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말하다 (요한복음 4:19-26), 조병수 교수(신약신학,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無益박병은목사 | 2012.12.04 11:32 | 조회 7903

예수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자의 대화는 물에 관한 것으로 시작되어 남편에 관한 이야기로 발전하다가 드디어 마지막 단락에 도달하였다. 마지막 단락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여자의 말(19-20절)과 예수님의 말씀(21-24절)이다.

1. 여자의 말(19-20절)

사마리아 여자는 남편의 문제를 꿰뚫어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지자라고 생각하면서 마침 잘 만났다는 듯이 평소에 궁금하게 여기던 질문을 던졌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0절). 여자의 말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드러난다.

첫째, 여자는 예배와 관련하여 전통에 매여 있다.

“우리 조상들은 ...”(20절). “조상들”이라는 표현은 인간적인 전통을 의미한다. 여자는 이미 앞에서도 인간적인 전통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2절). 여자는 전통에 매여 있다. 그런데 전통에 매인 것은 비단 사마리아 여자뿐 아니다. 유대인들도 이와 비슷하게 전통에 매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게 될 필요가 없다고 반격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요 8:39). 예수께서는 공허한 전통에 대하여 아주 회의적이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라”(요 8:39)고 말씀하셨다.


잘못된 전통에 매여 있으면 진리를 듣지 않는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의 본문을 해석하면서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쓸데없는 전통을 버려야 하며 쓸데없는 전통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어떤 불필요한 전통에 매여 있지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전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둘째, 여자는 예배와 관련하여 장소를 중시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미 앞에서 여자는 우물이라는 공간에 매여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2절). 여자에게는 예배의 공간이 관건이었다. 여자는 공간성을 가지고 유대인과의 차별화를 부각시키려고 했다.

 

사람은 공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장소에 집착하려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배공간에 강한 집착력을 표현한다. 이 때문에 예배공간을 확보하고 치장하기 위해서 엄청난 물질을 투자한다. 물론 건물을 든든하고 아름답게 짓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문제는 공간 그 자체에 진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점이다. 우리도 자주 예배공간의 차별화가 마치 영적인 차별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셋째, 인간의 전통과 공간을 중요시하는 여자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는 누구에게 예배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자에게 전통과 공간이 너무 중요하다보니 누구에게 예배하느냐는 관심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여자의 말에는 예배의 대상이 언급되지 않는다. 예배의 전통이 중요해서 “누구에게”보다 “어떤 전통으로”에 관심하고, 예배의 공간이 중요해서 “누구에게”보다 “어떤 장소에서”에 관심한다. 누구에게보다 ‘어떻게’와 ‘어디에서’가 중요하다보니 여자에게는 예배의 대상이 증발하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가? 방법과 공간에 몰두하다가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이 증발해버리지 않았는가? 알지 못하는 신을 경배했던 아테네 사람들처럼 우리는 예배대상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예배대상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을 집요하게 가르치지 않고 예배를 드릴 방법과 공간에만 집착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사마리아 여자는 전통과 공간이라는 인간적인 요소에만 관심을 했다. 왜냐하면 여자는 땅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땅에서 난 자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요 3:31).

2. 예수님의 말씀(21-24절)
땅에 속한 것에 관한 이야기를 쏟아놓은 여자와 대화하면서 예수께서 말씀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요 3:34).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여자에게 예수께서는 하늘에 속한 것을 말씀하셨다. 사람을 말하는 여자에게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말씀하셨다.

1) 아버지이신 하나님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의 말을 들으면서 안타까움을 표현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절).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예배의 대상이신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말씀하신 것은 여자의 말 가운데 두 가지 문제점에 응수하신 것이다.

① 예수님은 한편으로 여자의 말 가운데 “조상들”(아버지들)에 관한 언급에 응수하셨다. 예수님의 의도는 이것이다. 여자여, 너는 야곱을 아버지라고 부르는가(12, 20절),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오래 전에 죽은 야곱과 조상들이 너의 아버지이냐, 나의 아버지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사랑을 베풀며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② 예수님은 다른 한편으로 공간(이 산, 예루살렘)에 대한 여자의 언급에 응수하셨다. 예수님의 의도는 이것이다. 여자여, 너에게는 어디에서 예배하느냐가 중요하냐, 나에게는 누구를 예배하느냐 중요하다. 너는 그리심 산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나는 하나님 아버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조상(전통절)도 아니고 공간도 아니며 예배를 받으시는 아버지 하나님(대상)이시다. 예수님의 관심은 항상 하나님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말하는 분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집착한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은 천사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은 성품을 가진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을 베풀기도 하고 진노를 내리기도 하는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라는 성품은 하나님의 구체성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구체적인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자녀와 선명하고 생생하게 관계를 하신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체험하신 사실이다(요 5:19-29; 17:1-26).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다”(요 6:57)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눈을 돌리지 않고 마음을 떼지 않으며 성도를 항상 지키신다(시 139:8-9).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에게서 사랑과 친분을 느끼지 못한다.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은 전통과 상황을 아는 것보다도 중요하다. 전통도 공간도, 인간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2) 영과 진리의 시간
예수님은 예배의 공간을 언급하는 여자에게 “시간”을 말함으로 응수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절). 예수님은 예배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이 사실을 두 번이나 강조했다(21, 23절). 그러면 예수님이 가리키는 시간은 무슨 시간인가? 그것은 아버지께 예배하는 시간이다(21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참된 예배자들이 아버지께 예배하는 시간이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23절). 예수님은 그 시간이 “이때”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것은 “참된 예배자들”이 예배하
는 시간임을 알려주셨다(23절).


참된 예배자들은 어떻게 예배하는가? 그들은 “영과 진리로”(23, 24절) 예배한다. 이들은 과거에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했던 여자의 조상들과 다르며, 현재에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유대인들과도 다르다(20절). 왜냐하면 참된 예배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때”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시간을 가리킨다.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시간은 언제나 현재이다. 종말론적인 현재이다. 참된 예배는 성령과 진리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과 진리로 예배한다면 언제나 참된 예배이다. 성령은 영원하며, 말씀도 영원하다. 그러므로 성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면 참된 예배는 과거에도 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때”는 종말론적인 현재를 가리킨다.

우리는 예배의 종말론적인 현재에 관한 예수의 말씀에서 두 가지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관심하는 것은 영과 진리이다. 예수께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진술에서 영과 진리에 대한 진술로 나아간다.

① 성령
먼저 예수님은 참된 예배와 관련하여 성령을 말씀하셨다. 인간(조상)과 공간(장소)에 관해서만 알고 있는 사마리아 여자와 달리 예수님은 성령을 말씀하신다. 땅의 세계를 넘어 영의 세계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다”(요 3:34).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성령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다(중생의 영, 보혜사, 진리의 영 등등). 그런데 성령에 대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요약하는 표현이 있다. “성령은 살리는 분이다”(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다. 이것은 성령의 활동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성령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든지(세례, 은사, 충만, 열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성령은 살리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성령은 영혼에 생명의 변화를 일으키신다. 그래서 아무리 성령을 체험했다고 말해도 생명의 약동을 체험하지 못했으면 그것은 거짓이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영혼에 생동력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성령으로부터 영혼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요 3:6).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참된 예배가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성령 안에”는 성령에 소속되는 것, 성령에 붙잡히는 것, 성령에 포획되는 것을 가리킨다. 오직 성령에 소속될 때, 성령에 붙잡힐 때, 성령에 포함될 때 인간은 생명을 얻는다. 성령은 살아있는 영이실 뿐 아니라 살려내는 영이시다. 성령은 자동사적으로 생명을 지닐 뿐 아니라 타동사적으로 생명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성령에 포획될 때 생동력이 있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포획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서 “성령 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사람은 오직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 성령은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게 한다. 성령은 예배의 주관자이시다.

 

성령은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중보자이시다. 그러므로 성령과 관련되어 있을 때 인간은 힘이 있다. 예수님도 성령에 이끌림을 받으셨기 때문에 사탄을 이기셨다(마 4:1). 사도 바울도 성령에 사로잡혔기에 죽음도 불사하고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을 감행했다(행 20:22). 성령 안에 있을 때 신자는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핍박도 헤쳐 나간다. 성령 없이는 인간은 어떤 상태에서도 무능하고, 성령이 있을 때 인간은 어떤 상태에서도 유능하다. 성령은 사람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성령은 우리를 뜨겁게 달구는 분이다.

② 진리
예수님은 진리로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사마리아 여자가 말한 예배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예배였다. 이와 달리 예수께서는 진리에 기초한 예배를 강조하신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22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구원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는 구원 지식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언급한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요 17:17). 예수께서는 구원에 관해서 무지한 여자와 달리 진리를 말씀하셨다. 지식 없는 신앙은 안 된다(요 17:5). 그러므로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지성을 잃고 감성만 남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회복해야 한다. 베뢰아 성도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상고했던 것처럼 말씀에 집착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말씀에 전무했던 사도들의 길을 따르자. 성경을 가르쳐라. 우리는 진리를 가르치면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도 성도들은 말씀을 기다리고 있다. 놀랍게도 이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교육에 치밀한 이단에 빠지고 있다.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목회자는 말씀에 매달려야 한다. 목회자는 다른 어떤 지식보다도 성경을 잘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성경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성경연구 외에 다른 일에서 시간을 잃지 말라. 잡기를 끊어라. 목회자에게서 말씀이 나와야 한다. 목회자는 오직 진리로 자신의 권위를 입증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말씀이 없기 때문에 목사에 대한 존중함이 없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요 3:34). 또한 교회가 살 길은 말씀에 있다. 진지한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설교는 가르침으로서의 설교이다. 우리의 설교는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서의 설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처럼 영과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3) 영이신 하나님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것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체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24절). 예수님은 여자와의 대화 끝에서 하나님이 영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여자가 배워야할 절대적인 진리는 하나님이 영이라는 사실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를 영이신 하나님 앞에 세우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전통)과 공간(장소)을 넘어선 분이시다. 하나님은 물질과 육체를 초월해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충만하시고 무한하시고 거룩하시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구약성경에서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시 18:7-19; 나 1:2-8). 하나님 앞에서는 공간이 해체되고 시간이 정지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면 만물이 그 앞에서 잠잠하다(합 2:20; 슥 2:13). 영이신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발생한다. 경외는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새로워지며 다시 출발한다. 영이신 하나님 앞에 서기까지 우리는 결코 다시 시작할 수 없다. 우리 스스로는 언제나 엉망이며 뒤죽박죽이며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참된 모습을 발견한다. 영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숨김도 감춤도 없이 드러난다.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다. 우리의 연약, 부족, 미흡, 불결을 발견한다. 영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작아지고, 줄어들고, 사라진다(사 6:1-5). ‘절대 유’와 ‘절대 무’의 차이를 인식한다. 그리고 바로 영이신 하나님 앞에서부터 우리는 다시 순수해지고, 정직해지고, 성결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마치는 말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가 영이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정말로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영이심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영이심을 안다면 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 성령과 진리의 도움으로 너의 영혼을 드려라, 껍질로 만나지 말고 속으로 만나라,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 우리도 하나님이 영이심을 가르쳐 교회를 하나님의 무한한 세계에 접근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성도들을 영이신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한다. 성도들이 영의 세계에서 거닐게 해야 한다. 물질과 육체의 세계에서는 이제 그만 방황하고 영의 세계에서 거닐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에 참여하며 포함되게 해야 한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말하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말하자(2007년 6월 7일 자 기독교개혁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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