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관점 신학 원광연목사

無益박병은목사 | 2020.06.13 13:00 | 조회 1864

새 관점 신학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3:20)

 

오늘날 이른바 바울에 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 혹은 약자로 “NPP.” 이후 새 관점 신학이라 칭함)이라 불리는 새로운 주장이 신학계에 등장하여 그 영향력이 꾸준히 확대되고 있으며, 한국 교회에까지 그 영향이 서서히 미치고 있습니다. “새 관점 신학은 종교개혁 시대 이후 교회 안에 정착되어온 율법의 행위의롭다 하심의 교리에 대한 이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그것을 바라볼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1) 물론 이는 주로 유대교와 사도 바울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관련된 문제에 대한 논의이므로, 일반 성도들의 실질적인 신앙생활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뼈대가 되는 핵심적인 도리를 부인하는 것이라면, 이는 이단적인 사상으로서 결코 가벼이 지나칠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신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곧바로 목회자들과 목회 준비를 위해 훈련받는 목회자 후보생들의 사상과 영성의 문제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교회 전체의 영적 상황에 위중한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2)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칼빈은 각각 다음과 같이 진술함으로써 의롭다 하심의 교리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의 교리는 머리요 모퉁이돌이다. 오직 이것만이 하나님의 교회를 낳고 양육하고 세우고 보존하며 지킨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교회가 단 한 시간도 존재할 수 없다(Sproul, Heart of Reformed Theology, 57에서 재인용).

“[의롭다 하심]에 대한 지식이 사라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꺼지며, 신앙이 제거되고, 교회가 파괴되며, 구원의 소망이 철저하게 무너진다(레이먼드, 바울의 생애와 신학, 574에서 재인용).

적어도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의롭다 하심이야말로 참된 교회의 사활을 판가름하는 성경의 지극히 중대한 핵심적 교리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심,” 혹은 칭의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과 교회의 교리적 이해를 전면 부인하는 소위 새 관점 신학의 이슈는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새 관점 신학의 논지들이 본문을 비롯하여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등의 여러 구절들의 바른 가르침을 심각하게 왜곡시켜 혼란을 초래하므로, 여기서 그 중점적인 내용과 문제점들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소개함으로써, 일선 목회자들과 성도들로 하여금 이에 대해 경계하고 대비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 자체는 지금까지 해온 로마서의 본문의 가르침을 깨닫고 살피는 기조를 벗어나는 면들이 있습니다. 신학자들의 복잡한 논지들이 얽혀 있으므로, 평소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오지 않은 분들에게는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는 분들은, 이 장를 건너뛰고 곧바로 다음 장으로 넘어가셔도 로마서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새 관점 신학의 주요 주장자들

18세기의 계몽주의적 사조로부터 전통적인 성경관과 신앙관에 도전하는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한 이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의 물결 속에서,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인하고 성경의 각양 가르침들을 시대에 맞게 새로이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신약학계에 밀물처럼 밀려들어 교회를 어지럽히고 부패시키는 결과들을 낳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새 관점 신학의 주장 역시 그 뿌리 혹은 시발점이 바로 그러한 자유주의적 사조에 있다 할 것입니다. “새 관점 신학1960년대 초 스웨덴 출신의 루터파 신학자 크리스터 스텐달이 그 첫 단초를 제공한 이후, 그 뒤를 이어 1970년대에 미국의 샌더스가 유대교와 바울의 사상에 대해 새로운 주장을 제기함으로써 새 관점 신학을 본격적으로 제시했고, 1980년대 후반 들어서 영국의 제임스 던이 그것을 발전시켰으며, 현재는 탁월한 언변가요 문장가인 영국의 톰 라이트가 각종 강연과 저술활동을 통해 그 대변자 격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그 영향력을 전 세계의 교회들에 확대시켜가고 있습니다. 물론 세부적인 사안들에 있어서는 이들 사이에 견해의 차이들이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사상 전체를 큰 틀에서 바울에 대한 새 관점3) 혹은 새 관점 신학의 테두리 안에 한 데 묶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스텐달과 샌더스, 던과 라이트의 논지들을 요점만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 1921-2008)

스텐달은 1961년에 발표한 사도 바울과 서구세계의 내성적 양심(The Apostle Paul and the Introspect Conscience of the West)과 그 이후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바울(Paul Among Jews and Gentiles)이라는 두 편의 논문을 통해서, 기존의 바울 신학의 입장을 뒤집는 논지를 제시했습니다. , 마르틴 루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복음적 개신교회가, 본문을 비롯하여 바울서신의 몇몇 구절들(3:38; 2:16 )에 나타나는 바울의 주요 가르침에 근거하여 율법의 행위의롭다 하심에 대해 믿고 전수해온 복음적 신앙의 기본 교리가 애초부터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율법의 행위로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이라는 성경적 교리의 타당성을 부인하면서, 그 교리는 바울의 가르침이 아니며, 오히려 어거스틴의 과도한 자기 불신과 죄에 대한 지나친 내적 성찰의 양심(introspective conscience) - 그의 고백록(Confessions)에서 이 점들이 잘 드러납니다 -에서 비롯된 것이요, 또한 루터가 어거스틴에게서 이어받은 그런 부정적 자기 성찰의 정서와, 또한 로마가톨릭교회와의 교리적, 정치적 갈등에서 겪은 압박감 등, 자기 자신의 개인적 상황을 바울 서신에 투영하여 읽은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정작 바울은 그런 가책이 전혀 없는 건강한 양심(robust conscience)을 지녔다고 주장했습니다. 스텐달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종교개혁의 모델은 루터의 고유한 종교적 심리의 산물이었으니, , 루터의 어거스틴주의적 배경, 로마교회와의 갈등, 그리고 그의 예민한 양심이 한 데 어우러진 것이었다. 그는 중세 후기의 경건의 틀 속에서 바울을 읽었던 것이다. 수 세기 동안 서구 세계는 성경저자들이 우리와 동일한 문제점들과 씨름하고 있었다고 잘못 생각해왔으나, 성경저자들의 의식 속에는 애초부터 그런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Waters, Justification and the NPP, 24).

샌더스는 이러한 스텐달의 결론을 정리하여, “루터의 문제점은 바울의 문제점과는 달랐고, 따라서 루터의 눈으로 바울을 바라본다면 이는 그를 오해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4) 스텐달은, 바울의 주요 관심사는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갖는 영적 죄책감의 문제가 아니라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문제와 결부되는 교회 공동체의 전체적인 이슈였다고 보았고, 그러므로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은 한 마디로 바울을 오해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논지가 훗날 새 관점 신학의 중요한 포인트로 발전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스텐달은 이런 전제 하에서, 로마서 1-8장은 로마서의 서론에 불과하며 로마서의 핵심은 오히려 유대인의 문제를 다루는 9-11장에 있고, 그 부분은 로마서는 물론 바울 사상 전체의 중심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로마서에 나타나는 바울의 주요 관심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관계의 문제였으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그런 관심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가 사용한 여러 가지 부수적인 논지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Waters, Justification and the NPP, 25).

샌더스(E. P. Sanders: 1937- )

샌더스는 바울에 대한 기존의 해석의 다양한 흐름들을 하나로 종합하고, 고대 유대교의 원 자료들을 새롭게 읽어내어 그 결과로 하나의 설득력 있는 논지를 제시하는 것으로써 독창성을 발휘했습니다(Waters, Justification and the NPP, 35). 그는 1977년 출간한 자신의 저서 바울과 팔레스타인의 유대교(Paul and Palestine Judaism)를 통해 신약학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구약외경(外經: apocrypha)과 위경(僞經: pseudepigrapha), 사해 사본과 랍비 문서 등, 기원전 200년경부터 기원후 200년경까지의 고대 유대교의 문헌을 면밀히 검토하여, 유대교의 신학 사상과 사도 바울의 사상에 대해 그 당시까지 정설(正設)로 인정받아온 기존의 논지를 뒤집는 새로운 논지를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장은 한 마디로, 그 시대의 유대교 사상의 골자는 율법을 순종하며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의에 이르러 구원을 받는다고 믿은 율법주의(legalism)가 아니었고, 그가 칭하는 대로 언약적 준법론(遵法論)(covenantal nomism)5)이었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는 오백 여 년 동안, 바울이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완전히 배격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론을 제시했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샌더스는 스텐달의 논지를 좇아, 이런 기존 교회의 가르침은 어거스틴과 루터의 안경을 쓰고 유대교와 바울을 바라보는 그릇된 논지라고 반박하고, 그 스스로 언약적 준법론이라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유대교와 바울의 구원론을 동일한 줄거리로 묶은 것입니다.

그가 제시한 소위 유대교의 언약적 준법론이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며, 이 언약을 통해 그의 백성의 일원이 됨(“getting in”)으로써 구원을 얻으며, 그 이후 하나님이 정하신 특정한 규정들 - 안식일 계명, 할례에 관한 율법, 기타 각종 의식법 등 - 에 순종함으로써, 또한 그 규정들을 어기고 범죄할 경우 회개함으로써, 구원 얻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신분을 유지해나간다(“staying in”)는 사고를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으며 율법의 특정한 규정들을 준수함으로써 그 백성의 지위를 유지한다고 믿었고, 이것이 당시 유대교의 구원관이었다는 것입니다(Waters, Justification and the NPP, 61).

샌더스는, 사도 바울의 구원관 역시 이러한 유대인의 구원관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새로운 믿음으로 인해 약간의 수정을 가할 수밖에 없었으나, 큰 틀에서는 그의 구원관이 여전히 유대교의 언약적 준법론에 포섭된다는 것입니다. 샌더스가 제시하는 바울의 변형된 언약적 준법론은 기본적으로 다음의 형식을 취합니다: 세례를 통해 언약 백성이 되며, 언약 백성이 되면 그 멤버십(membership)에 근거하여 구원이 베풀어지며, 특정한 계명들에 순종함으로써 - 혹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회개함으로써 - 언약 백성의 지위를 계속 유지해 간다는 것입니다(Waters, Justification and the NPP, 61).

이처럼 바울이 유대교와 동일한 사상적 틀 속에 있었다면, 어째서 그가 그토록 유대교의 사고를 거부하고 탄핵했는가?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샌더스는 이에 대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 받은 바울로서는 유대교의 사고에 대해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고 봅니다. ,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다는 것과, 이방인들을 차별하며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었고, 바로 이 때문에 그가 유대인들의 신앙관을 거부하고 탄핵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샌더스는, “바울이 유대교를 그릇되다고 본 것은 그것이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합니다(Beilby & Eddy, eds., Justification: Five Views, 58).

샌더스에 의하면, 바울이 말씀하는 의롭다 하심이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되는 것을 뜻하며, 또한 란 곧 그 언약 백성의 멤버십(membership)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샌더스의 주장은 바울의 칭의”/“의롭다 하심의 교리에 대한 기존의 교회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다른 이해일 수밖에 없습니다. 후에 톰 라이트는 샌더스의 이러한 주장을 더욱 발전시켜서 그의 핵심적인 논점으로 삼게 됩니다.

제임스 던(James D. G. Dunn: 1939- )

던의 경우는 로마서의 중요한 표현인 율법의 행위의 의미에 대한 주장을 통해 이목을 끌었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율법의 행위란 구약의 율법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갖가지 도덕적 요건들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자가 언약 안에 남아있기 위해 ... 필수적인 일을 행하는 것(Dunn, Romans, 159)을 의미하며, “필수적인 일을 행한다는 것은 곧, 할례와 안식일 법규와 기타 의식법 등,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요건들을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하여 던은 율법의 행위를 유대인의 정체성의 표시(identity marker),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 짓는 경계의 표시(boundary marker), 혹은 멤버십의 배지(badge of membership)로 봅니다(Horton, Justification, 2, 106). 던에 의하면, 이방인들이 언약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율법의 행위- 할례와 안식일 법규와 기타 의식법 등 - 을 준수하여 그 경계의 표시를 지니고 유대인의 영역 속으로 들어와야 했고, 이는 결국 그들이 이방인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유대인이 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은,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지 않고 그들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고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고, 그리하여 그처럼 이방인들을 원천적으로 분리시키고 배척하는 유대인의 편협적인 민족주의의 자세를 배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라는 선언을 통해서 그러한 자신의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던에 의하면, 바울이 말씀하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인식은 헬라적인 사고이며, 히브리적 사고를 지닌 바울의 이해에 따르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다는 선언이며, 이러한 선언은 여러 차례 -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의롭다 하심은 오직 한 번만 있는 것인데 반하여 -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이란 처음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는 그의 행위나, 혹은 누군가를 처음 언약 백성의 일원으로 맞아들이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이란, 누군가가 그 언약 내에 있다고 하나님이 인정(認定)하시는 것이며, 이 일은 처음에도 있고, 계속 반복되기도 하고, 혹은 그의 백성에 대해 최종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Waters, Justification and the NPP, 103-4).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바울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의 신학에는 신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는 바 믿음과 행위로 말미암는 최종적인 의롭다 하심이라는 단서가 붙어야 한다(Beilby & Eddy, eds., Justification: Five Views, 61).

던에 의하면, 바울은 유대교에 대한 열정은 버렸으나, 유대교 자체를 버리고 개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언약 백성의 경계의 표시로 강조하였으나, 이는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제안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왜곡된 유대교의 정신을 참된 옛 유대교의 정신으로 회복시키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톰 라이트(N. Tom Wright: 1948- )

스텐달, 샌더스, 던에 이어서, “새 관점 신학을 복음주의/개혁주의적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는 물론 일반 교회들에게까지 소개시키고 유행시킨 인물은 바로 톰 라이트입니다. 그는 영국 앵글리칸 교회의 주교로서 오랫동안 교구 목회에 몸담아 온 인물로, 왕성한 저술 활동은 물론 설교와 강론 등 목회 사역과 관련한 활동을 통해서 그 동안 학계에 머물러 있던 새 관점 신학의 영향력을 교회 전반에까지 확대시키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제 그가 주장하는 새 관점 신학의 요점들 가운데 교회의 영적 생명과 직결되는 중요한 몇 가지를 간단히 소개하고, 그 문제점들을 지적하기로 하겠습니다.

톰 라이트의 주장의 요점들

1세기 유대교와 이에 대한 바울의 부정적 자세

1세기 팔레스타인의 유대교에 대해 라이트는 샌더스가 제시한 견해 - 그 당시의 유대교가 전통적인 견해대로 율법주의에 근거하는 행위의 종교가 아니라 샌더스 자신이 붙인 명칭대로 언약적 준법론을 따르는 은혜의 종교였다는 - 를 그대로 인정하고 채용합니다. 그는, “몇몇 비판들이 있기는 했으나, 내가 지금까지 본 바로는 그것[샌더스의 견해]1세기 유대교에 대한 묘사로서 완전히 옳은 것 같다라고 말합니다(Eveson, Great Exchange, 127).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진술하기도 합니다:

일상적으로 생각해오던 것과는 달리, 바울 당시의 유대교는 행위로 말미암는 의를 주장하는 율법주의적인 종교가 아니었다.... 바울이 그런 유대교를 공격했다고 상상한다면, 이는 유대교와 바울 모두를 크게 곡해하는 것일 것이다.”6)

라이트의 이러한 발언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샌더스의 새로운 주장이야말로 바울에 관한 라이트 자신의 모든 주장의 출발점이니 말입니다. 바울 당시의 유대교가 기존에 이해해오던 것처럼 율법주의가 아니었다면, 바울이 유대교를 배격한 것도 율법주의 때문이었다 할 수가 없고, 이는 다시 지난 5백여 년 동안 개신교가 가르쳐온 바울의 논지가 전혀 그릇된 것이었다는 뜻이 되며, 따라서 그와 관련한 바울의 가르침들을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재조명해야 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7)

그러나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샌더스나 라이트의 새로운 주장이 과연 전적으로 옳은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만일 그들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면, 바울에 대한 그들의 주장 역시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의 객관적인 평가는, 이 새로운 주장의 신빙성이 이들의 주장처럼 확고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8) 미국의 원로 신약학자인 도널드 해그너(Donald A. Hagner:1936-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샌더스의 견해에 일부 동의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순전한 언약적 준법론자들이 1세기에 일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율법이 은혜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잊거나 무시하고서 율법에 충성을 다했던 사실상의 율법주의자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며, 바울은 바로 이들을 향하여 율법과 상관없는 복음을 선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율법주의를 공격한 것이라는 전통적인 견해를 거부할 필요가 없다(Hagner, New Testament, 372-3).

또한 미국의 신약학자 가이 워터스(Guy Waters)는 샌더스의 노력에 인정할만한 점이 있음을 시인하면서도, 그가 자신의 결론에 부합하지 않는 사료들을 너무 성급하게 제쳐버림으로써 유대교에 대한 그의 묘사가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치우쳤으며 또한 바울 시대의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였다는 것도 확실히 입증하지 못했다고 봅니다(Waters, Justification and the NPP, 55). 미국의 성경신학자 제임스 해밀턴(James M. Hamilton, Jr.)은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샌더스가 재구성한 팔레스타인 유대교 신앙에 기초를 둔 라이트의 웅장한 건축물이 내려앉고 있다. 당시의 기록들을 비교 검토한 결과, 우리는 라이트가 샌더스에게서 받아서 세운 건물의 기초석의 형태가 뒤틀려 있음을 보아왔다.... 바울의 회심의 본질과 의롭다 하심에 대한 그의 가르침에 관해 라이트가 제시하는 결론은 그것이 샌더스의 유대교에 근거하는 정도만큼 그 모습이 뒤틀려진 것이다(Piper, Future of Justification, 145, 1).

영국의 신약학자인 사이먼 게더콜(Simon Gathercole: 1974- ), 바울이 유대교를 비판한 것은 율법에 순종할 능력이 있다는 그들의 자신감 혹은 자랑 때문이었지, 새 관점 신학을 주장하는 자들의 그릇된 주장처럼 그들이 정체성의 표지에 근거하여 이방인들을 배척한 것 때문이 아니었다고 결론짓습니다(Beilby & Eddy, eds., Justification: Five Views, 66).

이처럼 신중하고도 비판적인 반대의 목소리들이 학계에서부터 꾸준히 제기되는 점들을 볼 때에, 샌더스가 제시하는 유대교의 모습을 그 당시 유대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 간주하고 그 토대 위에 신학적 건물을 세우려 하는 라이트의 신학 작업은 매우 위태롭고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라이트의 주장을 채용하여 교회의 사역에 적용시킨다는 것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짓는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할 것이니 말입니다(7:26-7).

율법의 행위

라이트는 율법의 행위에 대한 던의 주장을 그대로 채용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율법에서 요구하시는 갖가지 도덕적인 요건들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자가 행함으로써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시이며, 할례, 안식일 준수, 기타 의식법 등을 준수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를 배격한 것은 율법의 행위들이 유대인 중심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서 이방인들을 제외시키는 그릇된 표시였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보기에는 이스라엘이 오직 유대인만을 위한 의 지위, , 언약 백성의 멤버십을 설정하려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Piper, Future of Justification, 151). 그러나 이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그를 믿는 믿음이야말로 - 할례나 안식일이나 의식법 등의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합당한 유일한 표시였다는 것입니다. 라이트에게 있어서 유대인의 문제는 율법주의적인 자세가 아니라 바로 율법의 행위를 이방인들에게 강요함으로써 그들을 적대시하고 배척한 배타주의적 사고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에 대한 이런 새 관점 신학의 견해는 근거가 매우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의 조항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힘쓰는 행위들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견해가 훨씬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실 율법의 행위를 줄여서 행위로도 동일한 뜻을 나타내는데(4:2-6; 9:32), 이러한 사실은, “‘율법의 행위- ‘유대인에게만해당되는 토라(율법)에 대한 순종을 뜻하는 전문적인 의미가 아니라 - 일반적인 행위의 한 가지 특정한 양태임을 시사하는 것입니다(Moo, Romans, 208).

의롭다 하심

라이트는 의롭다 하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스텐달, 샌더스, 던 등이 제시하는 견해를 그대로 이어받아, 그것이 한 개인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선언이라고 봅니다(Piper, Future of Justification, 19).9) 요컨대, “의롭다 하심이란 한 개인이 언약 가족에 속한다는 [하나님의] 선언이라는 것입니다(상쇄서, 39).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의롭다 하심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에 관한 문제이며,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상쇄서, 19).10) 그는 교회가 오랜 세월 동안 종교개혁의 영향 아래서 의롭다 하심이라는 용어를 오해하여 잘못 사용해왔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말의] 요지는 의롭다 하심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한 개인이 은혜로 불신앙, 우상숭배와 죄로부터 벗어나 믿음과 참 예배와 삶의 갱신에로 이끌림 받는 과정이나 그 사건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과정과 사건에 대해서 바울은 모호하지 않고 명확하게 부르다라는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여러 세기 동안 기독교가 의롭다 하심이라는 단어를 그릇 사용해왔으나, 바울은 그 단어를 부르심에 즉시 뒤따라 일어나는 일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한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8:30).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들을 그의 백성이라, 그의 택한 자라, ‘할례당이라, ‘유대인이라,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선언하시며, 바로 그런 자들에게 디카이오-,’ , ‘의롭다,’ ‘언약 안에 있다는 지위를 부여하시는 것이다(Piper, Future of Justification, 41).

그러나 의롭다 하심에 대한 이런 이해는 사도 바울의 여러 본문의 용법과 어긋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3:4(“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의 경우는 언약 백성의 일원임을 선언하다라는 라이트의 정의가 전혀 들어맞지 않습니다. 또한 디모데전서 3:16(“그는 ...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의 경우도,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확인되고 선포된다는 뜻이지 그리스도께서 언약에 속한다는 것이 선언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13:38-9(“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의 경우는 의롭다 하심에 대한 기존의 교회의 이해를 전제해야만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납니다(참조. Piper, Future of justification, 40-1). 존 파이퍼 목사는 의롭다 하심에 대한 라이트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이 명확한 반대 의사를 표명합니다:

톰 라이트의 설명이 힘을 발휘하는 곳에서 과연 의롭다 하심이라는 성경적 가르침이 번성할 것인가에 대해 나는 낙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진정 말씀하는 바를 다시 확실히 제시하겠다는 그의 비전도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는다. 현 상태에서 그의 견해는, 선명한 가르침이 절실히 필요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 오히려 교회 안에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런 혼란은 라이트 자신의 표현의 모호함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도 하지만 ... 의롭다 하심에 대해 그가 제시하는 패러다임이 성경의 여러 본문들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그로 인해 많은 일반 사람들에게 무언가 반짝 깨달음을 얻는 특별한 경험(‘ah-ha’ experience of illumination)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을 더욱 부채질하기 때문이다(Piper, Future of Justification, 24).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轉嫁: imputation)

더 나아가 라이트는 의롭다 하심에 개입되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n)의 도리도 부인합니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피고가 재판장 를 받는다는 상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명백한 오류다. 언어가 그렇게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의 원한을 갚아주기 위해 행하실 때에, 그의 백성이, 비유적으로, ‘의 지위를 갖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갖게 되는 그 는 하나님 자신의 가 아니다.... 법정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재판장이 자기의 를 원고나 피고에게 전가하고, 주입하고, 물려주고, 전달해준다는 것은 무슨 말로 표현하든지 간에 말이 안 된다. ‘란 법정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이나 물건, 혹은 가스(gas) 같은 것이 아니다”(Piper, Future of Justification, 79-80).

그러나 전가의 도리를 부인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의 연결 고리가 모호해지고,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라이트의 입장이 아주 모호합니다(Waters, Justification and the NPP, 177). 위의 인용문에서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 아닌 재판장의 ’”만을 언급합니다. 위의 인용문에 준하여 논하자면, 라이트는 피고재판장만을 언급하지만, 바울이 전하는 핵심적인 도리는 피고인 죄인이 재판장 앞에 설 때에 자기 자신의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로부터 전가 받은 그의 를 지니고서 의인의 자격으로 선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후서 5: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이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미래의 심판과 행위

라이트는 의롭다 하심, , 개인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일원이라는 선언 외에, 미래의 심판 때에 이루어질 판결도 의롭다하심이라 부릅니다. 현재의 의롭다 하심은 그 마지막 심판 때의 의롭다 하심을 올바로 예상하고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의롭다 하심이란, 마지막 날에 - 우리의 죄악된 본성의 남은 것들이 삼켜지고 우리가 부활하시고 영광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온전히 닮은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 날에 - 이루어질 그 의로운 판결을 현재에 올바르고 적절하게 예상하는 것이다(Eveson, Great Exchange, 120).

그리고 그 마지막 심판 때의 의롭다 하심은 전 생애를 근거로” - , 평생을 통해 이룬 행위를 근거로” -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면서, 신자의 행위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요 또한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신다는 증표라고 합니다(Piper, Future Justification, 117). 그러나 이런 그의 가르침은 성경적인 가르침과 거리가 있습니다. 개핀 박사는 미래의 심판과 행위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 행위에 따라 이루어지는 미래의 심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 이외에 별다른 원리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마지막 심판은 이미 받은 현재의 의롭다 하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요, 그 심판 때에 신자들이 공개적으로 사면 받게된다는 것이다. 그 미래의 심판에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의 사면의 근거와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행위들은 ...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순전한 열매들과 증거들인 것이다(Gaffin, By Faith Not By Sight, 111-2).

개핀 박사의 설명처럼,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의 행위는 사면의 근거와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수단이 된 우리의 믿음순전한 열매들과 증거들로서 제시되는 것입니다. 이에 비추어 보면, 라이트의 주장은 오히려 율법주의적인 행위 구원의 개념에 더욱 가깝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새 관점 신학의 위험성

톰 라이트 등이 주장하는 새 관점 신학의 영향이 종교개혁자들의 성경적 가르침을 신앙의 근본으로 삼는 교회들에 날로 거세게 밀려들어와서 영적 혼란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제 새 관점 신학이 건전한 교회에 끼치게 되는 위험성을 지적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큰 줄거리 두 가지 점만 지적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적인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을 부정함

새 관점 신학의 위험성은 무엇보다 성경적 구원의 도리의 핵심이 되는 의롭다 하심을 흐트러뜨리고, 교회 내에 큰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도,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의롭다 하심]에 대한 지식이 사라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꺼지며, 신앙이 제거되고, 교회가 파괴되며, 구원의 소망이 철저하게 무너진다고 한 칼빈 선생의 발언이 참이라면, “새 관점 신학의 주장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꺼뜨리고 신앙을 제거하며 교회를 파괴시키고 구원의 소망을 철저하게 무너뜨리는지극히 심각한 오류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새 관점 신학은 신자의 구원과 직결되는바 바울 신학의 중심을 이루는 핵심적인 주제인 의롭다 하심의 문제를 본질적이 아닌 - 최소한 중심적이 아닌 - 주제로 격하시킵니다(Hagner, New Testament, 371-2). 그 문제를 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에 속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 문제가 더 이상 구원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갖게 하고, 결국 기독교 신앙의 본질 자체를 흐트러뜨리는 위중한 결과가 생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새 관점 신학으로 인하여 개인의 구원 문제가 점점 소멸되 ... 는 경향이 생기게되었다는 개핀 박사의 지적처럼(Gafin, By Faith, Not by Sight, 23), 이미 그러한 현상에 교회 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새 관점 신학은 죄의 심각성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현저하게 약화시킵니다. “새 관점 신학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관계 회복이 바울의 주 관심사였다고 가르침으로써 기독교의 구원의 사회적인 면만을 크게 부각시킵니다. 사도 바울이 가르친 의롭다 하심의 도리란 바로 인간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어버린 처절한 현실(3:23)에 대해 하나님 편에서 마련하신 놀라운 구원의 방도인데, “의롭다 하심을 그것과는 본질이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의 문제 자체를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게 만들고, 결국 사회적인 평등과 인간관계의 회복이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새 관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현저하게 약화시킵니다. “의롭다 하심이 변질되고, “가 시야에서 사라지니, 이 문제와 직결되는 구주 예수님의 역할과 그 분의 지위가 시야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바울이 그렇게도 존귀하게 높이며 우러러 섬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점점 잊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새 관점 신학의 주장들이 옳다면, 종교개혁 이후 교회가 가르쳐온 모든 핵심적인 교리들이 그릇되고 무익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루터도, 칼빈도, 청교도들도, 스펄젼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도, 다 그릇된 것이요, 헛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결코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자의 구원과 교회의 영적 생명이 달린 중대한 사안인 것입니다. 존 파이퍼는 다음과 같이 다소 완곡하게 라이트의 주장을 비판합니다:

라이트에 대한 나의 확신은 ... 복음과 의롭다 하심의 교리에 대한 그의 묘사가 너무도 일그러져있어서 성경적으로 신실하다고 인정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내가 판단하기에, 그가 저술한 내용은 필경 그리스도께서 주()이심을 죄인들을 위한 복된 소식으로 선명하게 전하지 않는 설교들의 유행에 기여할 것이고, 죄 아래 갇힌 자들에게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의로운 자로 설 수 있는 길을 올바로 보여주지도 못할 것이라 본다(Piper, Future of Justification, 15).

그리고 미국의 구약학자인 데이비드 머리(David Murray)는 라이트의 새 관점 신학의 폐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한 어조로 경고하는데, 필자 역시 이에 십분 공감합니다:

라이트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에 대해 역사상 지극히 위험하고 파괴적인 정의를 제시하고 대중적으로 유포시킨 책임이 있다. 그가 퍼뜨린 왜곡된 가르침은 계속해서 교회들과 개인의 삶에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11)

급진적인 재세례파적 정서를 조장함

새 관점 신학의 심각한 위험은 현재까지 교회 안에서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시고 교회를 진리 가운데서 보존해오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역사하심을 완전히 부정하는 오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전수되어온 핵심적인 교리들을 부인하고 새로운 주장을 하려면, 교회의 권위보다 상위인 하나님의 말씀의 성경적인 가르침의 전폭적인 뒷받침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그릇된 도그마를 깨뜨리고 새로운 그리스도의 복음적 신앙을 확립한 종교개혁의 역사의 오직 성경의 핵심적인 원리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새 관점 신학은 오백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성경을 통해 확인되고, 고백되고, 믿어져 내려온 핵심적인 성경적 교리를 전면 뒤집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스텐달이나 샌더스 같은 학자들의 주관적인 주장만을 근거로 해서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이고 있으니, 과연 이것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른다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합당한 일이겠습니까?

과거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이와 비슷하게, 마치 자기들이 최초로 성경을 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전통을 무조건 내던져버리는 극단적인 재세례파들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알리스터 맥그라스 교수(Alister E. McGrath: 1952- )는 다음과 같이 세바스티안 프랑크의 실 예를 제시합니다:

급진주의자들은 교부들(, 교회의 스승들)의 증언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세바스티안 프랑크(Sebastian Frank: 1499-1543)1530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리석은 암브로즈(Ambrose), 어거스틴(Augustine)이여, 제롬(Jerome)이여, 그레고리(Gregory)! 이들 중에 주를 아는 자도 없고,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치는 사명을 위해 보내심 받은 자도 없으니, 오오 어찌하랴! 모두 다 적그리스도의 사도들이로다’”(McGrath, Reformation Thought, 146).

라이트의 새 관점 신학의 정서가 이와 지극히 흡사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내려온 확고히 정립되어 있는 교회의 가르침을 단칼에 잘라버리고, 과거의 모든 신앙의 선배들의 가르침을 영적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해버리니 말입니다. 이런 행태에는 결코 하나님의 거룩하신 역사가 뒷받침된다고 볼 수 없습니다.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들을 하나님의 말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재확인하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그런 자세를 전혀 볼 수가 없고, 처음부터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무시해버리는 것으로 신학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니 이는 결코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 캐나다의 신학자인 스티븐 웨스터홈(Stephen Westerholm: 1949- )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을 이해하기를 원하면서도 마르틴 루터에게서 배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느끼는 학도들은 금속공예 같은 분야 쪽으로 직업 전환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성경 주해(exegesis)는 대가들에게서 배우는 것이다(Horton, Justification, 2, 26). 또한 복음주의적 교회사가인 스코트 마네치(Scott Manetsch)도 종교개혁자들과 그 이후의 교회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이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북아메리카의 복음적 개신교도들이 신학적 천박함과, 문화적 호기심과,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에 저항하고, 그들의 역사적 뿌리들 - 이는 식민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종교적 각성들은 물론, 16세기 유럽의 기독교 개혁 운동들에 있다 - 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다. 복음주의자들은 비텐베르크와 제네바로, 취리히와 에딘버러, 그리고 런던으로 향하는 이 여정 속에서 심오한 성경적 신학적 통찰의 세계를, 실천적 지혜의 풍성한 저장고를, 21세기의 삶과 사역을 위해 하나님이 그의 교회에게 주신 선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Piper, Future of Justification, 25에서 재인용).

결론

이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경고를 결론적으로 제시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주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20:29-30).

사도는 여기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교회 내에서 일어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그릇된 사설을 조장하는 말들을 퍼뜨리는 자들이 하나님이 교회 내에서 일어나리라는 말씀입니다. “새 관점 신학이 바로 그 어그러진 말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과연 무리일까요? 2천년의 교회 역사 가운데에 그런 어그러진 말이 교회 안에 퍼진 예가 허다하게 많습니다만,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로서 꿋꿋하게 시대마다 그 역할을 감당해왔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섭리와 성령의 역사하심의 덕분입니다. 이런 새로운 신학적 풍조에 대해 우리는 경각심을 갖고서 올바른 자세로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도행전 본문에 대해 설명하는 중에 칼빈과 피터슨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이 자기 정체를 드러낸 채 외부로부터 복음에 대해 저항해오는 경우와는 달리, 교회의 품속에서 원수들이 일어나 갑자기 가격하거나 사람들을 부추겨 넘어뜨릴 경우에는, 교회가 큰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러한 유혹거리들로 그의 교회를 단련시켜오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언제든 교회의 그릇된 목회자들이 이리처럼 사납게 달려들기 시작할 때마다, 우리의 믿음을 든든히 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방비해야 할 것이다.... ‘사나운 이리... 이란 사악한 사고들을 조장하는 장본인들이요, 이들은 자기를 좇는 제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마지막까지 애쓴다. 야망은 순전한 복음을 부패시키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거의 없으니 말이다(Calvin, Acts, 259).

각 시대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뿌리 깊은 죄악된 성향을 만족시키고자, 자기들의 사고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매혹시켜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인기를 끌려고 하기가 너무도 쉽다는 것이 역사에서 잘 드러난다. 죄가 갖가지 방식으로 진리를 왜곡시키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파괴적인 분열을 조장하는 것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목회자들은 실질적으로 인식하고 대처할 필요가 있다(Peterson, Acts, 571).

교회 역사를 보면 지금까지 시대마다 온갖 그릇된 어지러운 말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그로 인하여 교회가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그것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사실이 허다하게 나타납니다. 아리우스주의, 펠라기우스주의, 율법주의, 반율법주의, 알미니우스주의, 종교적 실용주의, 은사주의 운동, 개방적 유신론(Open Theism) , 셀 수 없는 그릇된 가르침들이 시대의 풍조를 좇아 교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새 관점 신학역시 그런 갖가지 그릇된 가르침들과 결국에는 동일한 운명을 맞게 될 것입니다. 왜요? 성경적인 뒷받침이 확고한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학자의 다음과 같은 전망은 결코 지나친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새 관점... 인간 경험의 현실과 또한 그 현실에 관여해온 기독교의 기나긴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지 못하므로, 아마도 옛 소련의 그 유명한 ‘5개년 계획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그 계획은 당시 사람들의 실제적인 현실과 괴리된 것이었고 결국 그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Paul F. M. Zahl, “Mistakes of the New Perspective on Paul,” Themelios, vol. 27:1[20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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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 관점 신학에 대해 필자는 로마서의 관련 본문들에 대한 여러 주석가들의 논평들과 더불어, 주로 다음의 문헌들을 참조하였습니다(상세한 문헌 정보는 참고문헌 목록을 참조하십시오): Beilby & Eddy, eds., Justification: Five Views; Eveson, The Great Exchange: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Horton, Justification, vol. 2; Piper, Future of Justification: Seifrid, Christ, Our Righteousness; Waters, Justification and the New Perspectives on Paul.

2. 미국 개혁주의 교회의 지도자 중 한 분인 리건 던컨(Ligon Duncan: 1960- )은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새 관점 신학]은 이미 여러 복음주의/개혁주의 신학교들의 성경신학 분야에 파고들어와 있다. 그 결과 목사 후보생들 중에 사도 바울과 칭의에 대한 이 새로운 견해에 설득되거나 최소한 그것에 영향을 받고 있는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이 새로운 현상들을 무시하게 되면, 목회자들과 신학생들과 일반 교인들이 복음 자체에 대한 역사적 개신교회의 올바른 이해를 경시하고 그것을 불신하는 사고를 갖게 될 위험이 크다”(Richard Philips, “The New Perspective on Justification,” https://www.ligonier.org/learn/articles/new-perspective-justification/ 2020530일 검색).

3. 이 용어는 1983년 제임스 던이 그의 논문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작 그는 톰 라이트가 1978년에 최초로 사용했다고 진술합니다(Beilby & Eddy, eds., Justification: Five Views, 57).

4. 2에서 인용한 Richard Philips, “The New Perspective on Justification”에서 인용.

5. 그는 자신이 밝혀냈다고 주장하는 유대교의 사상 체계를 “covenantal nomism”이라 불렀습니다. 여기서 “nomism”“legalism”(율법주의)과 의미상 구별이 불가능한데, 아마도 그 자신이 발견해낸 유대교의 사상을 기존의 “legalism”과 구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nomism”이라는 동의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신학계에서는 이를 언약적 율법주의,” 혹은 언약적 신율주의로 번역하나, 필자는 개인적으로 언약적 준법론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는 -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구원받은 자가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그 신분을 유지한다는 사상이므로 - 생각입니다.

6. Jeffery Smith, “An Overview and Critique of the New Perspective on Paul’s Doctrine of Justification” in Reformed Baptist Theological Review 3:1 (Spring, 2006), 88-9에서 재인용.

7. 미국의 원로 개혁주의 신학자인 Richard Gaffin 박사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은 ... 2 성전기의 유대교에 대한 새 관점이요, 그 시대의 유대교에 대한 기본적인 재평가에서 비롯된 바울에 대한 재평가라 할 것이다”(Gafin, By Faith, Not by Sight, 2).

8. 다수의 주석가들이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샌더스의 주장에 의문을 표시합니다. Moo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내 생각에는 당시의 유대교가 샌더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율법주의적이었다고 결론 지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Moo, Romans, 216). 참조. Longenecker, Romans, 362-70; Stott, Romans, 102-4; Thielman, Romans, 190-5; Kruse, Romans, 171-6; Schreiner, Romans, 171-4, .

9. 그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1세기에 있어서 의롭다 하심이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누가 그의 백성의 일원인가에 대해 미래와 현재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정의였다”(Piper, Future of Justification, 19).

10. Gaffin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합니다: “새 관점 신학은, 종교개혁이 가르쳐온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죄인들 개개인의 구원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지 않고, 주로 ...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동등한 지위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상호 관계에 관한 문제로 보며, 따라서 공동체적이며 교회론적인 관심사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본다”(Gafin, By Faith, Not by Sight, 3).

11. http://headhearthand.org/blog/2013/10/23/is-n-t-wrights-book-on-the-psalms-a-dangerous-gateway-dr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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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요한계시록과 그리스도의 강림 계 12-14장 환상을 중심으로 오광만 목사 無益박병은목사 8605 2014.07.11 16:08
10 신구약 계시의 통일성과 경륜의 차이에 대한 소고 배현주 목사 無益박병은목사 7940 2014.02.18 14:39
9 이신 칭의는 개신교의 교리적 면죄부인가? 황대우 목사 無益박병은목사 7337 2014.02.18 14:28
8 새 관점 학파의 율법주의 이해에 대한 비판 박동근목사 無益박병은목사 9128 2014.02.18 14:27
7 바울에 대한 새 관점, 무엇이 문제인가? 이승구 목사 無益박병은목사 7769 2014.02.18 14:25
6 히브리서와 성경 신학의 중심으로서 언약사상 Jeffrey Fisher 無益박병은목사 9823 2013.12.30 00:07
5 신약성경에 나오는 구약 성경의 언약들 조병수 교수(신약신학, 합동신학대 無益박병은목사 11250 2013.08.11 08:28
4 하나님을 말하다 (요한복음 4:19-26), 조병수 교수(신약신학, 합동 無益박병은목사 7903 2012.12.04 11:32
3 하나님 나라를 말하다 (요 3:1-8), 조병수 교수(신약신학, 합동신학 無益박병은목사 7898 2012.12.04 11:26
2 요한계시록 파노라마 김성수교수(구약신학,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無益박병은목사 9599 2012.12.03 21:25
1 방언에 대한 이해 이광호박사(고려신학대학원) 無益박병은목사 8935 2012.12.03 2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