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빙크의 종말론 요약

無益박병은목사 | 2016.01.30 18:46 | 조회 8001


바빙크의 종말론 요약

                                    (The Outline of Eschatology of Herman Bavinck)

 

 


1부 중간상태


1장 영혼불멸의 문제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문제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이는 욕구이다. 그러나 모든 기원과 본질이 그러하듯 만물의 종국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음을 바빙크는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과학이 만물의 기원에 대해서 많은 탐구를 거듭해왔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앞으로도 또한 그럴 것이다.

 

바빙크는 개인과 인류, 그리고 세계의 운명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알아야할 절박한 요구를 갖는 것은 종교임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은 이에 대해 어느 정도의 생각을 다 가지고 있으며 모든 종교에는 어떤 유형이건 종말론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도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 영혼의 독립적 존재성, 영혼의 불멸성은 기원적으로 인간 본성의 한부분이 아리라 환경의 다양한 결과로써 생겨나서 점진적이고 우연적으로 진화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화론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역사가들에 의해서 확인되듯 영혼불멸의 믿음은 모든 민족과 종교에서 중요한 구성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 철학의 견해

바빙크는 철학에서 개인적 영혼불멸에 대한 생각이 있는 것은 종교에서 전수된 것이고, 철학은 영혼불멸의 교리를 계시보다는 이성에 기초하여 논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플라톤은 영혼은 신성(divine being)과 유사하며, 하나의 독립적이고 단순한 실체로서 육신과 욕망을 제어하는 점에서는 육체의 수준보다 월등한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영혼은 생기의 본질이며 따라서 생명 그 자체와 동일하므로 비 생명체이거나 덧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다.

비록 다른 철학자들이 영혼불멸설교리에 반대하고, 영혼선재설이나 영혼윤회설과 같은 신화적인 요소를 받아들였지만, 플라톤의 영혼불멸에 대한 교리는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데카르트에게서는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를 각기 별개의 실체로 보고 그 각각은 자체의 속성, 의도, 범위를 가지며 스스로 존재할 수 있고 따라서 연합은 기계적으로만 할 수 있다고 여겨졌으나, 스피노자에게서는 그것들을 하나의 영원하고 무한한 실체의 표현, 즉 같은 대상의 양면으로 보았다.

 

18세기 철학은 이신론적(deistic)특성을 지녔고 하나님, 덕성, 영혼불멸의 삼분설(triorogy)에 만족하면서 그중에서 세 번째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칸트는 영혼불멸에 대한 앞서 있는 모든 증거가 불완전함을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자신에 대한 확실성 사상에 종지부를 찍었고, 이 이론을 오직 실천적 이성의 선결조건 정도로서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슐라이어마허는 유한성의 가운데서 무한자(the infinite)와 함께 하는 자가 되려는 것과 모든 순간마다 종교의 영혼불멸성안에서 영원해지려 하는 것을 가장 높은 영혼 불멸성으로 알았다.

이렇게 다양한 견해들이 제지되었는데 결국은 물질주의로 인해서 영혼의 불멸성을 완전히 저버렸으며 기껏해야 그 가능성을 언급하거나 단순히 영혼불멸에 대한 희망을 말하는 정도가 되었다.

 

2) 역사와 이성

영혼불멸에대한 믿음이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그들의 모든 발전 단계에서 일어나지만 그 기원에 대해여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개인적이고 독립적이며, 이성적, 도덕적, 종교적인 존재라는 자아 인식으로서의 진정한 자각은 언제 어디서나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고 있다고 바빙크는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러 증명들을 소개해주고 있는데, 첫 번째로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이다. 존재론적 증명은 영혼불멸의 실제성을 그에 관한 관념에서 연역하는데 단지 영혼불멸의 믿음이 임의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한 요소이며, 인간의 존재성에 대해 도덕적으로 필요하다고 이해하는 데에 술어적 형식을 부여할 뿐이다.

 

다음으로 형이상학적 증명(metaphysical argument)이 있는데, 형이상학적 증명은 영혼의 불멸성을 바로 그것자체로부터 추론해내는 것이다. 이 증명도 자율적인 영성의 원리는 물질과는 구별된다고 하는 그 정도까지만 가치를 유지한다. 인류학적 증명은 인류의 심령 생명이 고유하다는 점에서 출발하여 식물이나 동물과는 구별되는 영적 존재가 있다는 결론정도에만 이른다. 그리고 도덕적 증명은 도덕성과 자연적 본성사이에 존재하는 불화를 나타내 보이고 이 둘을 자기안에서 화해하도록 만드는 또 다른 종류의 존재가 있음을 암시한다.

 

자연과 역사로부터 얻는 이러한 표시들이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을 지지해주는데에 아무리 큰 가치를 지닌다 할지라도 성경은 이 교리에 대해서 그런 지지를 받으려하지 않고 도리어 우리가 언뜻보아서는 이상하게 보일뿐인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바빙크는 말한다. 성경은 이것을 신령한 계시라고 선포하지도 않으며 어디에도 눈에 뜨이도록 강조해두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더욱이 전혀 그 진실성을 따지려는 논쟁을 시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구든 이것에 반대하는 자에게 맞서 지지하는 변론을 벌이지도 않는다고 바빙크는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빙크는 성경이 말하는 영혼불멸을 소개하고 있다.

 

3) 구약

죽음을 통해 모든 영들이 죽은자의 거처인 스올(sheol)로 들어가는데, 스올은 결국, 모든 죽은 자들이 예외없이 집결하는 장소이며(왕상2:2; 3:13; 30:23; 89:48; 14:9이하; 32:18; 2:5), 거기로부터 아무도 기적에 의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못하는(왕상17:22; 왕하4:34; 13:21)곳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구약에는 단지 몸만 죽게 허용하고 영혼은 불멸하게 하여 위로를 준다는 견해가 발붙일 여지가 전혀 없다고 바빙크는 말하고 있다.

 

죽음에 임하여 영혼(the spirit), 또는 숨(breath)(146:4), 혹은 혼(the soul)(35:18)이 그에게서 떠나면, 그것은 전 인간(the whole person)이 죽는 것이며, 그의 몸 뿐 아니라 그의 영도 역시 죽음의 상태에 있게 되어 지하 세계(the underworld)에 속해 있게 된다.

 

이것이 영의 죽음(the death of the soul)에 관해(37:21; 23:10; 22:20)그리고 죽은 사랑의 영과의 접촉으로 더럽혀짐(즉 시체와의 접촉, fp19:28; 21:11)에 관한 언급이 있는 이유라고 바빙크는 말하고 있다. 마치 전인격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에 이르도록 운명지어짐과 꼭 같이, 그 전인격이 그의 죄로 말미암아 몸과 영이 함께 죽음에 굴복한다는(2:17)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들이 가진 종말론적 소망은 거의 오로지 그 국가의 이 땅위에서의 미래, 하나님의 왕국의 실현에 직결되어있다고 바빙크는 말하고 있다. 그만큼 스올에 있는 개개인의 미래에 관한 질문은 완전히 뒷전에 남아있었으며, 하나님, 국가, 그리고 땅은 서로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개인들은 그 언약에 통합되었으며 따라서 그런 관점으로 보여 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포로시대 이후, 이스라엘이 하나의 종교적 공동체가 되고 종교가 개인적인 것으로 된 후에 비로소 각 사람의 장래운명에 관한 질문이 그 자체적인 힘으로써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적인 것들 속으로 짜 넣어져 있던 계시의 영적인 대조를 느끼게 되었으며, 의로운 자들과 불의한 자들 사이의 구별이 점점 더 증가하여 이스라엘과 다른 국가들 사이의 구분으로 대치되었고, 또 이것이 무덤 저편으로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관관계 속에서 보면, 경건한 자들은 억압과 역경으로부터 때맞추어 구원받기를 기대할 뿐 아니라, 사물을 신앙의 눈을 통해 봄으로써 자주 무덤 너머의 세계를 꿰뜷어 보고, 또한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누리는 지극히 기쁜 삶을 예기하기도 했음을(49:18; 14:13-15; 16:9-11; 73:23-26) 바빙크는 말하면서, 구약전체에서 소개되고 하나님을 볼 때 이것이 타당함을 지적하고 있다.

 

즉 구약 전체는 하나님을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며, 능력은 한계가 없고,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전적인 주권을 가지신 분이라고 가르치고, 그는 하나님이시고, 주님이시며, 인류에게 생명을 주신 분으로(1:26), 지금도 창조하시며 모든 인간과 존재하는 것들을 유지하고 계신(32:8; 33:4) 분으로, 구주로서 생명을 그의 법을 지키는 것에 묶어 놓으시고 이를 어김에 대해서는 죽음을 선포하시는 분으로, 비록 하늘이 그분의 거처이지만 그의 성령으로서 스올에도 현현하시는(139:7,8)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올(저승)과 지옥(Abaddon), 그리고 인간자손들의 마음도 여호와 앞에 열려진 채로 있으며,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며 살리기도 하시고, 스올에 내리기도 하시며 거기로부터 다시 끌어올리기도하시며(32:39), 그는 죽음에서 면하게도 하시며 죽음이 위협할 때 구원하실수도 있으시고, 에녹과 엘리야를 죽음을 보지 않고 자신에게로 오도록 데려가시기도 하며, 또 죽은자를 살아나게도 하시며, 죽음을 소멸케 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심으로 죽음의 권세에서 완전히 승리하실 수 있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 중간시대의 유대주의

바빙크는 일반적으로 이 시대의 저작들이 종교에 대해 좀더 개인적인 관점을 보이고, 심판이라는 개념의 영향으로 그 글들은 죽음 직후에 의인과 악인 사이에 임시적인 분리를 가르치고, 그들이 거하는 각기 다른 장소에 대해 좀더 자세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중에서 팔레스타인 계(Palestinian)에는 마카비, 바룩, 4 에스라, 에녹, 12족장의 약속 등이 속하는데, 중간상태를 단지 임시적인 특징이라고 여기며, 의인과 악인 사이에는 죽음직후에 어떤 분리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계열의 모든 저자들의 비중점은 그들의 보편적 종말론, 메시야의 오심, 말세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움에 놓여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계(Alexandrian)인 예수 시락의 지혜서, 지혜의 책, 필로, 요세푸스 등에서 처럼 특별히 개인적 종말론에 강조를 둠으로써 메시야의 오심, 부활, 최후의 심판, 그리고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등의 내용은 배격할 정도로 약화되거나 아니면 완전히 그림에서 빠져버리기도 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5) 신약

율법과 선지자에 조화하여 신약에서는 특수한 종말론보다는 보편적 종말론에 훨씬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고 바빙크는 말한다. 성경은 우리가 이 생명 안에서, 이 생명을 위해서 필요로 하는 만큼의 빛을 비추어주는 설명을 모자람 없이 해준다는 것이 바빙크의 믿음이다.

 

신약은 구약에서보다 훨신 더 강도 높게 죽음은 죄의 결과이며, 형벌이고(5:12; 8:10; 고전15:21),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 미친다(고전15:22; 9:27)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다만 드물게 개인적으로, 에녹같이, 죽음을 보지 않고 데려감을 당하기도 하고(11:5),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경험하는 자들은 눈 깜짝할 순간에 죽음의 간섭이 없이 변화하고(고전15:51; 사전4:14-17), 그리스도는 죽은 자뿐 아니라 산자도 심판하실 것임을(10:42; 벧전4:5)말하고 있는데, 그러나 죽음이 한 사람의 최후는 아니며, 영혼은 죽일 수 없고(10:28), 몸은 어느 날엔가는 일으켜질 것이며(5:28), 믿는 자들은 멸망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에 까지 참예할 것임을(3:36) 말하고 있다.

 

신약에 의하면 모든 죽은 자들은 부활 때까지 죽음의 나라인 하데스에 있게 될 것인데, 성도와 불신자들의 상태가 매우 다르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 직후에 믿는 자들이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임시적 상태의 지극한 기쁨을 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은 그들의 죽음의 순간으로부터 고통의 장소로 들어간다.

 

이 고통의 장소는 아직은 불못, 또는 게헨나와는 동일하지 않은데, 이는 게헨나는 끌 수 없는 불이며, 마귀와 그의 사자들(18:8; 9:4)을 위하여 예배된 영원한 불이면서, 현재가 아닌 미래에 이 세상의 왕국들과 거짓 선지자들(19:20), 사단(20:10)과 모든 사악한 자들(21:8)을 벌하기 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실상은 지금은 저들을 모두 옥(벧전3:19)또는 무저갱(8:31)에 가두어 둔 것이라고 바빙크는 해석하고 있다.

 

2장 죽음 이후, 그때는 무슨 일이?

 

초기의 기독교 신학은 그 자체를 성경의 말씀한 바 단순한, 주신 것들에 국한시켰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도 교부들도 여전히 중간상태에 관하서는 아무런 교리도 갖지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죽으면 경건한 성도들은 천국의 복됨을, 악한 자들은 지옥의 형벌을 경험한다고 믿었다고 바빙크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거의 모든 신자들의 처음에 기대한 대로 곧 오지 않고, 이단적인 사상가들이 마지막 일들에 관한 교리를 왜곡하고 혹은 반대하게 되었을 때에 가서야 교회의 사상가들은 보다 계획적으로 중간상태에 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예로 에비온주의는 기독교인의 보편주의를 희생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국가적 특권을 굳게 잡으려 하였으며 따라서 일반적으로 천년왕국설의 경향을 띠었고, 그노시스주의는 그 자체의 기본적 이원론으로 인해서 기독교 종말론을 모두 거부하였으며 오직 영혼이 물질로부터 해방되는 것과 그 영혼이 죽음이후에 즉시 신의 충만에로 들게 된다는 것에 대한 기대만을 붙들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기독교 신학은 중간상태의 특성 및 그 중간상태가 이 세상과 갖는 연관성과 또 최후의 심판에 뒤따라오는 마지막 상태와의 연관성 등에 대해서 보다 명백한 이해를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바빙크는 분석하고 있다.

 

저스틴은 이미 죽음 후에 경건한 자들의 영혼은 보다 좋은 곳에 있고 불의한 자들의 영혼은 심판의 때를 기다리면서 보다 나쁜 곳에 있다고 하였으며, 이레니우스는 경건한 자들의 영혼은 죽음에 임하여 즉시 천국, 낙원, 도는 하나님의 도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보이지 않는 장소로 가서, 거기서 부활과 뒤에 따르는 하나님의 영광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이처럼 하데스의 다양한 저장소(receptacles), 다시 말해서 죽은 자들이 거기서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곳에 대한 동일한 관점을 여러 교부들에게서 발견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물러가는 그 거리 정도만큼씩이나 하데스에 대한 오래된 설명을 유지하면서 거기서의 머무름이 짧고, 임시적이며 다소 중립적인 경험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졌으며, 선행에 대한 필요성과 공덕 쌓기에 대한 가르침과 결합하여 자신들의 전 생애를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은 또한 지금 죽음의 시간에 이르러서도 즉시 하늘의 행복을 누릴 가치가 있다는 생각으로 이끌어 갔다고 바빙크는 지적하고 있다.

 

1) 연옥설로 옮겨감.

오리겐은 모든 형벌은 치료약이며 게헨나를 포함하여 하데스 전체가 정결함을 위한 장소로 보았으며, 오리겐의 뒤를 이어 헬라의 신학자들은 나중에 수많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슬픔을 겪어야만 하게 될 것이고, 그들은 오직 살아있는 자들의 희생과 중보에 의해서만 그 슬픔에서 놓여나올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고 바빙크는 말하고 있다.

 

케쟈(Caesar of Ares)와 대그레고리(Gregory the Great)는 본질적으로 소죄(小罪)는 이 세상에서나 혹은 내세에서도 속죄될 수 있다는 개념들을 발전시켰으며, 결국은 터툴리안이 언급한 바와 같이 죽은 자들을 위한 중보기도와 희생을 바침, 연옥의 교리 등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스콜라철학자들은 연옥설 교리를 정설로 받아들였고 플로렌스 공회(1439)와 트렌트 공회(1545-63)에서는 이것을 교회의 교리로 만들었다. 카톨릭은 영세를 받기 전에 죽은 유아들은 특별히 구별된 구역인 영아들의 림보로 가서 단지 영원한 정죄에 처하게 되는 벌만을 받을 뿐, 육체적인 형벌은 받지 않는 다고 했으며, 영세나 고해성사를 통해 죄 씻음의 은혜를 받고 난 후에 소죄를 범하고 아직 이 죄에 대해 합당하고 일시적인 처벌을 이 세상에서 받음으로써 죄 갚음을 치룰 수 없었던 사람들은 충분히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곧바로 천국에서 하나님의 복된 영광을 뵙도록 허락되지를 않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선행과 공덕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천국에 입장하는 데에 걸림이 되는 방해물을 제거하기위해,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는 한 장소로 간다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덧붙여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의 효력으로 인하여 교회가 중보기도나 미사로 드리는 희생, 또 선행 및 면죄부등을 통해서 이러한 고통당하는 영혼들을 도와서 그들의 형벌이 보다 경감되고 기간도 단축되도록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 개혁과 개악

개혁주의는 연옥의 개념 속에서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제한적이 되는 것을 보고 인간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하심을 얻는 그 원리에 힘입어, 죽음의 싸움 안에서 겪는 특정한 심판 직후에 천국의 행복이나 지옥의 멸망으로 들어간다고 주장하였음을 바빙크는 지적하고 있다.

 

루터는 초기 경건한자들의 중간상태를 조용하고 고요하게 주님의 미래를 기다리면서 잠들어있는 상태로 그려보았다. 그러나 루터파들은 중간상태와 최종상태의 구별을 거의 지워버렸고, 칼빈은 칼빈은 죽음 이후의 아브라함의 품은 하나님의 충만하고 온전한 영광을 갈망하며 성도의 영혼들이 죽음이후에 완전한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간상태는 거의 전적으로 미래에 대한 소망과 기대 안에 있는, 그러나 그 영광을 즐기는 것은 아직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찬가지로 악인들의 영혼도 죽음이후에는 자신들을 위해서 확정된 미래의 형벌을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기다리면서, 그러나 그 형벌자체는 받는 것은 아직 아닌, 즉 형벌받기를 대기하는 그 자체가 형벌은 아닌 상태로 가게 된다고 하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개신교신학에서는 18세기 후부터 일찍이 이방인들과 그리스도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서 표현되었던 모든 개념들이 되돌아왔음을 바빙크는 지적하고 있다.

 

소시니안주의자들은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부활 때 까지 사고 작용이나 생각도 없고, 기쁨이나 불편함도 없는 상태로 존재한다고 가르쳤으며, 이때 또 영혼수면교리도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중간상태에서도 여전히 복음이 전파되며 개종의 가능성이 주어진다는 주장이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 바빙크는 말하고 있다.

 

3) 성경적 유보의 필요성

바빙크는 성경의 제한 범위 안에 머물면서, 마땅히 지켜야할 지혜로움 그 이상으로 넘어가지 말아야 됨을 분명히 하였다. 철학적 관점은 영혼불멸인 영혼이 죽음이후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성경과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성경은 그저 단순히 벌거벗은 존재로서 아무런 가치의 향상도 더하지 않은 상태의 인간으로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질만한 어울리는 생명의 모습이 아니며, 이것은 무덤 이편에서도 그렇지만 무덤 너머 저편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철학적 관점에서의 불멸성, 즉 죽음이후에도 영혼이 계속 존재한다는 식의 불멸성을 받으셨거나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쇠잔해지고 공허해진인간의 생명을 이 세상과 내세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로 말미암는 만족, 평강, 기쁨과 행복으로 다시금 채우셨음을 강조하였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영생으로의 통로이며, 무덤은 부활의 날까지 성화된 쉼을 갖는 장소임을 밝히고 있음을 명심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4) 죽음 이후에 대한 오류들

 

영혼 수면

이것은 영혼이 몸으로부터 분리된 후에는 다만 휴면 상태의 생명을 유지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육체에 대한 영혼의 의존성이 굳이 영혼의 독립성을 배제하는 것이라고 할 필요는 분명히 없으며, 둘째로 성경에서 말하는 쉬는 것, 자는 것은 죽은 자들이 현재 세계와의 교류가 다 끝났기 때문에 자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며, 죽은 자들의 영혼이 이세상과 갖는 관계는 끊겨지는 반면 즉시 다른 세상과 갖는 다른 관계를 대체되기 때문에 영혼수면이라는 견해를 갖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중간적 육체성

어떤 사람들은 죽음이후에 영혼은 새로운 육체성을 부여 받으며 그렇기 때문에 다시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가능해진다고 믿었는데(삼상28:14; 14:9; 31:18; 16:23,6:11), 그러나 이것은 비유적 심상을 인간의 언어로 말한 것이고, 고린도후서5:1-4에서도 그러한 증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이후의 영혼에게 육체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하나의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산 자와의 접촉

많은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 영혼은 무덤 근처에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는 2세기부터 기독교 예배에도 침투해 순교자들을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게 하였으며, 4세기 이후에는 동정녀 마리아, 천사들, 족장들, 순교자들과 순교자들에 대한 숭배에서 주교와 수도승, 은둔자, 참회자와 처녀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유물들까지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바빙크는 밝히고 있다.

 

로마 가톨릭은 교회를 천국의 승리한 교회, 연옥의 고통을 당하는 교회, 땅위의 전투중인 교회로 나누고는 이 교회들은 교통할 수 있고 이 교통함을 통해서 천국의 복된 영혼들이 중보를 통해 연옥의 불쌍한 영혼들을 도울 수 있고, 자신의 교회가 기도, 시혜, 선행, 면죄부, 그리고 특별히 미사에 드리는 헌금을 통해 연옥의 영혼들이 받는 형벌을 좀 더 가볍고 단축되도록 도와주며, 연옥의 영혼들이 중보 함으로 땅위의 믿는 자들을 돕고 힘을 줄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는 하나님에게는 latria라는 이름으로, 마리아에게는 hyper-dulia라는 이름으로, 성인들은 dulia라는 이름으로 경배를 표했다.

 

이러한 오염 속에서 루터교회와 영국국교회들도 위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갔고, 수많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죽은 자들의 혼과 직접적인 접촉과 가능성을 주장하였다고 바빙크는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바빙크는 성경은 죽은 자들이 나타나는 가능성이나 사실성에 대해 가르치는 곳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무엘상 28장도 사무엘이 지하에서 직접 올라 왔다는 주장을 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가 땅위에서 행한 것들이 우리의 정신적 소유물이 되어 죽어서 우리와 함께 할 것이고 죽은 자들이 자신들이 땅위에서 알고 있었던 사람들을 알아보게 된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럼에도 성경은 끊임없이 죽음에 임해서는 이 땅에서의 모든 교제가 끝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땅과 죽은 자들과는 완전히 분리된 다른 나라라는 것이 성경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3장 죽음과 부활사이

여기서는 죽은 자들이 무덤 저편에서 갖게 되는 새로운 관계와 여건에 대해 과연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가에 대한 것을 바빙크는 다루고 있다.

 

구약에 있는 것들을 확장해가면 죽음 후에 의인과 악인의 상태는 다르다는 사실에 까지 이르게 되는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경건치 않은 자들은 멸망하고 몰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 장소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는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 두어야 함을 바빙크는 말하고 있다.

 

단지 죽음의 저편은 하나의 상태일 뿐 아니라 또한 장소라는 것이다. 그들은 비록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해도 무한하거나 편재한 것이 아니며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져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임을 바빙크는 생각하고 있다.

 

1) 또 한 번의 기회?

이 땅에서 복음을 전혀 듣지 못했거나 겨우 희미하게만 들었던 사람들이 무덤 저편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는 과연 없을까하는 의문에(벧전 3:18,19, 12:40; 20:17; 2:24; 딤전 3:16; 16:53-63) 대해서 바빙크는 반대하고 있다.

 

그것은 이 이론이 근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다 구원하시려는 의도를 갖고 계시고, 복음 전파는 완전히 전 우주적이어야 하고, 모든 인간은 반드시 복음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선택에 직면하고, 그런 선택의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인간의 능력에 달렸고, 원죄와 실제로 짖는 죄들은 인간 누구에 대해서도 정죄하기에 불충분하고, 고의적으로 복음을 믿지 않는 죄만이 인간을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하는 효력이 있다는 잘못된 근거를 갖고 있는 이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스올에서의 말씀선포나 개종, 부활, 혹은 이전에 살았던 소돔과 사마리아의 거민이 돌아오는 것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벧전 3:18-22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영으로 살리심을 받으신 후에 천국에 가셔서 그의 승천하심을 통해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고,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리스도께 순복하게 하셨다는 의미이고, 벧전 4:6 역시 그들은 죽은 것이지만 하나님처럼 영으로는 살아날 것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복음전파는 그들의 죽음보다 선행된 일임을 알 수 있다.

 

구원 얻음과 멸망당함에 관한 결정은 복음에 대한 응답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소명에 대한 응답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2) 영혼의 정화

믿음은 가졌으나 이 땅에서 완전한 거룩함을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신자들은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써 영혼이 정결케 씻음을 받는 상태에 가있다고 하는 로카 카톨릭의 이론은 이교도들에게서 그 기원이 유래한다.

 

마태복음 5:25의 옥이 연옥을 뜻하기보다는 오히려 게헨나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 마태복음12:32에서 오는 세상이란 것도 성령 훼방 죄의 심각성을 나태내기위한 강조의 의미일 뿐이다. 고린도전서 3:12-15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불을 제시해주고 있을 뿐이지 영혼의 정화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칭의, 성화, 영화를 인간들에게 부어준 초자연적인 은혜에 기초하여 인간 스스로가 이루는 업적이라고 생각하고는 만일 땅위에서 이 일에 실패하면 죽은 뒤에 가서도 완전함을 얻을 때까지 계속해야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바빙크는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완수하셨다는 것에 근거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는 형벌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율법을 지키심을 통하여 우리를 위한 영생도 얻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고통당하심과 죽으심을 통해 얻으신 모든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완전하게 가능한 것으로서, 진리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곧바로 주어진다는 진리에 섰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는 천국에 들어가도록 자신 스스로를 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믿는 성도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그것을 자신들 속에서 펼쳐내는 것으로 보았고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았다는 것이다.

 

3) 우리 순례 여정의 끝

과연 언제 믿는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의 온전한 분량에 들어가게 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법적으로는 믿는 자들은 그 은혜를 당장에 받지만, 땅위에서 아직은 그것을 완전히 소유하지 못하고 죽어서 완전한 소유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이 말하는 죽음을 소개하고 있는데, 즉 성경은 죽음을 하나의 수단으로 보는데 여기서 죽음이란 믿는 성도들을 위한 것으로써 죄에 대해 죽는 것이라는 것이다.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도약이며, 믿는 성도들을 순식간에 그리스도의 존전으로 재배치하는 것이고, 그 결과로써 겉 사람은 완전히 멸망하나 속사람은 완전히 새롭게 함을 입는 것이기 때문에 순례 여정의 끝은 죽음 후에 얻어짐을 말하고 있다.

 

4) 죽은 자들을 위한 중보기도

연옥교리가 옹호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죽은 자들을 위해 바치는 모든 헌물과 기도는 자동적으로 그 교리와 더불어 헛된 것임을 바빙크는 말한다.

 

개혁주의에서는 사람이 죽을 때 그들의 운명이 다시 바뀔 수 없도록 결정된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죽은 자들에 대한 이런 중보기도의 개념을 거부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성경을 소개한다. 고린도전서 15:29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그 사람들이 믿었던 신앙을 그들 대신 나타내기 위해 믿는 성도인 산자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 본문에서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끌어 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5) 승리한 교회와의 교통함

바빙크는 이 땅에 있는 전투하는 교회와 천국의 승리한 교회 사이의 끊어지지 아니하는 교통함을 말하고 있다. 땅위에 있는 믿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찬송하는 허다한 천사들과 구약의 경건한 성도들로서 하늘에 기록되어 천국 시민권을 가진 장자들의 총회와, 이미 그리스도인으로 죽어 완전함에 이른, 즉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투중인 교회가 승리한 교회와의 재 연합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통함이 교회의 지상구역교인들과 천국구역 교인들 사이에 직접 교류가 있어야 하는 것을 암시하지는 않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4장 마지막 때의 이상

세상의 종말에 대한 확신은 종교뿐 아니라 과학도 늘 확신을 갖고 있고 바빙크는 말하고 있다. 그러한 확신은 자연만물은 결국 언젠가는 그 수명이 다 할 것이고 그때가 바로 지구의 종말이라는 견해, 또 이와는 반대로 윤리적으로 물질적으로 큰 번영이 올 것이라고 하는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는 견해 등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의 이론들은 개인적 특질의 가치를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고 그것을 전체로서의 세상에 희생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더 나아가 종교와 도덕이 갖는 생명의 중대성을 평가하지 못하고 그것을 문화의 가치보다도 훨씬 아래에 둔다는 것과, 그 철학 이론들은 미래에 뿐만 아니라 현재로서도 단지 우주의 내재하는 힘 위에 세워져있으며, 세상을 지배하며 궁극적으로는 직접적인 간섭을 통해 세상에 부과된 목적을 성취하도록 원인이 되어주는 신성한 힘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있음을 바빙크는 지적하고 있다.

 

1) 구약의 종말론의 고유성

이스라엘 자신의 역사와 국가의 관점에서 시술된 구약의 메시아 기대사상은 땅위에서의 복된 미래로 제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구약이 전망하는 바에는 신자들이 마지막 때에 천국의 영광으로 들어간다고 가정하는 부분이 없으며, 메시아가 한번 오심에 대해서만 알고 있으며, 메시아의 생애를 보는 시각도 메시아의 높으심과 멸시 받으심의 분명한 구분을 전혀 짓고 있지 않으며, 메시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구별도 두지 않고, 구원을 위해 오시는 초림 후에 오랜 시간이 지나서 심판을 위해 재림하신다는 내용을 정리해 놓지도 않고 있으며, 구약의 예언에서는 메시아왕국을 최종적 상태로 간주하며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최후 공격에 대한 격퇴, 자연의 변화 그리고 죽은 자들로 부터의 부활을 이 왕국이 세워지는 시작과 완성에 앞서 일어나는 사건들로 분명히 바라볼 수 있다고 바빙크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감각적으로 묘사된 세상적 형태의 예언 속에는 영원한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포로 귀환과 참된 개종은 동시에 일어나고, 원수들에 대한 승리는 종교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이 가장 밀접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메시아는 세상적인 통치자이면서 또한 영원한 왕이고, 그의 백성에게는 영원토록 아버지가 되시며 평강의 왕이요 제사장이신 왕이시고, 이스라엘의 원수들은 이스라엘에게 복종하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의 성전에서 여호와를 섬기게 되고, 이 성전과 함께 거기서 드리는 제사장 제도와 희생제사는 메시아 왕국의 모든 백성이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그의 길을 걷는다는 것을 눈으로 보여주는 증거이고, 또한 그 땅이 특별히 비옥하다는 것은 자연의 온전한 변화, 즉 의인의 집인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예상케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껍질을 알맹이로 잘못알고 상을 실체로, 형식을 본질로 잘못 이해했음을 바빙크는 지적하고 있다.

 

2) 천년설의 등장

바빙크는 천년설의 기원은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인과 페르시아인의 종교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이 세상적 구원에 대한 기대와 천국의 복된 상태 사이의 타협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즉 천년설은 구약에서 예언한 세상적인 메시아 왕국을 받아들이면서도 이 왕국은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하나님의 왕국으로 대치된다고 보는 것인데 구약은 천년설의 입장이 아님을 바빙크는 분명히 하고 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묘사하는 메시아 왕국은 망하지도 않으며 영원히 서게 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2:44)로서, 심판과 부활과 새로운 세상의 창조에 이어지기 때문이다.

 

바빙크는 천년설의 기본개념은 두 번에 걸친 그리스도의 재림과 이중적인 부활사이에는 구분을 짓는 것, 첫 번째 재림에서는 그리스도가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정복하고 사단을 묶을 것이며 죽은 신자들을 일으키고 교회를 특히 이제는 회개하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공동체를 자신의 주위로 모으실 것이라고 하는 것, 그리스도는 그 공동체 안에서 부터 시작하여 세상을 다스릴 것이며 영적 번영기와 물질적 풍요의 시대를 이끌어 들이실 것이라는 것, 그 시기가 끝나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재림하셔서 모든 인류를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심판의 보좌 앞에서 그들을 심판하여 영원한 운명을 결정해주신다는 것으로 파악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빙크는 구약에서는 메시야왕국을 임시적이고 한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세계 역사의 종국적 결말로 보는 등 천년설은 어느 부분은 영적으로 해석하고 어느 부분은 문자적으로 임의로 해석하는 변덕을 부린 결과로 보고 있다.

 

3) 천년설에 대한 성경적 답변

바빙크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과 천국의 일에 대해서는 오직 감지할 수 있는 이 세상적인 형태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예배를 그렇게 제정하셨던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우리들 스스로 만든 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올바른 상을 통해서만 천국의 일들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을 이 언어를 이어받아 미래의 하나님나라에 대해 말할 때에 시온과 예루살렘으로 성전과 제단으로, 선지자와 제사장으로 일컫는다는 것이다. 즉 땅 위의 것으로 천국의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두 번째로 모든 예언은 시문학으로서 그 자체의 특성에 따른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현실적인 해석을 하게 되면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고 예언의 본래적 성격을 오판하게 된다. 세 번째로 선지자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일과 그것을 옷 입히고 있는 상과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었다는 점과, 끝으로 선지자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성령께서는 그들을 통해 무엇을 선언하시고 또 나타내시고자 원하셨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약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 신약은 구약의 예언에 대한 완성이며 성취이며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해석이 된다는 것이다. 구약을 영적으로 보는 것은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며 신약신학에서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신약자체에 그 출발점을 두고 있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임시적이고 감각적인 형식을 벗은 구약이 곧 신약인 것이다.

 

죄는 레위기에서 말하는 부정함으로 상징화되었고, 속죄는 동물을 잡아 희생으로 바침으로써 성취되었고, 정화는 물리적 세척을 통해 예시되었고, 하나님과의 교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과 연계되었고, 하나님의 은총과 친근히 하심을 얻고자하는 갈망은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함으로 표현되었고, 영생을 땅위에서 장수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은 구약의 진리, 본질, 알맹이, 실제내용이며, 구약은 신약 안에서 드러나며, 반면에 신약은 구약 안에 숨겨져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을 하나의 간주곡으로 보며 이스라엘이 자기들에게 조신 메시아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우회하는 방식이라고 보면서 그 결과 구약의 실제적인 존속과 성취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만 시작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를 따르는 천년설은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바빙크는 지적하고 있다.

 

신약이 아니라 구약이 간주곡이다. 천년설은 기독교 그 자체와 충돌하게 된다고 바빙크는 지적하고 있다. 원칙에 있어서는 천년설은 유대주의와 하나이며, 기독교에 대해, 역사적 인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고 그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틀림없이 일시적이며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의 가치를 부여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이며, 천년설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부터, 그가 영광중에 나타나심으로부터 비로소 처음으로 실제의 구원을 기대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유대주의처럼 천년설은 영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에, 도덕적인 것을 육체적인 것에 종속시키며, 유대인들이 가진 세속적 마음가짐을 확증해주고, 그들이 메시아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변명할 구실을 주며, 구약의 말씀 읽는 것을 들을 때에 그들의 마음을 덮어서 깨닫지 못하게 가리는 것을 강화하며,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된 것이 여전히 천국에서도 이득을 누리는 것이라는 환상을 갖도록 고무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고 바빙크는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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