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athan Edward 속죄론 (Atonement) 연구 박재은 목사

無益박병은목사 | 2016.03.01 01:08 | 조회 7905
이 글은 개혁신학회에서 박재은 목사가 발표한 논문이다. 당대 최고의 부흥사이며 학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속죄론을 연구한 논문이다. 그의 속죄론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속죄 사상과 설교에 나타나는 속죄사상과 어떻게 다른지 이 논문을 통해 확인하고 비교할 수 있다. 

1 들어가는 말

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1703-1758)의 속죄론에 대한 연구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을 주축으로 연구되었다. 

첫째, 제임스 카스 (James P. Carse), 조셉 윌리암슨 (Jeseph C. Williamson), 마이클 부쉬 (Michael Bush), 로버트 젠슨 (Robert W. Jenson)등에 의해 차용된 가장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방법으로써 에드워즈의 속죄론을 그의 기독론 전반을 살피는 가운데 한 요소로서 연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카스와 윌리암슨의 박사논문은 직접적으로 에드워즈의 속죄론을 다루기보다는 속죄론 자체를 에드워즈 기독론의 중요한 측면 중에 하나로 언급하였다. 
 
특별히 윌리암슨은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만족설(satisfaction theory)의 문맥 하에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active obedience)을 에드워즈 기독론의 중심사상 중 하나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연구동향 하에서는 에드워즈의 속죄론 자체가 기독론의 가장 우월한 중심사항으로 자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기독론적 요소들, 예를 들면, 로고스 기독론 (Logos Christology) 혹은 속성 교류(communicatio idiomatum) 등과 동등한 자리로써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두 번째 연구 방법은 콘라드 체리 (Conrad Cherry), 다니엘 팔스 (Daniel L. Pals), 존 거스트너 (John H. Gerstner), 스티븐 홈스 (Stephen R. Holmes), 마이클 맥클라이몬드 (Michael J. McClymond), 제랄드 맥더모트 (Gerald R. McDermott) 등에 의해 행해진 연구 방법으로써 에드워즈의 속죄론을 에드워즈의 전반적인 신학적 사상 가운데서 고찰하거나, 혹은 당시의 시대적, 역사적 상황과 결부시켜서 연구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거스트너가 에드워즈 신학사상을 전반적으로 재구성할 때, 에드워즈의 속죄론 또한 중요한 신학적 요소 중 하나로 포함시켜 재구성한다. 최근에 맥클라이몬드와 맥더모트도 에드워즈의 전반적인 신학을 소개하는 가운데 속죄론을 짧게 언급하기도 하였다. 체리 같은 경우엔 에드워즈의 속죄론을 “믿음” (faith)이라는 특징적인 신학적 주제 안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고, 홈스 같은 경우엔 “하나님의 영광” (glory of God)이라는 주제 안에서 에드워즈의 속죄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팔스 같은 경우엔 역사적 맥락 하에 에드워즈의 속죄론을 간접적으로 재구성하여 대각성 운동 (the Great Awakening)의 빛 아래서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두 번째 방법론은 첫 번째 방법론과 다르게 좀 더 넓은 시각 하에서 에드워즈의 속죄론을 여러 신학적 스펙트럼 가운데서 혹은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고찰하는데 집중함을 볼 수 있다. 

세 번째 방법은 에드워즈의 속죄론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두루 널리 쓰이는 비교 분석 방법이다. 이러한 비교연구 방법은 에드워즈 팍(Edwards Amasa Park), 랄프 하폴 (Ralph O. Harpole), 도러스 루디실 (Dorus P. Rudisill), 조지 마스덴 (George M. Marsden), 마이클 진킨스 (Michael Jinkins), 브루스 스티븐스 (Bruce M. Stephens), 더글라스 스위니 (Douglas A. Sweeney), 올리버 크리습 (Oliver D. Crisp) 등이 차용했던 방법으로써, 에드워즈의 속죄론과 다른 인물들의 속죄론을 비교 분석 연구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비교연구는 총 세 가지의 세부적인 방법으로 다시 구분지어 볼 수 있겠는데, 첫째, 에드워즈의 속죄론과 그의 신학적 상속자들 (예를 들면, 조나단 에드워즈 주니어 (Jonathan Edwards Jr.), 조셉 벨라미(Joseph Bellamy), 사무엘 홉킨스 (Samuel Hopkins), 스티븐 웨스트 (Stephen West), 존 스몰리 (John Smalley) 등)의 속죄론과 신학적 연속성 혹은 비연속성을 찾는 방법 (팍, 루디실, 스티븐스, 스위니의 방법), 
 
둘째, 에드워즈의 속죄론을 뉴 잉글랜드 새 학파 (the New School Theology 혹은 the New Divinity Theology)의 점진적인 역사적 흐름 가운데서 비교분석하는 방법(하폴과 마스덴의 방법), 셋째, 알미니안-그로티안 속죄론을 칼빈주의-에드워디안 (Edwardean) 도덕 통치론과 비교 분석하는 방법이 그것들이다(크리습의 방법). 그러나, 이처럼 다양성이 공존하는 에드워즈 속죄론 연구 방법들 가운데서도, 아무도 에드워즈의 속죄론을 효율적인 해석학적 도구 (tool)인 “객관적 속죄” (objective atonement) 그리고 “주관적 속죄” (subjective atonement) 측면의 빛 아래서 연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새롭다. 사실 교회 역사 가운데서 벌어진 수많은 속죄론 논쟁들은 “객관적 속죄”와 “주관적 속죄”의 관계성에 대한 의식 부재, 혹은 두 컨셉 사이의 상이한 대립, 혹은 둘 중에 하나를 불필요한 것으로 보는 불균형적인 시각에 의한 결과로 빚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고는 에드워즈의 속죄론을 “객관적 속죄”와 “주관적 속죄”의 해석학적 틀 가운데서 과연 에드워즈는 이 두 측면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상정하여 살펴볼 것이다. 특별히 에드워즈의 신학적 상속자들 가운데 하나인 스티븐 웨스트 (Stephen West, 1735-1819)의 속죄론과 에드워즈의 속죄론을 비교분석함으로써 에드워즈 속죄론이 웨스트의 속죄론과는 다르게 객관적, 주관적 속죄의 균형성을 잘 유지하고 있음을 살펴볼 것이다. 
 
즉, 웨스트의 속죄론은 형벌론 (penal theory)과 그로티안적 도덕 통치설 (Grotian moral government theory)이 변칙적으로 섞임으로 객관적 속죄와 주관적 속죄의 균형이 깨지고 있음이 드러날 것이고, 이와 반대로 에드워즈의 속죄론은 객관적 속죄 측면으로 만족설 (satisfaction theory)과 형벌 대리설 (penal substitution)이 순수한 의미로서 존재하고, 주관적 속죄 측면으로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unio cum Christo)의 모티브가 그리스도의 속죄 가운데서 중요하게 작용함으로써 두 측면 간의 균형이 잘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2 에드워즈와 웨스트의 속죄론에 나타난 객관적 속죄의 측면

“객관적 속죄”의 측면이라고 함은 인간의 반응 혹은 행동과는 분리된 속죄를 위한 신적 거래 혹은 관계를 뜻한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우선적 효과는 하나님 자신 안에서의 원리를 만족하기 위함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인간보다는 하나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객관적 속죄 측면이 가장 잘 드러난 속죄론으로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신적 관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만족설”과 “형벌대리설” 등이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객관적 속죄론들은 어떻게 그리고 무엇에 의해 하나님의 “정의” (justice) 혹은 “명예” (honor)가 만족될 것인가에 의해 그 정체성이 구분된다. 아퀴나스는 “정의” 개념을 3가지로 구분한다. 
 
쌍무 교환적 (commutative), 처벌적 혹은 형벌적 (punitive), 그리고 일반적 혹은 공공적 (general or public) 정의가 바로 그것들이다. 예를 들면, 만약 하나님의 정의가 빚 (debt)에 대한 지불로 인해서 만족되어진다면 그것은 쌍무 교환적 정의가 만족되는 것이므로 안셀름의 만족설에 가깝다. 만약 하나님의 정의의 만족이 인간 대신에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근거한다면, 그것은 형벌 대리설에 가깝고 형벌적 정의가 만족되는 것이다. 또한, 만약 신적 도덕성과 그 도덕적 권위를 통해서 정의가 바로 세워진다면 그것은 그로티우스의 도덕 통치설과 가깝고 결국 일반적 혹은 공공적인 의미로써의 정의가 만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3가지 정의 구조 가운데서 어떤 정의의 만족이 에드워즈의 속죄론에 강하게 드러나게 되는지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2.1 에드워즈의 속죄론: 만족설과 형벌 대리설의 조합

첫째, 에드워즈의 객관적 속죄론 측면에서 “쌍무 교환적 정의”가 만족되는가? 비록 에드워즈는 속죄론에 대해 조직신학적인 글을 체계적으로 기술하지 않았지만, 그의 개인적인 노트의 모음집인『메모 선집』(Miscellanies)에서 어느 정도 속죄론에 대한 그의 견해가 드러난다. 특별히 에드워즈는『메모 선집』에서 쌍무 교환적 정의에 근거한 만족설을 활발히 전개해 나가고 있고, 이러한 에드워즈의 글들은 핸드릭슨 버전 편집자에 의해「죄의 만족에 대한 기독교 교리의 필요성과 합리성에 관하여」(Concerning the Necessity and Reasonableness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Satisfaction for Sin) 라는 타이틀로 모아져 재편집되었다.
 
「죄의 만족」에서, 에드워즈의 속죄론은 쌍무 교환적 정의의 만족에 근거한 만족설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정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빚 갚음을 통해서 완전히 만족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에드워즈는 쌍무 교환적 정의에 근거한 만족설을『구원의 일에 대한 역사』(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에서도 자세히 기록한다. 
 
에드워즈는 말하길,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지불된 값에 의해 이룩되었다. 그리스도에 의해 지불된 값은 두 가지를 함축한다. 첫째, 그리스도는 우리가 갚아야만 하는 빚을 청산해주었고 그것에 의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내적인 동의를 만족시켰다. 둘째, 그리스도에 의해 지불된 값은 우리에게 행복을 선사해주었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랑이다. 그리스도의 만족은 우리를 고통에서 구원하는 힘이 되고,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우리는 비로소 행복을 소유 할 수 있게 된다.

즉, 에드워즈의 쌍무 교환적 정의 만족은 2가지 측면을 함축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 단순히 우리의 빚만 청산된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한 하나님의 불명예 또한 완전히 회복된 것이다. 또한『메모 선집』의「Nos. 912, 기독 종교, 법적 희생, 만족의 필요성」(Christian Religion, Legal Sacrifice, the Necessity of Satisfaction)에서 에드워즈는 속죄론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으로써의 “지불”에 대한 아이디어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기록하길, 죄에 대한 속죄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이것은 곧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희생 자체가 속죄를 위해 꼭 필요함을 뜻하며, 하나님은 이 외에 다른 수단을 선택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아무런 대가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속죄는 속죄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속죄는 지불 (payment)과 만족 (satisfaction)이 가장 기본적인 개념으로 포함되어 있다. 만약 지불이나 만족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면, 즉 속죄를 위해 어떤 대가도 필요하지 않다면, 하나님은 결국 어떠한 속죄 없이도 죄를 용서하는 분이 될 것이다.

결국, “빚-지불 구조” (debt-payment structure)는 에드워즈의 속죄론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뿐 아니라 에드워즈는 “후견인-피후견인 비유” (patron-client analogy)에 근거한 관계적 용어를 사용해서 속죄론을 전개해나가기도 한다. 에드워즈는 기록하길, 속죄론 가운데서 하나님은 완전한 의미로서의 후견인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인간 [피후견인]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에게 그의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지원”하시기 때문이다. 
 
완전한 후견인으로서의 그리스도는 피후견들을 위해 구원을 구입 (purchased) 하신다. 에드워즈는 기록하길, 비록 수많은 것들이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고, 수많은 희생들이 제공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구원 사역 없이는 어떠한 구원도 우리에게 구입 (purchased) 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어떤 구원도 우리의 것이 되지 못했고, 구원을 위해 어떤 값의 지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심을 통해서 드디어 [구원의] 구매는 시작되었다. 
 
성육신하심과 우리의 구원의 대가에 대한 지불은 이렇듯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상업적 언어 혹은 후견인-비후견인 구조에 근거한 빚-지불 구조는 하나님의 쌍무 교환적 정의를 만족하는데 있어서 굵은 뼈대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뼈대 위에서 속죄론을 전개한 에드워즈의 속죄론은 안셀름의 만족설을 근본적으로 지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그렇다면 에드워즈의 속죄론에서 “쌍무 교환적 정의” 뿐만 아니라 “형벌적 정의”도 만족되고 있는가? 대답은 긍정적이다. 만약 쌍무 교환적 정의가 만족되기 위해 만족설이 전개되었다고 본다면, 형벌적 정의는 형벌 대리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죄는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 이유는 죄는 그렇게 처벌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무한한 형벌로 처벌하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대항함으로써의 모든 죄는 무한하게 악랄하고 극악무도한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러한 죄는 무한한 경멸과 무한한 혐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 속죄론의 출발점은 죄와 그 결과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무한한 혐오와 경멸의 대상인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오로지 완전한 하나님임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에드워즈는 고백한다. 에드워즈는 강조하길,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고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전가된 죄가 탕감된다. 즉,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인간들은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었고, 동시에 하나님의 형벌적 정의 또한 만족되게 된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속죄론 구조는 법정 프레임에 근거한 형벌 대리설의 대표적 모델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이러한 법정 구조 즉, 전가 (imputation)와 대리(substitution)의 모티브는 “대단히 이성적인 구조”일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며 자연적인 인간적 센스”에 기초 하고 있다. 그 이유는 형벌 대리설은 하나님의 신적 본질인 “합리성” (rationality)에 그 기초를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죄에 대한 형벌과 처벌의 필연성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 즉, “거룩성” (holiness)에 근거하고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거룩성은 죄에 대한 반감의 근거이며, 거룩성의 한 부분으로서의 정의는 죄와 형벌의 분리에 대한 반감의 근거이다. 이처럼, 에드워즈의 속죄론은 형벌 대리설의 핵심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즉 형벌적 정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고통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현실화될 때 비로소 만족된다. 

셋째, 에드워즈는 도덕 통치설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 (definition) 즉, “우월한 도덕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이 인간 세상 전반을 통치하신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온 세상의 가장 우월한 통치자로서 그의 권좌는 하늘에 있는 분”이다. 또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도덕 통치 가운데 거하는 도덕 주체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도덕 주체들을 위해 하나님은 법을 제정하셨다”라고 설명한다. 
 
에드워즈는 강조하길 법은 반드시 거룩해야 하며, 만약 그 법들이 부도덕한 주체들에 의해 그 거룩성이 침해 받을 경우 반드시 그러한 위협은 제거되어야 마땅하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이처럼 에드워즈의 기본적인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전제들은 그로티안적 도덕 통치설에서 주장하는 하나님의 본질과 크게 유사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와 연관되어 전개되는 에드워즈의 속죄론까지 도덕 통치설의 아류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이유는 에드워즈는 도덕 통치설의 전제들과 비슷한 전제가 내포된 글을 속죄론 맥락에서 썼다기보다는 속죄론의 맥락과는 약간은 동떨어진 다른 주제들 가운데서, 예를 들면, 윤리/도덕적 글들 가운데서, 혹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설교들 가운데서, 혹은 신론을 전반적으로 전개할 때 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에드워즈는 우월한 도덕적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의 속성을 여러 글들에서 기록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도덕 통치론처럼 일반적/공공적 정의를 만족시키는 방향성을 담지한 채 속죄론으로 발전되는 것이 아니다. 즉 에드워즈의 속죄론에서는 확실히 일반적/공공적 정의의 만족에 대한 강조보다는 쌍무 교환적 정의나 형벌/처벌적 정의 만족에 대한 강조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3가지 유형의 정의 만족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에드워즈의 객관적 속죄는 만족설 (쌍무 교환적 정의 만족)과 형벌 대리설 (형벌/ 처벌적 정의 만족)이 에드워즈 속죄론의 중심축을 차지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만족설과 형벌 대리설에 근거한 에드워즈의 객관적 속죄 측면은 궁극적으로는 인간 정의를 만족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하나님의 불명예와 망가진 정의를 회복하는데 그 초점을 두고 있다. 만족설과 형벌 대리설 구조 하에서는 인간의 역할이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에 더 큰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인간의 빚을 대신 지불하는 그리스도, 또한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형벌을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깨어진 명예, 거룩, 정의가 만족되는 그림이 객관적 속죄 구조 안에서 만족설과 형벌 대리설의 모습으로 투영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만족설과 형벌 대리설에 근거한 에드워즈의 객관적 속죄론의 그림은 그 색채가 대단히 선명하다. 

2.2 웨스트의 속죄론: 형벌 이론과 통치 이론의 조합

『자세한 분석으로 제안된 성경적 속죄 교리』(The Scripture Doctrine of Atonement, Proposed to Careful Examination, 1785)에서 웨스트는 그의 속죄론을 다양한 측면 하에 기술한다. 즉, 그의 속죄론은 여러 속죄론의 부분 부분들이 대단히 절충적으로 융합되어 표현되고 있다. 웨스트는 형벌대리설적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속죄를 기록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를 선언하고 화해를 제창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의의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죄가 속죄되는 것이고, 죄 사함이 준비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 중 하나는 하나님의 의는 처벌과 위협적인 형벌로 인해 선언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결국 하나님의 자비가 드러난다.

즉, 형벌과 속죄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 강조된다. 웨스트는 첨언하길, 하나님의 법 안에서 죄는 “우리로 하여금 형벌의 의무 안에 굴레 짓는다.” 웨스트에게 있어서, 형벌이 필수적인 이유는 “만약 죄를 향한 어떠한 형벌도 부과되지 않는다면, 아무도 하나님의 도덕 통치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칼, 신적 정의의 칼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웨스트는 강조한다.

이처럼, 웨스트의 속죄 언어는 명백하게 “형벌” 이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형벌 이론에 근거한 웨스트의 속죄론이 과연 “형벌 대리설”인가 아니면 단순히 “형벌”이론에 그치는가를 결정하기에는 약간 모호한 점이 있다. 물론 형벌 이론 자체가 대리/대속 (substitution) 개념을 기본적으로 내포하고 있지만, 웨스트의 형벌 이론은 대리/대속 개념과 같이 발전한다기보다는 궁극적으로는 다른 관점을 그보다 더 강조하면서 전개해나간다. 이러한 점에서, 웨스트의 속죄론을 형벌 대리설이라고 단정하여 규정하기에는 여전히 모호하다. 즉, 웨스트는 계속적으로 강조하길,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난은 결정적으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불쾌감의 생생한 실연 (demonstration)”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웨스트의 속죄론의 핵심이다. 
 
부연하길,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죄를 향한 그의 결정적인 불쾌감을 무한하게 표현하신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마치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지 않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죄인들을 용서하거나 구원하신다면, 혹은 죄인들을 향해 무한한 불쾌감을 표현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법의 명예는 지켜지고, 죄인들도 구원 받을 수 있게 된다.

즉, 웨스트의 궁극적인 관심은 그리스도가 인간들을 대신해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불명예와 비정의가 회복되거나 만족 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향한 하나님의 신적 불쾌감이 표현되는 것, 바로 그것 자체에 있다. 그러므로, 비록 웨스트의 속죄론 안에서 형벌이론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드워즈처럼 그것에 의해 형벌/처벌 정의가 만족되는 것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웨스트 속죄론의 무게중심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그의 혐오를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인간에게 투영하셨다라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즉 하나님 스스로의 생각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인간들에게 나타나고, 드러나고, 표현되고, 투영되는 것이 속죄론의 핵심이지, 그것에 의해 어떤 하나님의 정의 (justice)가 만족될 것인가는 후차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웨스트의 속죄론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죄에 대한 불쾌감의 표현과 그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과 교훈에 더 큰 무게중심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형벌이론과 모범 통치설이 약간은 변칙적으로 융합된 속죄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웨스트에게 있어서, 속죄는 단순히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불쾌감과 혐오가 투영된 유리 (glass)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인들을 통치하시는 도덕 통치자로서의 자아발현의 의미도 존재한다. 이런 측면에서 웨스트의 속죄론은 형벌/처벌적 정의나 쌍무 교환적 정의 만족 보다는 일반/공공적 정의 만족에 궁극적인 관심이 있다. 즉, 웨스트는 에드워즈가 강조했던 빚-지불 구조나 후견인-피후견인 구조에 나타난 상업적 내러티브 혹은 쌍무 교환적 구조나 혹은 법정적 형벌에 근거한 대리/ 대속 속죄의 구조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과론적으로 웨스트의 속죄론은 그로티안적 통치설과 그 구조와 내용이 매우 유사하다. 즉, 그로티우스가 강조했던 것처럼 웨스트도 견지하길,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인간의 죄를 처벌하고 이를 위해 그리스도가 대리 형벌을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심각성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감이 인간들에게 표현되는 것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

비록 웨스트의 속죄론 가운데 형벌 이론을 중심으로 객관적 속죄의 측면이 명백하게 존재하기는 하나, 이 객관적 속죄의 측면은 그로티안적 도덕 통치설과 변칙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결국 에드워즈처럼 쌍무 교환적 정의를 만족하거나 형벌/처벌적 정의를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객관적 속죄의 측면이 점차로 주관적 속죄의 측면으로 기울어 가는 결과를 동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반/공공적 정의 만족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의 만족을 낳는다기보다는 인간에게 궁극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웨스트의 객관적 속죄 측면은 에드워즈의 것처럼 그 색깔이 선명하지 않다. 궁극적인 속죄의 과정과 결과가 주관적 속죄 측면으로 대부분 환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2.3 에드워즈와 웨스트의 객관적 속죄 측면에 대한 평가

에드워즈의 속죄론을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도 에드워즈의 속죄론이 만족설 만을 지지하고 있는지 혹은 형벌 대리설 만을 지지하고 있는지 혹은 두 개를 동시에 지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견차이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루디실, 거스트너, 맥클라이몬드, 그리고 맥더모트 등은 대체적으로 에드워즈는 만족설과 형벌 대리설을 동시에 취하고 있음과 동시에 때때로는 다른 속죄 이론들 (도덕 감화설이나 모범 통치설 등)의 내용도 어느 정도는 차용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 대표적으로 크리습은 주장하길, 비록 에드워즈의 속죄론은 형벌 대리설을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 만족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앞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에드워즈의 속죄론은 쌍무 교환적 정의와 형벌/처벌적 정의의 만족 둘 다를 강조하고 있으므로, 비록 다른 속죄 이미지가 투영되긴 하지만, 그의 속죄론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두 기둥은 만족설과 형벌 대리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에드워즈의 속죄론은 기독교강요와 칼빈의 주석들에서 나타난 속죄론과 그 성격이 유사하게 보인다. 
 
로버트 피터슨 (Robert A. Peterson)에 의해 설득력 있게 주장된 것처럼, 칼빈은 “한 두 개의 속죄 이미지로 그리스도의 속죄를 제한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그리스도 사역의 효과성을 넓은 의미 안에서 이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속죄교리는 대부분 두 가지의 속죄 언어로 이해되는데 그것은 바로 “만족”과 “형벌 대리” 언어라고 피터슨은 주장한다. 그러므로 칼빈 속죄론의 두 기둥 구조와 에드워즈의 두 기둥 구조는 그 사상적, 신학적 맥락이 일치한다. 

객관적 속죄의 측면에서 볼 때, 만족설과 형벌 대리설의 두 기둥 위에서 있는 에드워즈의 속죄론은 순수한 의미로서의 객관적 속죄 측면이 여실히 잘 드러나 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즉, 어떠한 주관적 속죄의 요소가 섞이지 않고 속죄의 관심이 철저히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향하여 있다. 다시 말하면 근본적으로 만족설은 죄의 결과로 낳아진 하나님의 불명예가 회복되기 위함이고, 형벌 대리설은 하나님의 정의와 거룩함이 회복되기 위함인 것이다. 
 
에드워즈의 빚-지불 구조 모티브와 정의롭고 의로운 판단자 되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회복되는 법정 관계 모티브 속에서는 엄밀히 말하면 인간의 반응이나 행동을 위한 독립적인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존 버제스 (John P. Burgess)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주관적 속죄 측면으로서의 인간의 행동이나 반응은 객관적 속죄 사역이 완성된 후에 혹은 객관적 속죄 측면에 근거하여 그 공간이 확보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에드워즈의 객관적 속죄는 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주관적 속죄의 측면과 그 본질 자체가 섞이거나 혹은 도리어 잠식당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순수한 의미로서의 객관적 본질을 고수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에드워즈와는 달리, 웨스트의 객관적 속죄 측면은 그의 변칙적인 속죄 구조로 인해 그 순수함을 유지하지 못했다. 즉, 비록 웨스트는 대리 (substitution)와 전가 (imputation) 언어를 어느 정도 사용하여 속죄 이론을 전개하고는 있지만, 그의 속죄론의 대부분은 그로티안적 혹은 통치설적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그 결과, 웨스트는 형벌론과 모범 통치론을 섞어서 자신의 속죄론을 전개해나감으로 결국 속죄론의 최종 결과는 하나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기보다는 인간에게 우선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만들었다. 
 
이런 측면에서 웨스트의 객관적 속죄의 측면은 순수한 의미로서의 객관적 본질을 잃게 되고 결국 주관적 측면의 강조로 해석학적 무게 중심이 옮겨 가게 된다. 즉, 객관적 속죄의 측면이 주관적 속죄의 측면에 의하여 잠식당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물론 스위니가 지적한 것처럼, (웨스트를 비롯한) 에드워즈의 신학적 상속자들의 속죄론의 전반적인 신학적 경향성은 전통 칼빈주의 속죄론에서 인간의 역할이 너무 부재한 것이 아닌가라고 하는 자아 신학적 성찰과 비판 가운데 비롯한 신학적 반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속죄론 안에서 인간의 반응과 영향은 주관적 속죄 측면에서 다루어야 할 부분이지, 주관적 속죄 측면이 객관적 속죄의 측면의 공간 안으로 침투하여 그 영향력을 과시할 부분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에드워즈와는 다르게 웨스트의 객관적 속죄의 측면은 어느 정도 균형점을 상실했다. 

3 에드워즈와 웨스트의 속죄론에 나타난 주관적 속죄의 측면 

“주관적 속죄”의 측면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속죄사역의 관심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아벨라드와 소시니언들이 강조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주로 하나님의 신적 사랑의 완전한 모델로서 기능하며, 결국 이러한 완전한 사랑의 모델은 인간들에게 도덕적 반응점과 적용점을 제공한다. 즉, 주관적 속죄의 측면에서는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간의 법정 정의 관계나 불명예를 해소시키는 만족이 중요하다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한 인간 본성의 변화와 반응이 궁극적으로 더 중요한 것이다. 

앞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에드워즈의 객관적 속죄 측면은 빚-지불 구조와 후견인-피후견인 구조 혹은 정의로운 법관의 정의나 거룩성이 만족되는 속죄의 객관적인 측면이 순수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그의 속죄론은 주관적 속죄의 측면이 결여된 딱딱하고 객관적, 정적인 구조의 속죄론이라고 비판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속죄론이 순수한 의미로서의 객관적 본질을 그대로 유지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주관적 속죄 측면을 무시하거나 거부했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에드워즈의 속죄론은 이 두 가지 측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즉, 에드워즈의 속죄론에서 주관적 속죄의 측면은 객관적 속죄의 측면보다 결코 덜 중요하거나 그 의미 자체가 저평가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3.1 에드워즈의 주관적 속죄 측면: “그리스도와의 연합” (unio cum Christo) 

에드워즈의 주관적 속죄 측면은 대표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객관적, 주관적 속죄의 측면이 완성된다. 에드워즈의 주관적 속죄 측면으로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은 스스로 독립적으로 구성되어 실행되지 않는다. 오히려 객관적인 속죄 측면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구성된다. 
 에드워즈는 말하길, 이 개념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나와는 다른 또 하나와의 관계이며 다른 사람을 위한 대속의 근거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의가 주입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마치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을 통해서 결국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신한다는 것에 대한 근거가 되며, 또한 남을 위해 대속한다는 것의 근거이기도 하다. 이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것에 대한 근거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객관적 속죄 혹은 법정 관계 속에서의 중요한 요소였던 대리와 전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유기적 관계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 자체가 객관적 속죄 측면의 본질 자체를 침해하거나 무너뜨리지 않는다. 대신에 이 개념은 방법론적으로 후견인 (그리스도)과 피후견인 (인간)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감당한다. 즉, “후견인의 마음이 피후견인의 마음과 연결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피후견인의 마음도 후견인인의 마음으로 반드시 연결 된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이러한 연합은 단순히 일방적이고 단독적인 연합이 아니라, “상호 연합” (mutual union)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와 인간들의 상호 연합을 통해, 후견인으로서의 그리스도는 피후견인에 대한 “수호자, 구원자, 인도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결국 피후견인이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호 연합의 근원은 어디이고 무엇인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상호 연합의 근원은 바로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과 “연민”이다. 에드워즈는 말하길, 구원의 예정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과 연민은 그리스도의 고통과 고난의 주요 근원이다.  강한 사랑의 감정은 사랑 받을 대상에 대한 감정을 더 증폭시킨다. 또한 더 큰 연민의 감정은 연민 받을 대상의 처절한 처지에 대해서 더 큰 감정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구원 받을 예정자들을 영원무궁토록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그들의 죄를 대속하는 일도 가능케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연민은 그의 마음 안에 완전히 뿌리 박혀 있어, 그리스도 자신과 존재론적으로 동일화 된다.
즉,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사랑은 속죄의 근원이자 시작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과 연민에 근거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은 인간의 감정적 행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에드워즈는 설명하길, 그리스도 자신이 속죄 사역을 통해 “스스로를 제물로 드려 스스로를 성화시킨 것”처럼,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 상태에 있는 우리도 속죄를 통해 성화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는 그리스도의 객관적 사역 (속죄와 칭의)과 인간의 주관적 사역(성령의 도우심 속에 있는 성화)을 이어 주는 중요한 연결고리로써 작용한다. 에드워즈는 기록하길,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상호 연합을 포함한다. 

그것은 성화와 견인의 측면을 포함하며, 이러한 성화와 견인의 측면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의 한 측면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또한 칭의의 개념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의 의를 나누어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중보자 사역을 통해 인간은 무죄를 선고받게 되고,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다. 

이처럼, 에드워즈에게 있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개념은 객관적 칭의와 주관적 성화의 토대와 기초가 된다. 이를 에드워즈의 속죄론에 투영해 보자면, 객관적 속죄의 측면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를 통해, 주관적 측면이 성화라는 이름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에드워즈의 객관적 속죄 측면은 여전히 그 객관적 색깔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즉,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불명예와 비정의는 회복되거나 만족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를 통해서 이러한 객관적 속죄의 결과가 인간들의 삶 속에서 “거룩한 삶, 성화의 삶”으로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객관적 속죄 측면과 주관적 속죄 측면이 각각 선명하게 그 기능을 감당하고 있고, 두 측면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균형 있게 존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3.2 웨스트의 주관적 속죄 측면: “인간에게 하나님이 드러남(manifestation)” 

이미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웨스트 속죄론의 근본 핵심은 도덕적 통치자이신 하나님이 자기 자신처럼 행동하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인간들에게 그의 도덕성을 드러내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웨스트 속죄론의 키워드는 “거울,” “드러남,” “비추임,” 그리고 “나타남”이다. 즉, 웨스트 속죄론의 핵심 디자인은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가 죄인들에게 드러남 (manifestation)이며 이를 통해 인간들에게 도덕적 반응점과 적용점을 기대하는 것이다. 웨스트는 생각하길, 도덕법은 “신적 완성 (divine perfection)의 기록”이며, 모든 하나님의 통치는 “그의 고유의 속성이 세상에게로 온전히 나타나는 것”이다. 
 웨스트는 더 기술하길,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의 특징은 그의 통치 안에서 진정으로 그려지며,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은 그의 속성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 기능의 역할을 담당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이 그의 통치 안에서 발견됨으로 인해 전 우주 안에 있는 질서와 화목이 서로 연결되어 세워지기 때문이다. 하나님 존재의 특성은 무한하게 탁월하고 그 스스로가 완전한 질서와 조화를 이룬다. 이것이 그의 통치 안에서 진정으로 드러나게 될 때 비로소 극대화된 선이 나타날 것이고, 모든 피조물 안에 진정한 화목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웨스트는 강조하길, 도덕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은 늘 그의 속성 그대로 행동하시며, 세상과 피조물에 질서와 화목을 세우시는 분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그의 반응 자체를 게을리 한다면, 이것은 그 자신의 본질과 속성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웨스트에게 있어서 속죄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가 그대로 투영되는 거울로서의 기능”을 감당할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처벌하시는 방법보다는 오히려 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 자체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행위”인 것이다. 
 결국, 웨스트는 “죄에 대한 이러한 무한 혐오가 없는 한, 하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 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결론짓는다. 하나님께서 죄를 극렬하게 혐오하시고 죄에 대한 불쾌감을 인간들에게 거울로서 드러내심을 통해 인간들에게 이를 도덕적 타산지석으로 삼으려고 하는 웨스트의 속죄론은 결국 속죄의 결과가 하나님 내부에서의 변화를 지향한다기보다는 인간 내부의 변화로 더 그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물론, 하나님이 스스로처럼 행동하시길 원하는 것은 하나님 내부에서의 일이므로 객관적인 측면을 고수하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감을 인간들에게 도덕적 거울로써 드러내고 나타내시는 것이 웨스트 속죄론의 주요목적이기 때문에 이는 결국 인간들로 하여금 도덕적 교훈을 주고자함이 속죄론의 핵심 사상으로 치환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웨스트의 속죄론의 궁극적 관심은 어떻게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나는가 혹은 어떻게 하나님 자신이 이러한 드러내심을 통해 변화되는가가 아니라 (즉, 속죄의 객관적 측면), 오히려 누구에게 그의 도덕적 속성을 드러내시길 원하시는가 혹은 누가 이러한 하나님의 거울로써 나타나심에 구체적으로 반응해야 하는가가 핵심인 것이다 (즉, 속죄의 주관적 측면). 즉, 웨스트 속죄론의 궁극적 관심은 인간에게 그 무게중심이 쏠려 있는 것이다.  이는 2장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웨스트의 속죄론은 형벌이론과 그로티안적 도덕 통치설이 교묘하게 섞임으로 결국엔 객관적 속죄의 측면이 주관적 속죄의 측면으로 많은 부분 치환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웨스트는 객관적 측면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 객관적 속죄의 측면보다는 주관적 속죄의 측면이 속죄론 전반에서 더 강한 위치를 자리 잡고 있다. 다시 말하면 둘 사이의 균형은 어느 정도 무너져있다. 
3.3 에드워즈와 웨스트의 주관적 속죄 측면에 대한 평가 

에드워즈의 객관적 속죄의 측면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법정적, 재판적 혹은 상업적 속죄의 언어로써 많은 주목을 받아온 반면, 에드워즈의 주관적 속죄의 측면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았고, 혹은 오해를 사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루디실은 에드워즈의 법정/재판적 속죄의 측면을 강조하면서 “에드워즈 속죄론의 심각한 함축은 도덕 행위자에 대한 약화일 수 있다”라고 우려를 표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에드워즈는 속죄론 가운데서 인간의 행위나 반응을 배제하지 않았다. 물론 객관적 속죄의 측면에서는 주관적 측면을 배제했지만, 그것은 주관적 측면의 중요성을 저평가하기 위함이라든지, 혹은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로써의 배제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순수한 의미로서의 객관적 속죄의 의미를 보존하고자하는 하는 시도였다. 주관적 속죄 측면은 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 가운데서 중요성이 인지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인간은 철저하게 자신의 전적인 영적 상태와 위치가 바뀌게 되고, 결국 인간은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즉, 속죄의 결과로서 강력한 의미에서의 주관적 변화가 인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의 속죄론에서는 객관적 속죄의 측면과 주관적 속죄의 측면이 각자의 선명한 색깔을 가지며 존재한다. 두 측면이 무리하게 섞이려고도 하지 않고, 각각의 역할을 유지하며 존재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개념에 근거한 에드워즈의 주관적 속죄의 측면은 객관적 속죄의 측면과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 사이의 연합이 둘 사이의 법정 관계의 근거가 된다”라는 에드워즈의 말에 내포된 의미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의 속죄론 안에서, 객관적 속죄의 측면과 주관적 속죄의 측면은 서로 완전히 배타적으로 존재하지도, 혹은 그 경계선이 너무 모호하게 서로 섞여 있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두 측면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 위에서 서로의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며, 상호 보완적으로 존재한다. 이런 측면에서, “[주관적 측면으로써의] 성화 (sanctification)는 [객관적 측면으로써의] 칭의 (justification)의 신뢰할 만한 증거를 제공함으로써 나타난다.”
에드워즈와는 다르게, 웨스트의 속죄론에서는 객관적 속죄의 측면과 주관적 속죄의 측면이 서로의 특징을 유지한 채 각각 뚜렷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웨스트는 형벌 언어 (penal language)를 사용하여 객관적 속죄의 측면의 요소를 어느 정도는 언급하고 있지만, 이 언어가 처벌/형벌적 정의를 만족시키는데 집중하기보다는 그로티안적 도덕 통치설에 크게 기대어 결국 일반적/공공적 정의를 만족시키는데 더 큰 무게중심을 두었다. 이는 결국, 웨스트의 속죄론은 궁극적으로는 주관적 속죄의 측면이 더 강조되는 결과를 낳았다. 웨스트가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처럼, 속죄의 핵심 의미는 바로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불쾌를 인간들에게 실연(demonstration)”하여 인간들로 하여금 도덕적인 삶을 살게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웨스트의 속죄론에서는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 둘 사이의 객관적인 신적 만족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주관적인 인간의 반응과 행위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객관적 속죄와 주관적 속죄가 균형 있게 각각의 위치에서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 않다. 마스덴에 의해 지적된 것처럼, 에드워즈 상속자들 (Edwardeans)로 신학적 시계추가 이동하면서, 속죄론 또한 “다소 추상적인 법정 이론에서 확실한 도덕/실천적 가르침으로 그 무게중심이 이동했다”라는 말은 웨스트의 속죄론에 비추어 볼 때 옳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신학적 장점 뿐 아니라 단점까지도 포함한다. 즉, 객관적 속죄의 측면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결과로써 속죄론 자체가 추상적/사변적 이미지로 변질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주관적 속죄 측면의 강조는 다시금 틀어진 균형추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겠다. 그러나 반대로, 속죄론 안에 내재된 도덕/실천적 측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서 객관적 속죄의 측면 자체가 희미해져버린다거나 존재를 감추게 되는 것 또한 신학적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겠다.   웨스트의 속죄론도 이러한 단점과 그 거리를 멀리 할 수는 없었다. 웨스트의 속죄론 전반의 해석학적 무게중심은 객관적 속죄의 측면과 주관적 속죄의 측면 사이에 균형 있게 존재한다기보다는, 그 균형추가 주관적 속죄의 측면으로 상당부분 기울어져있다. 이는 에드워즈의 균형추와 비교해볼 때 확연히 드러난다. 
4.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에드워즈의 속죄론은 객관적 속죄의 측면과 주관적 속죄의 측면이 각각 고유한 영역을 유지하며 균형을 이루어 존재했음을 확인했다. 만족설과 형벌 대리설이 객관적 속죄의 두 기둥으로써 에드워즈의 속죄론의 기저를 이루고 있으며,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는 객관적/주관적 속죄 측면 사이에 심각한 섞임 없이 객관적 속죄와 유기적으로 기능하며 주관적 속죄의 측면을 부각시켜주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의 속죄의 영향은 하나님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미친다.
 그러나 에드워즈와는 달리, 웨스트의 속죄론은 형벌 이론과 그로티안적 도덕 통치설의 변칙적인 섞임을 통해, 객관적 측면이 궁극적으로는 주관적 속죄의 측면으로 많은 부분 치환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객관/주관 사이의 균형추가 무너진 것이다. 즉, 엄밀히 말해서, 웨스트의 속죄의 영향은 하나님에게 미친다기보다는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만 미치게 된다. 

어거스틴이 그의『고백록』(Confessions)과『신앙지침』(Enchiridion)에서 각각 함축 설명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속죄 이미지는 객관적 속죄의 측면과 주관적 속죄의 측면 둘 다 내포한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속죄는 “그리스도의 의가 하나님과 연합됨으로 통해 하나님 자신이 의롭게 되는 것” (즉, 객관적 측면)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신-인간에 의한 순종의 예를 보여주기 위함” (즉, 주관적 측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 안에서 객관적/주관적 두 측면 모두 다 동등하게 중요하다. 본고에 비추어 볼 때 에드워즈의 균형추는 끊임없이 객관/주관적 속죄의 균형점을 지향하며 이를 유지시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다하는 반면, 웨스트의 균형추는 지속적으로 주관적 측면으로 기울어가고 있음을 보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결과는 하나님에게만, 혹은 인간에게만 각각 배타적으로 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하나님과 인간 둘 다에게 큰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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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그리스도는 택자를 위하여 죽으셨다. 김영규목사 無益박병은목사 8232 2015.04.07 17:35
34 Karl Barth의 신학과 그에 대한 개혁신학적 비판 한상호 無益박병은목사 9668 2015.02.26 05:15
33 개혁신학과 복음주의 연관성 Richard Gamble 번역 안명준 교 無益박병은목사 10478 2014.12.07 12:07
32 퓨리탄과 에드워즈의 모형론적 해석과 한국교회 정성욱 교수 無益박병은목사 13832 2014.11.07 23:56
31 성례에 대하여: 어떤 떡과 포도주를 사용할 것인가? 이성호 목사 고려신 사진 無益박병은목사 8759 2014.11.06 1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