 통한 “외적 부르심” 과 성령을 통한 “내적 부르심”을 받는 택자들이 “믿음” “회개” “거듭남” "칭의" "성화" 그리고 "영화" 의 과정을 통과함으로 완결된다. 물론, 개혁신학 안에서 구원의 서정 선후 순서 상 이견이 없지 않지만, 구원의 도입으로서 "칭의" 와 구원의 성숙과 완성으로서의 "성화" 혹은 "영화" 에 대한 이견은 그리 크지 않다. 이제 살펴보게 될 구원의 도입 혹은 객관적 측면으로서의 “칭의” 교리는 로마카톨릭과 개신교의 구원론을 가르는 가장 첨예하고도 중대한 교리라 하겠다. 루터가 중세신학의 홍해를 가르고 다시 새롭게 발견한 "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의 교리는 칼빈에게 이르러 정교화되고 체계화된다. 과연 논쟁의 핵심이었던 칭의는 무슨 의미이며,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에는 어떤 이견이 있었던 것일까? 또한 칭의와 행위의 관계는 어떠하며 칼빈주의 개혁파 칭의론은 어떤 특징을 가지는 것인가? 교조 칼빈의 “칭의론” (강요 III 권, 11-18장) 을 중심으로 개혁주의 칭의론을 정리하려 한다.


II. 본론: [기독교강요] 분석


A. 칭의의 정의 (III권, 11장)

1. 칼빈이 정의하는 칭의는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를 간단히 설명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라고 한다. 또 칭의는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III권, 2장)

2. 칼빈에 의하면, 칭의란 1)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주심 이며, 2) 죄사함과 함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 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정의는 루터가 중세신학을 돌파하고 (breakthrough) 발견한, "우리를 위해 부어주시는 우리에게서 전혀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 (alien righteousness of God for us) 사상에 "전가" (imputation) 이라는 개념이 강화된 정의라 할 수 있다. 루터도 물론 "전가" 라는 개념에 찬성표를 던지겠으나 그의 글들에는 의의 "주입" (infusion) 이나 "실제적 변화" (actual becoming) 라는 말들도 상당히 등장한다. 칼빈은 이러한 단어들을 원천적으로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칭의가 인간에게서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전적인 하나님의 의이며 그것은 전가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임하는 것임을 확실히한다.


3. 칼빈은 루터를 따라 칭의교리야말로 “종교의 요점” (the main hinge on which religion turns)이요 "교회가 세워지고 무너지는 요점" (the article on which the church stands or falls) 라고 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개신교 진영 안에도 칭의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존재했으며, 그 중 루터란 신학자인 오시안더 (Osiander)의 칭의론은 칼빈이 보기에 상당히 위험스러웠다.

  

4. 오시안더는 칭의란 “하나님의 본질을 사람 속에 주입 하는 것” 이며, “용서” 와 “중생” 을 통해 신자가 실제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칭의를 연결시키는데, 그리스도의 신성 - 본질적 의 - 가 우리에게 주입 (infusion) 되어 우리가 의롭게 된다고 말한다 (5).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의 “본질적 의가 유출” 되어 신자가 실제로 “의롭게 됨” 이라고 가르친다 (10). 이러한 사상의 편린들은 어느정도 루터에게서 온 것임이 분명하며, 비록 도에 지나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이후 루터란들이 오시안더에 대해서 상당히 동정적이었던 것을 이해할 만 하다. 하지만 칼빈에게 있어서 오시안더의 칭의론은 카톨릭의 공로사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제사장적 사역) 의 의미를 반감시키는 사변적이며 반성경적인 사고라고 비판한다.


5. 칼빈에게 있어서, 신자는 항상 죄인일 뿐이며, 우리 안에는 의롭다 칭할 아무런 의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기에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는 철저하게 인간의 의로움이나 행위를 배제하게 된다. 물론, 법정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 이후에는 실제적으로 거룩하게 되어지는 "중생" 과 "성화" 의 단계가 있음은 분명히 구분하지만, 신자의 실제적인 성화 (변화됨과 행위) 와 칭의는 철저하게 구분되어야 하며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빈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신자가 실제적으로 의롭게 된 후에 칭의를 받는다면 과연 누가 의롭다고 칭할 수 있으며 구원을 확신할 수 있겠는가?" 


6. 칼빈은, 그러므로, 신자의 행위를 의지하여 칭의를 주장하는 모든 이론에 대해서 "유대적" 이며 "스콜라적" 이라고 비난한다. 물론, 스콜라 신학에서도 은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서방교회는 어거스틴의 은혜론을 따라 중생한 사람의 모든 선한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고 가르쳤다. 어거스틴 신학에서는 이 선행하는 은혜로 선을 행할 수 있게 된 신자가 비로서 의롭게 되었으니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다고 가르쳤다. 결국, "의롭게 만드는 은혜" (grace making righteous)로 말미암아 "칭의" (justification) 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 여기서도 루터를 따라 - 비록 의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작동했다 하더라도 인간안에 있는 의로움이 결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칭하는 이유가 될 수 없으며, 칭의에 있어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철저하게 배제되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루터가 성경에 없는 "오직" (only by) 이라는 말을 첨가하면서까지 주장했던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는 이신칭의의 교리는 오히려 성경적인 가르침이라고 확인한다 (19). 


7. 사실, 인간의 행위나 잔존하는 의로움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사상은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에는 주류 신학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사상이었다 (물론, 이신칭의 신학의 역사적 증거들을 나열하는 적지않은 증거구절들을 담은 연구서적들이 없지 않지만, 루터와 개신교 신학 이전에 칭의론이 신학적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점에서 루터로 부터 시작하고 칼빈과 2,3 세대 종교개혁가들로 이어진 칭의론은 개신교 신학의 핵심가치요 기둥이라 할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오직 그리스도 중심의 칭의론만이 인간의 헛된 자만심을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신학임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우리의 의는 우리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는 것, 우리가 의를 소유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기 때문이란 것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의를 완전하게 또 풍부하게 가졌다. ... 의를 이루는 방법은 다만 한가지이며, 우리는 전가에 의해서만 그것을 얻는다. 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나눠주시며, 놀라운 방법으로 자신의 힘을 우리 안에 넉넉히 부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있게 하시기 때문이다 (23)

B. 칭의는 누구에게 임하는가 (III권, 12-14장) 


1.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는 "양심에 평화를 줄 수 있는 유일한 길" (13장, 3절) 인데, 이는 칭의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며 이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는 자는 결코 양심에 평화를 얻을 수 없는데 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의 칭의를 얻게 하는데,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믿는 믿음만이 양심의 평안을 주고, 기도에 기쁨을 준다" (13.3).  


2. 칭의의 시작은 자신이 죄 가운데 있으며 구원이 필요한 자라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칼빈은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1) 불신자, 2) 행위가 없는 이름뿐인 신자, 3) 악을 감추는 위선적인 신자, 4) 중생한 거룩한 신자. 


사람은 ⑴ 하나님을 전연 모르고 우상 숭배에 파묻혀 있거나, ⑵ 성례전에 참가하게 되었으나, 불결한 생활을 계속하여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행동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 이거나, ⑶ 그 사악한 마음을 헛된 의식으로 감추는 위선자이거나, ⑷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하여 진정한 성화에 관심을 가지는 이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인다 (14.1)

3. 물론, 첫번째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 안에도 "선함의 불꽃"이 있어서 일견 대단한 도덕성을 옅볼 수 있는데, 이러한 불신자들의 덕까지도, 칼빈은, 하나님이 주신 것 (선물) 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일반은총" (common grace) 이며, 불신자 안에도 조금이라도 칭찬할 만한 것이 남아있거나 주어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상이다. 이것은 후에 "이 세상의 단 한 평의 땅 까지도 하나님께서 이것이 내 것이다 라고 하지 않은 곳은 없다" 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네오칼빈니즘의 핵심 사상이 되었다. 


4. 하지만, 칼빈은 아무리 불신자에게서 칭찬할 만한 선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참된 덕" 이 될 수는 없는데,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온전하신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믿음으로 역사하지 못하고,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지 않는 곳에는 참된 거룩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떠나서는 성화도 없으므로 분명히 그들은 나쁜 나무와 같다. 보기에 아름다운 과실을 맺고, 그 과실은 맛도 좋을는지 모르나 몸에는 조금도 좋지 않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에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은 사람이 생각하거나 계획하거나 실행하는 것이 모두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의에 대하여 무가치할 뿐 아니라, 확실히 정죄를 받아야 하겠기 때문이다.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하는(히 11 : 6) 사도의 말이 이미 증명하지 않았는가? (14.4)

5. 결국, 참된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자에게만 가능하다. 즉,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 중생한 자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6. 그렇다면, 성례전에 참여하며 교회를 통해 종교생활을 하지만 입만 살았지 거룩한 행실이 없는 자들과 온갖 악한 마음으로 악행을 일삼으면서 겉으로는 종교생활을 하는 위선적인 신자들의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들은 겉으로 볼 때 믿음이 있다 하는 자들이며 교회생활에도 빠지지 않는 신앙인 이지만, 칼빈에 의하면, 사실 이들은 전혀 믿음이 없으며 참된 신자가 아니기에 칭의를 못 받은 자들일 뿐이다.


이 두 종류의 인간들이 아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 중생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불결한 양심이 증명한다. 그리고 중생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따라서 그들은 아직 하나님과 화목케 되지 않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7)


7. 칼빈의 중생론과 성화론에서 더욱 분명해 지지만, 칼빈은 중생의 열매, 즉, 성화의 증거가 없는 자들은 믿음 자체가 없는 자들이요 칭의 자체를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한다. 즉, 스스로는 믿음이 있다고 하고 종교생활을 할 지언정 성화의 증거가 없는 자들은 위선자요 거짓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칼빈의 칭의론은 후대의 청교도들의 성화론 중심 신학과 맥을 같이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는 결코 그 자체로 성립하지 않는다. 즉, 믿는다고 고백하고 신자가 되었다고 칭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칭의는 그 이후의 성화로서 입증되어야만 하는데 거룩한 삶의 증거가 없는 믿음이란 칼빈에게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8. 그러므로, 오직 거듭나고 성화된 자들만이 칭의를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과 행위의 열매를 맺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고, 죄를 거저 사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의 이 은혜는 큰 자비와 연결되는데 이 자비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며 그 힘으로 우리의 정욕을 날로 더욱더 죽이시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성결케 된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되어 참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며, 우리의 마음은 율법에 순종하게 된다 (14.9).  
9. 참으로 칭의를 얻은 거듭난 신자들은 율법 까지도 마음으로 순종하게 된다는 것은, 칼빈신학이 가지는 율법의 제3용법 - 신자에게 여전히 유효한 윤리적 규범 - 과 연결된다. 물론, 우리가 율법의 엄격함으로 인해 율법을 문자적으로 다 지켜 행할 수는 없다. 다만, 율법에 순종할 마음이 생기고 율법의 정신 -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 을 따라 율법에서 요구하는 여러가지 규례들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0. 그러나, 칼빈은 카톨릭 (스콜라) 신학 안에 창궐했던 행위 공로론 (Merit) 은 비판한다. 스콜라 신학에서는,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받아주시는 은혜” (accepting grace) 로 일단 사함을 얻지만, 범한 불법의 참된 보속 (penance)은 “잉여행위” (supererogatory works)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해주시겠지만, 남은 보상 (사람이나 교회에 드릴) 은 평소에 율법이 정한 것 이상의 선행을 쌓아서 갚아야 한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일반신자들은 이러한 "잉여행위" 가 부재함으로 교회의 사제나 성자들이 쌓아놓은 "잉여공로" 창고로 부터 그것을 분할받아 보속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바로 그 문제많고 탈 많았던 "면죄부" (indulgence) 였던 것이다.  


11. 칼빈은, 결코 하나님 앞에 잉여행위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율법이 제시하는 것 이상으로 더 큰 순종과 헌신으로 잉여행위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물론, 칼빈은 기독론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언급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순종함으로 이루신 공적으로 말미암아 모든 신자들이 구속의 은혜를 받는다는 생각을 피력한다. 즉, 그리스도만이 참된 잉여행위와 잉여공적을 가지신 분이요,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신자들을 위한 공로였다. 하지만, 그 어떤 인간이라도 율법의 엄중함을 넘어서 잉여행위를 만들 수 있는 자는 없는데, 혹, 율법을 지켜 행함이 있었을지라도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공로나 자랑이 되지 않을 뿐이라고 칼빈은 주장한다.


12. 칼빈은 어떤 경우라도 인간의 행위가 칭의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중세의 유명한 원인론 (causality) 을 들어 칼빈은 칭의에 이르는 네가지 원인을 제시한다. 


1) 효과적 원인 – 하늘 아버지의 긍휼과 거져주신 사랑
2) 재료적 원인 –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3) 도구적 원인 – 믿음의 통로
4) 최종적 원인 – 하나님의 의와, 선하심과 그의 영광

13.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칭의에 인간의 행위는 전혀 작용하지 않음을 칼빈은 학자들의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반증한다. 그러나, 칼빈이 선한 행위 자체를 반대하거나 거부한 것은 아니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앞서 설명하였지만, 칼빈에게 있어서 신자의 선행은 여러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신자의 선행은 믿음을 강화시키고, 부르심의 열매가 되며, 하나님의 선물로 임하며, 매우 중요하게도, 하나님께서 선택 (예정) 하신 목적이 되기에 중요하다 (아래에서 더욱 상술할 것임). 심지어 신자의 선한 행위를 통해 영생을 주신다는 성경의 말씀 - 롬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 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경륜의 순서에서 앞서는 것을 뒤따르는 것의 원인이라고 부르실 때가 있다. 그래서 간혹 영생이 행위에서 나온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그것은 영생이 행위의 결과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을 마침내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 의롭다 하시기 때문에(롬 8 : 30), 앞에 온 은혜를 다음에 온 은혜의 원인으로 만드신다 (21).

14. 앞서 살펴본대로 칼빈은 참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롭다 칭한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행실과 선행이 반드시 나타난다고 했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는 자들의 삶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행실과 선행의 열매가 맺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경륜의 순서 (즉, 구원의 순서) 상, 이런 선하고 거룩한 행위가 영생에 앞서 나타나야 하기 때문에, 영생이 행위에서 나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영생의 원인이 행위가 될 수는 없다. 효과인은 분명 하나님의 자비이며, 재료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이고, 도구인은 우리의 믿음 뿐이다. 그러나, 선한행위가, 영생으로 가는 길에 꼭 보여야 하는 열매이기 때문에 영생은 행위에서 나온다고도 말하여 질 수 있다는 것이다. 

C. 칭의론 비판에 답함 (III. 15-16장) 


1. 칼빈은, 개신교의 칭의론을 반대하는 카톨릭의 신학은 반-펠라기우스 주의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하면서도 인간의 행위를 인정하는 신학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만이 우리 구원의 시작이요 완성자이신데, 이런 점에서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을 감소시킨다. 믿음 보다는 선행의 가치를 높임으로써, 성경을 오해했는데, 심지어, 어거스틴까지도 선행이 자유의지로부터 오고, 그 후 공로를 이룬다는 생각은 분명 성경으로 부터 동떨어진 생각이라는 것이다. 이에 카톨릭 편에서 개신교의 칭의론을 반박하는 몇몇 중요한 논쟁점이 있었는데, 칼빈은 각각에 대해서 반론을 행사한다 (16장). 


첫째, 개신교의 칭의론은 선행을 말살 한다는 것이다. 


a. 행위를 철저히 배제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의가 믿음을 통해 전가됨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기에 일견 개신교의 칭의론은 선행을 말살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의 답변을 들어보자!

이렇게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이 선행에 대해서 얼마나 열성이 있는가 하는 것은 말하지 않으려 한다. 추악한 생활로 온 세계를 제 마음대로 더럽히면서도 이렇게 떠드는 그들을 우선은 내버려두겠다. 믿음을 찬양하면 행위의 가치가 낮아진다고 하면서 그들은 이 일을 슬퍼하는 체 한다. 만일 행위를 장려하며 강화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왜냐하면 우리는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이 없이 성립하는 칭의를 꿈에도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곧 믿음과 선행은 굳게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칭의는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

b. 여기에 칼빈의 그 유명한 이중은혜론 (duplex gratia)이 있다. 즉, 칭의와 성화는 함께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한 가지 은혜로 임한다: "그 둘은 서로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의를 받으면서 (칭의) 그의 거룩함 (성화) 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동시에 두 가지를 함께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한쪽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쪽도 있다" (1). 칼빈에 의하면 거룩함과 선행을 열매로 맺지 못하는 자는 결코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이다.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오히려 거룩함과 선행의 열매로 가득하니, 행위를 강조하면서 전혀 하나님 앞에 거룩하지 못한 카톨릭의 선행칭의론이야 말로 잘못된 것이다.

둘째, 개신교의 칭의론은 선행의 열망을 줄인다는 것이다. 

a. 선행과 칭의는 전혀 관계가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니, 선행의 열망을 전혀 자극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의 답변을 들어보자!


사람을 정녕 자극해야 된다면 우리가 구속과 부르심을 받은 목적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한 자극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주의 말씀이 이런 자극을 주는 예를 들어본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이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도 사악한 배은망덕을 폭로한다(요일 4 : 19,10 참조).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죽은 행실을 떠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히 9 : 14) (2)

b. 우리의 죄와 행위와는 별도로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시고 의롭다 칭해주신 은혜보다 더 감사한 것은 없다. 칼빈은 선행의 진정한 열망은,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치 않을 수 없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진정한 선행의 열망은 구원을 받기 위해 발버둥침이 아니라 이미 주신 구원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부터 오는 강력한 열망인 것이다. 구원에 대한 감사와 반응으로서의 순종과 선행의 가르침은 칼빈주의 개혁파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였음은, 칼빈 이후 이어진 17세기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셋째, 개신교의 칭의론은 죄를 더욱 짓게 한다는 것이다. 

a. 오직 믿음으로 죄사함과 칭의를 받으니 쉽게 죄를 짓고 죄사함을 구하게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카톨릭의 정밀하고 힘에 벅찬 보속과 면죄부 이론이 오히려 죄에 대해서 경각심을 주고 힘써 죄와 싸우게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칼빈의 답변을 들어보자!


우리는 죄의 용서가 너무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으로 값을 치를 수 없고 따라서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 밖에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에게는 값없이 오는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가장 거룩한 피를 흘리셔서 많은 값을 치르고 사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를 제외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만족시킬 만한 대속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배운 사람들은 자기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시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너무도 추악해서 이 가장 순결한 피의 샘이 아니면 깨끗해질 수 없다. 이 사실을 듣는 편이 선행을 뿌림으로써 깨끗해진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사람들의 마음에 죄를 무서워하는 생각을 더 많이 일으킬 것이 아닌가? 또 다소라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 번 깨끗함을 얻은 후에 다시금 진흙탕에 뒹굴어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이 샘의 순결을 흐리게 하며 더럽히는 것을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4)

b. 칼빈의 답변은 간단하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부터 받은 죄사함과 칭의의 은혜는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핏값을 주고 받은 한량없는 은혜의 선물인데, 그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주님의 공로를 알고 어찌 다시 죄를 지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주님의 죄사함의 은혜를 진정으로 체험한 사람이라면 결코 함부로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칼빈의 생각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죄사함의 은혜를 받은 자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으니 다시 죄를 범하자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말씀한 부분과 상통한다. 참 은혜는 죄에 대한 심각성을 더욱 깊이 자각하고 죄를 더욱 멀리하게 한다.


D. 칭의를 받은 신자들의 선행 (17-18장)

1. 루터가 처음 이신칭의의 가르침으로 종교개혁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믿음과 행위에 대한 수 많은 논쟁과 오해가 있었다. 심지어 현재까지도 개신교 진영 내에는 행위를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듯 논쟁은 진행중이다. 최소한 이신칭의 신학의 대변자였던 루터가 신자의 선행을 그 누구보다 강조하며 독려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으며, 칼빈은 신자의 선행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체계적으로 가르치는데 - 예를들어 율법의 제3용법 이라는 독특한 개혁파 원리를 제시했을 뿐 아니라 출애굽기부터 신명기에 이르는 방대한 율법주석서를 사역의 정점에서 편찬한 것을 들어 알 수 있는데 - 기독교강요 III권의 이 부분에서 잘 정리를 하고 있다.


2. 기본적으로 칼빈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기준점을 율법으로 잡는다. 이점에서 칼빈에게 율법은 죄를 죄되게 하는 부정적인 기능으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된다고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율법의 제3용법). 


우리가 율법의 권능으로부터 자유한 것은 죄를 맘대로 짓는 육체적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는 영적 자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되, 정죄함 없이 율법을 성취하게 된다.... (물론) 율법의 성취는 우리의 행위로 가능하지 않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죄사함을 받을 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 (율법이 요구하는) 까지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게 된다 (17.3)

3. 여기에 소위 칼빈의 이중칭의 (double justification) 론이 나타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불완전한 행위까지도 결국에는 의롭다 칭해주시는 은혜이다. 우리의 불완전한 행위까지도 온전한 행위로 의롭게 받아주시는 은혜가 있기 때문에, 율법을 문자 그래도 완벽하게 지키는 것에서 자유롭게 되며, 다만 그 정신을 따라 행할 때 선하시고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온전한 행위로 받아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종들의 행위를 보시지 않고-그들의 행위는 언제든지 칭찬보다 책망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을 포용하시며, 행위와 관계없이 다만 믿음의 중재에 의해서 그들을 자기와 화해시킨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의 가치를 고려하시지 않고 다만 그의 아버지 같은 너그러우심과 선하심으로 우리의 행위를 영광의 자리에 끌어올리시며 다소의 가치를 인정하신다. 셋째 이 행위들은 모두 부패한 것이어서 덕이라기보다 죄라고 인정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불완전한 점을 보시지 않고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 (3)

4. 이렇게 칼빈은 거듭나고 칭의를 얻은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지만 힘써 율법에 순종하며 선행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의로운 행위로 받으실 뿐 아니라 칭찬과 상급 (영생) 까지 내려주신다고 주장한다. 물론 칼빈은 신자가 결코 율법을 온전히 행하여 행위의 의로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전면 부인한다. 그러나, 믿음의 칭의를 이룬 후에는 신자의 행위가 큰 의미를 갖고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으며, 행위로서 도리어 믿음까지 강화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만일 행위에 의한 의가 그 성격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인정되든지 간에 이신칭의 이후에 얻게된 의라면, 이신칭의는 이 관계로 인해서 약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더욱 강화되며 그 힘은 더욱 강력하게 빛나게 된다. 또 우리는 값없이 주시는 칭의를 얻은 이후에 따르는 행위를 중시해야 한다 (9).
   
5. 이런 점에서, 칼빈은 논란이 되었던 야고보와 바울의 주장 - 믿음으로 의롭게 되느냐 행위가 있어야 의롭게 되느냐  - 는 모순이 아니라, 믿음으로 칭의 받은 신자라면 바른 행실을 통해 그 믿음이 참된 믿음임을 증명해야 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가르침을 확인한다. 바울의 칭의는 의롭다 칭함을 받는 방법을 말함이며 야고보의 칭의는 칭함 받는 믿음의 결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a. 사실, 바울이, 율법 없는 칭의를 설파하였지만, 칭의 받은 신자의 삶을 이야기 할 때는 늘, 부르심에 합당한 삶 (엡 4:1) 을 역설한다 (율법을 성취하는 삶으로 돌아감 – 경우에 따라서는 율법 자체를 인용하여 성취를 말함).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이의 참 믿음을 선행으로 보여줄 것을 역설하는 야고보와 바울의 가르침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둘을 혼합하여 선행으로 칭의를 받는다고 말하는 카톨릭 보다는, 바울과 같이 믿음으로 칭의를 받고 그 칭의가 성화로 반드시 나아감을 역설하는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적이라 하겠다.

b. 칼빈은 신자가 선을 행하되 이 땅에서는 결코 완전한 순종과 선행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롬 7장, 노아의 예).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선행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하나님께서 "보상" (reward) 하신다고 말한다. 칼빈은 보상 자체가 은혜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보상은 죄사함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중은혜론에서 언급했지만, 하나님의 칭의는 우리의 행위에도 전가된다. 우리의 행위가 불의하고 온전치 못하여도 하나님은 결국 그 행위를 의롭다 칭하시며 받아주신다. 그러므로, 신자의 선행은 결코 의미없이 잃어버려지지 않는다. 신자가 힘써 선을 행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III. 나가는 말


칼빈주의 개혁파 칭의론은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를 받아들이되 신자의 거룩한 행실과 선행을 독려하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칭의론으로서 개신교 신학의 백미라 할 것이다. 칭의를 실제적으로 의롭게 되는 성화와 구분하지 못한 어거스틴 신학과 공로주의로 전락한 스콜라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칼빈은 루터로부터 시작된 이신칭의의 교리를 더욱 명확히 하고 정교히하여, 성화의 교리와 구분하되 하나의 은혜로 연결시킴으로써, 독특하고 경건한 개혁신학의 칭의론을 정립했다고 할 수 있겠다. 오직 성화의 열매를 맺는 자들만이 칭의를 확신할 수 있으며, 칭의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과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거룩한 행실과 선행이 없는 자들은 모두 말뿐인 믿음이며 위선자들로 결코 칭의나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칼빈의 지적은 작금의 개혁교회 성도들에게 벼락같은 울림이 된다 하겠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50개(1/3페이지)
조직신학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50 NT Wright의 신학적 기여와 그 문제점 이승구 교수 無益박병은목사 550 2020.12.03 21:50
49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읽는 존 칼빈의 "영혼의 깨어있음에 관하 無益박병은목사 3257 2018.10.25 15:35
48 박영돈 교수와 예장 고신의 성령론의 변화 고경태박사 無益박병은목사 4653 2017.12.24 23:22
47 무천년설의 개혁신학적 타당성 無益박병은목사 6000 2017.10.28 00:32
46 <개혁주의신앙강좌> 개혁교회의 성만찬에 대한 이해 이남규목사 無益박병은목사 4445 2017.10.26 17:52
45 믿음을 얻는 10 단계 윌리암 퍼킨스 無益박병은목사 5254 2017.05.04 11:45
44 율법의 세가지 용법 권호덕교수 無益박병은목사 6114 2017.04.04 12:05
43 "칭의와 성화" 개념에 대한 이해 노승수 목사 無益박병은목사 6539 2017.02.02 16:58
42 삼위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 김병훈목사(조직신학,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無益박병은목사 6784 2016.07.23 19:16
>> 칼빈의 칭의론 신동수 목사 사진 無益박병은목사 7299 2016.04.18 17:03
40 Jonathan Edward 속죄론 (Atonement) 연구 박재 無益박병은목사 7915 2016.03.01 01:08
39 바빙크의 종말론 요약 無益박병은목사 8010 2016.01.30 18:46
38 하나님의 예정과 구원의 신비 황대우 목사 無益박병은목사 7198 2015.10.21 16:07
37 천주교와의 교류 및 영세에 대한 우리의 이해 박동근목사 無益박병은목사 8416 2015.09.19 19:04
36 17세기 개혁신학내에서 일치된 은혜언약 교리 배현주 목사 無益박병은목사 7657 2015.07.25 01:56
35 그리스도는 택자를 위하여 죽으셨다. 김영규목사 無益박병은목사 8240 2015.04.07 17:35
34 Karl Barth의 신학과 그에 대한 개혁신학적 비판 한상호 無益박병은목사 9675 2015.02.26 05:15
33 개혁신학과 복음주의 연관성 Richard Gamble 번역 안명준 교 無益박병은목사 10488 2014.12.07 12:07
32 퓨리탄과 에드워즈의 모형론적 해석과 한국교회 정성욱 교수 無益박병은목사 13843 2014.11.07 23:56
31 성례에 대하여: 어떤 떡과 포도주를 사용할 것인가? 이성호 목사 고려신 사진 無益박병은목사 8764 2014.11.06 1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