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를 말하다 (요 3:1-8), 조병수 교수(신약신학,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無益박병은목사 | 2012.12.04 11:26 | 조회 7898


1. 니고데모의 방문(1-2절)
우리의 인사는 매우 형식적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처한 인생의 문제를 알고 인사를 나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사가 형식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에게 “내 사정을 알고 인사하느냐”고 되묻지 않는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사는 껍질에 관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도 심각한 인사를 나누면 서로 힘들어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인사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황하게 될 것이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께 대화를 신청하였다. 그의 인사는 당시의 유대인들과 사뭇 다르게 시작되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보통 ‘샬롬’으로 인사를 했는데, 우리와 다를 바가 없이 이것도 역시 매우 형식적인 인사였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만나러 가면서 어떻게 인사할 것인가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는 보통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관원이며(1절) 이스라엘의 선생(10절)이었기 때문에 놀라운 예수님께 상투적인 인사를 넘어 자기의 수준에 맞는 인사, 조금 더 고차원적인 인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질 다른 인사를 함으로써 특별한 사람으로 각인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자 다음과 같이 말을 꺼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는 이 표적을 아무라고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관원이며 이스라엘의 선생답게 예수님을 잘 관찰했던 것처럼 보인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선생인 것처럼 예수님도 선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두 번이나 하나님을 언급하는 고차원적인 인사를 했다. 니고데모는 형식적인 인사를 버리고 막 바로 자기의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본론으로 들어간 인사이다. 직접적으로 문제를 건드린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으로부터 깊은 이야기를 바로 이끌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3-8절)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인사에 대하여 이상한 반응을 보이셨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를 칭찬하거나 그의 인사를 기뻐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인사를 받으면서 니고데모가 역시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지 아니하셨다. 우리 같으면 이런 인사를 하는 사람과 당장에 친해질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셨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놀라운 안목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무시하셨다. 왜냐하면 니고데모는 단지 예수님의 외면을 본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표적들을 행하셨는데(요 2:23), 니고데모는 이런 표적들을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선생이라고 평가했다. 문제는 예수님에 대한 니고데모의 관찰이 이적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는 이 표적을 아무라고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선생이라고 인사한 것이 아니다. 그의 인사는 단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에 대한 외면적인 관찰에 근거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속을 알지 못하고 겉만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인사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말을 듣고 감동을 받지 않았고 흥분을 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외면적인 관찰에 근거한 인사에 대하여는 대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그런 주제를 가지고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눌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에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다르게 자기의 말을 시작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말과 상관없이 자기의 말을 하셨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겉사람에 관심했다면,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속사람에 관심하셨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외면에 집착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영혼의 문제를 건드셨다: 네가 거듭났느냐, 네가 하나님 나라를 보았느냐.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니고데모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거듭났느냐 하는 것과 하나님 나라를 보았느냐 하는 것이다. 비록 니고데모가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관원이며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지만, 거듭나지 않았다면 또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했다면 예수님의 눈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고데모의 가치는 육체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엉뚱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관심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다. 육체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니고데모가 누구냐 하는 것은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육체에 영광스러운 신분을 가지고 있지만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니고데모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니고데모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 거듭나는 것
예수님께서는 먼저 거듭나는 것에 관해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첫째로 도전한 것은 거듭 나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니고데모의 영혼의 문제를 지적했다. 영적인 면에서 볼 때 이것은 니고데모의 현재 인생의 의미를 송두리째 부인하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바리새인인 것, 유대인의 지도자인 것, 이스라엘의 선생인 것, 이 모든 것이 예수님께는 중요하지가 않았다. 영적으로 거듭 나지 않는다면 육체적인 상태는 의미가 없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거듭 나야 한다고 말씀했을 때 그 말 자체가 니고데모에게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철저하게 부인한 사람을 처음 만나본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철저하게 부정되기는 처음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당혹스러운 것이었는지는 니고데모의 반문을 살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생의 가치와 관련해서 뿐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같은 말을 반복해서 질문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4절).

 

니고데모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영혼의 문제와 관련된 말씀을 육체와 관련하여 이해했기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니고데모는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육체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말았다.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문제를 말씀하시는데 니고데모는 육체의 문제를 말한다. 대화의 관점이 서로 빗겨나갔다.

니고데모는 육체의 세계를 떠나지 못했다. 니고데모는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의 이해의 폭은 육체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육체의 논리로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실 육체의 세계에 매여 있는 사람이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가 내일을 알지 못하고, 한철을 사는 메뚜기가 내년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영생을 알 수가 없다.

2) 성령으로 나는 것
예수님께서는 육체에 매여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더욱 분명하게 거듭 남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 이제 예수님께서는 거듭난다는 말이 성령으로 나는 것임을 알려주셨다(“물로 나는 것”에 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는데, 우리는 간단히 칼빈의 견해를 따라서 “물과 성령”을 “물 곧 성령”으로 받아들여 물이 성령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거듭 나는 것은 성령으로 나는 것을 가리킨다.


현상적으로 볼 때 사람이 성령으로 나는 것은 마치 아기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는 것과 유사한 표현이다. 육체적으로 볼 때 아기의 기원이 어머니라면, 영적으로 볼 때 거듭난 사람의 기원은 성령이다. 그래서 아기가 어머니에게서 났다고 말하는 것처럼 거듭난 사람은 성령에게서 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기가 어머니에게서 온 사람이라면, 거듭난 사람은 성령에게서 난 사람이다. 성령은 거듭난 사람의 원인이시다. 어머니가 아기를 낳듯이 성령이 거듭난 사람을 낳는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관원이며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가 육체(어머니)로부터 난 것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가 육체(어머니)로부터 나와서 바리새인과 유대인의 관원과 이스라엘의 선생이 된 것에는 관심이 없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관심하는 것은 성령으로 난 사람이냐는 것이다. 니고데모에 대한 예수님의 질문은 성령께서 너를 낳았느냐는 것이다.

 

성령이 너의 원인이냐는 것이다. 성령께서 너를 변화시켰느냐? 성령이 너를 사로잡았느냐? 성령의 추진을 받고 있느냐? 성령의 통치를 받고 있느냐? 성령의 사람이 되었느냐?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누구에게서 난 사람이냐고 묻고 있다. 육체로부터 난 사
람인가 아니면 성령으로부터 난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이렇게 묻는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기”(6절) 때문이다.


예수님의 질문은 간단하지만 매섭다. 그것은 니고데모의 외면을 뚫고 들어가 내면을 파고드는 질문이다. 누가 너를 낳았느냐? 너를 낳은 이가 누구냐? 육체냐 아니면 성령이냐? 만일에 니고데모가 여전히 육체로부터 난 사람이라면 그는 육체적인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의 나라에 속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이다(6절). 그가 아무리 뛰어난 신분을 지니고 있다 손치더라도 인간의 나라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육체로 난 니고데모에게 인간의 나라는 그의 한계이다. 그는 육체의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3)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과 들어가는 것
예수님께서는 육체에 매여 있는 니고데모에게 가장 충격적인 말씀을 주셨다. 그것은 거듭 난 사람, 곧 성령으로 난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보며 하나님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사람이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 거듭 남의 결과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다. 거듭 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강조점은 하나님 나라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놓치고 말았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앞부분에 대한 내용에 정신을 쏟다가 뒷부분을 놓치고 만 것이다. 거듭 남에 대한 말씀에 신경을 쓰다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흘려버리고 만 것이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거듭 나는 것, 곧 성령으로 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보고 거기에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다. 거듭 남, 곧 성령으로 나는 것이 목적하는 바가 하나님 나라를 보고 거기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예수님의 강조점이 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수님의 강조점은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 하나님 나라를 보고 거기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구체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을 보듯이 생생한 감정, 어디에 들어가듯이 생생한 체험을 말한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민감하고 하나님을 경험한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느끼며 살고 하나님 나라를 즐거움으로 삼으며 산다. 거듭 난 사람, 곧 성령으로 난 사람은 인간의 나라에 대한 시각을 떨쳐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시각을 가진다. 그는 더 이상 세상나라에 눈을 고정하지 않는다. 이제 그는 하나님 나라를 응시한다. 세상 나라를 목적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목적한다(마 6:33절).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인간의 나라에 눈을 두고 살던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삶으로 변환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땅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이다. 그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영에 속한 사람이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된다. 그가 속한 나라는 하나님 나라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거듭 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새롭고 능력있는 인생을 산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시각을 가진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의하여 충격을 받으며 산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 하에서 산다. 하나님 나라를 목적하며 산다. 하나님을 상대하면서 산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았는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는가 묻는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질문하시는 것은 무엇을 보며 살고 있는가, 어느 영역에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인생의 목적과 범위가 무엇인가 묻고 있다.

마치는 말
밤에 대화를 신청하기 위해서 찾아온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보통 인사를 뛰어넘는 인사를 했다. 그것은 당시의 인사와 비교해 볼 때 정말로 놀라운 인사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완전히 다른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너는 거듭 났느냐? 너는 성령으로 났느냐? 너는 하나님 나라를 받았느냐?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육에 속한 사람인지 영에 속한 사람인지를 물으신 것이다. 네 영혼이 성령으로 변화되었느냐, 네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였느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관원이며 이스라엘의 선생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니고데모와 대화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던지는 질문은 영혼의 문제에서 볼 때 “너는 누구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던지신 질문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질문은 “너는 누구냐”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겉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속을 보셨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외면을 보고 대화를 신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내면에 관해서 질문하신다. “니고데모야, 겉으로 말고 속으로, 외면으로 말고 내면으로 너는 누구냐? 너는 육체로 난 사람이냐 아니면 성령으로 난 사람이냐?”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서 듣기를 원하는 대답은 외면적으로 “나는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관원이며 이스라엘의 선생이다”라는 대답이 아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서 듣기를 원하는 대답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와 상관된 사람이다”라는 것이다(2007년 5월 30일 자 기독교개혁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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