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강함과 부드러움 이승구교수

無益박병은목사 | 2013.10.01 22:28 | 조회 7319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강함과 부드러움

신학함과 인격의 모델로서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이승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1562년에 준비되어서 1563119일에 공식적으로 출판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 내용을 잘 살피면 아주 강한 개혁신앙의 선언이다. 그러나 이 교리문답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 본 거의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듯이 이 문답은 매우 부드럽게 진술되어 있고, 기본적으로 아주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고, 이를 읽는 사람들은 작성자들의 의도대로 진정한 기독교적 위로를 받게 된다.

이런 두 가지 상반되어 보이는 듯한 성격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큰 특성이라고 여겨서 이 논문에서는 이 요리문답의 강함과 부드러움을 여러 측면에서 드러내어 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들의 신학함과 기독교적 삶에 주는 함의를 이끌어 내고자 한다.

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선언의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강함과 부드러움

먼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이 세상에 나타난 배경을 살펴볼 때도 강함과 부드러움이 같이 있다는 점을 논의하려고 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공표된 1563년이면 이미 아우그스부르크 협약(1555)이 이루어진 이후라 독일을 포함한 신성로마제국에서는 통치자의 종교가 그 주민들의 종교가 되는 일(cuius regio, eius religio)이 관례화되었다.

그러나 그 때 선택 가능한 종교라는 것이 천주교회냐 루터파 교회냐 둘 중의 하나였다. 그 외의 다른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제국회의에서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563년 강력한 개혁파적인 신앙을 천명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제국회의 참여자들 모두에게 매우 심각한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이 새로운 요리문답에 대한 반대는 출간 직후부터 시작되어 1566년에 이르러서는 그 극치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해(1566)에 하이델베르크에서 통치하는 팔라티네이트(Palatinate, 독일에서는 Pfalz라고 한다)의 선제후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작성과 배후의 든든히 정치적 후원자였던 프레데릭 3(the Elector Frederick III of the Palatinate, 1515-76, 선제후로서의 재위기간은 1559-76) 아우그스부르크 제국 의회(the Diet of the Augsburg)에 소환되었다.

물론 상황은 다르지만 이것은 1521년 루터가 챨스 5(Charles V)가 소집한 보름스 제국회의(The Diet of Worms)에 소환된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 때(1521) 루터는 한명의 신부의 자격으로 소환되어 자신이 개혁하고자 한 신앙의 내용을 성경과 합리적 이유에 근거해 끝까지 붙든다고 선언하고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빠질 것인가 아니면 당시 교황으로 이미 1520년에 루터를 출교한다는 칙서(the Bull of Excommunication) 발표했던 레오 10(Leo X, 1475-1521, 1513년부터 재위)와 교황의 교회 문제 대리인인 제롬 알렉산더(Jerome Alexander, 1480-1542)가 요구하는 대로 이제까지 3년여(1517-1520) 말한 바를 철회하고 잘못했다고 할 것인가를 드러내어야 할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이고, 이번에는(1566) 팔라티네이트 공국의 통치자인 선제후 프레데릭 3세가 다른 독일 지도자들의 천주교냐 루터파냐 하는 압력 앞에서 자신의 개혁파적 신앙을 천명하고 선제후 지위에 위협을 받을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에로 소환된 것이다.

아우그스부르크 제국회의 기간 중인 1566514에 프레데렉 3세는 개혁파적 개혁을 다 고치라고t(he abolition of the changes) 이미 여러 번 명령한 강력한 통치자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Emperor Maximillian II, 1564-1576 재위) 앞에 서서 황제와 다른 제후들 앞에서 다음 같은 도전을 하였다고 한다;

제가 일전에 모든 제후들이 모인 앞에서 폐하 앞에서 공적으로 선언했던 바, 즉 그 어떤 시대, 어떤 계급의 사람이, 비록 그가 가장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성경으로부터 무엇인가 더 나은 것을 내게 가르칠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심정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하고, 그 신적인 진리에 기꺼이 순종하려고 한다는 그 말을 이제 제국 전체가 모인 앞에서 다시 반복하려고 합니다. 여러 제후들과 친구들 중에서 성경으로부터 더 나은 것을 가르치시는 분이 있으면, 나는 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기 성경이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친히 그리하신다면, 나는 그것을 큰 호의로 여기고 아주 감사할 것입니다.

이 도전에 대해 당시 제국 회의 장소에서 그 누구도 프레데릭 선제후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금 후에 작센의 선제후 아우구스투스는 프리츠 여!, 그대는 우리들 모두 보다 더 경건 합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 용감한 선언이 오히려 그가 성경을 떠나 이상한 방향으로 간다는 혐의를 풀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고, 역사(歷史)는 그를, 아우구스투스를 따라서, 경건한 프레데릭(Frederick the Pious)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 당시 천주교회냐 루터파냐?”의 선택만이 가능한 상황 가운데서 프레데렉 3세와 그의 통치지역인 하이델베르크에서 나온 이 신앙의 선언은 칼빈주의적인 것이라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이런 혐의에 대해서 프레데릭은 두 가지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1) 자신은 칼빈의 글을 읽은 적이 없다. 따라서 자신은 사람들이 칼빈주의라는 말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2) 자신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성경으로부터 성경에 근거하여 도출된 신앙을 표현한 것이라고 믿는다.

특히 이 두 번째 부분을 선언하는 그의 말을 다시 들어 보자:

성경 이외의 그 어떤 다른 근거에서 내가 이 신앙을 확고히 붙잡는 것이 아니니, 나는 이 신앙이 신구약 성경에 수립되어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는 그 신조에 반대되는 것을 하거나 받아들였다고 그 누가 성공적으로 (증명해) 보일 수도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 요리문답은 그 한마디 한마디가 인간적 원천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신적인 자료에서 이끌어져 나온 것이니, 이는 그 아래에 붙어 있는 성구들의 언급들이 잘 보여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프레데릭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선언하는 신앙의 내용이 철저히 성경적이어서, 이는 성경이라는 신적인 자료에서 나온 것이고, 따라서 이를 믿고 고백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를 믿고 고백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소위 칼빈주의가 무엇인지를 아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는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믿는 것이다. 여기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하여 우리가 흔히 종교개혁의 형식적 원리라고 부르는 오직 성경의 원리가 아주 잘 천명되고 있다. 우리들은 언제나 성경에서 나온 것만을 우리 논의의 최종적 근거로 한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종적 결정은 항상 성경이 말하는 것으로 한다는 이런 태도와 신조가 결국 성경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아주 분명히 하는 프레데릭의 태도는 우리 시대에 더 필요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부터는 성경과 신조를 대립시키는 경향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연관성 가운데서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을 대립시키는 태도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레데릭 선제후가 드러낸 태도야 말로 진정한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분명하고 강한 태도여야 한다. 비록 부족함이 있을 찌라도 신조에 표현된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잘 표현하려고 시도한 것이라는 이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프레데릭이 이 요리문답의 직접적 작성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프레데릭의 이 고백은 참으로 좋은 그리스도인의 옳고도 바른 태도이다.

하이델베르크의 신학자인 교의학 교수 자카리우스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 독일어로는 Zacharias Bär, 1534-1583)와 하이델베르크 성령교회(Heiliggeistkirche)의 담임목사였던 카스파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 1536-1587)가 앞장서고, 다른 신학부 교수들과 교회회의 위원들이 협력하여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요리문답에 대해서 이 고백서의 정치적 생성 원인이 된 프레데릭 선제후가 이 요리문답이 천명하는 신앙은 오직 성경으로부터 이끌어져 나온 것이며, 성경 외의 인간적 원천에서 온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한 것이다.

우리 시대에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정통적 교리의 내용이 성경적인 것임을 확신하고 그렇게 천명해야 할 것이다. 신조를 따라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을 고백하는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처음 고백자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고, 그것이 우리들에게도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강한 확신을 가진 신앙을 고백하는 방식은 매우 부드럽다. 그리고 다른 이들까지를 포괄할 수 있는 듯이 진술되고 있다. 그래서 이 신앙고백을 하면서 성경을 잘 공부하다 보면 점점 더 성경적인 사상에로 확고한 신념이 나타나게 되어 있으니, 이것은 매우 교육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을 가장 잘 느끼게 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성찬 이해에 대한 고찰로 나가 보기로 하자.

2. 성찬 이해에 나타난 강함과 부드러움

성찬에 대해서 진술할 때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루터파의 입장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성찬에 대한 적극적 진술에서도 명확히 개신교적 입장 가운데서 어떤 쪽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오랫동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성찬론이 칼빈적인가, 쯔빙글리적인가, 불링거적인가, 멜랑흐톤적인가, 아니면 그것들 중 일부를 결합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논의한 학자들은 이 중의 어느 하나의 명칭으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성찬론을 규정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래서 평생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연구하고, 모으고, 널리 논의하는 일에 헌신 했던 화란의 빌렘 베르붐교수는 팔리티네이트 공국의 다양한 신앙 고백적 흐름들의 최대 일치’(maximal consensus)최소의 불일치’(minimal dissensus)를 이룬 것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성찬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성찬에 대한 진술 자체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개신교 전체를 다 포괄 할 수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심지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성찬론이 멜랑흐톤적인가를 생각할 정도로 온건한 루터파 사람들이 들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프레데렉 3세의 부인인 마리아(Marie of Brandenburg, 1519 1567)(루터의 소요리문답으로 양육받은) 루터파적인 신앙에 거침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므로 성찬에 대한 표현에 있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상당히 부드럽게 표현하여 모든 개신교인들이 다 받아들일만하게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성찬론에서도 결국 개혁파적이니, 성찬에 대한 논의에서는 이를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곳에서, 46문에서 49문에서 아주 명백하게 개혁파적인 입장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을 알아챈 루터파 신학자들은,

이 부분에 표현된 것을 가르쳐서 칼빈주의 신학이 말하는 밖에서’”(extra Calvinisticum)라고 표현하고 하였다. 이를 성찬론에 넣어 이해하면 결국은 개혁파적인 성찬 이해가 나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큰 특성이다.

성찬론에서는 논쟁적인 주제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루터파나, 쯔빙글리나, 불링거도 상당히 근접할 수 있는 논의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찬찬히 배우고 각각의 논의를 상호 적용시켜 보면 아주 분명한 개혁파적인 이해가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승천 이후의 그리스도의 존재와 관련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신학적 문제이다. 하늘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는 그의 인성으로서는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다. 그러나 주님은 신성으로는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실 수 있고, 약속하신 바와 같이 우리와 항상 같이 하신다. 개혁 신학을 하던 우리의 선배들은 이 점을 아주 분명히 천명해 왔다. 개혁파 신학은 신성은 신성이고, 인성은 인성(Gott ist Gott, Mensch ist Mensch)이라는 원리에 끝까지 충실했기 때문이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루터파 신학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부활 승천 이후에는 인성에도 신성의 성질이 적용될 수 있어서 그리스도의 인성도 신성과 같이 어디에나 다 있을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사이의 본질적인 속성교류(communicatio idiomatum)는 인정할 수 없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은 이런 개혁파의 전통을 잘 반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매우 분명하게 이점을 선언하고 있다: 그의 인성으로는 그는 더 이상 땅 위에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7문답). 따라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와 따로 거하는 것이다. 그의 인성은 하늘에 있고 우리는 이 땅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신성은, 인성과는 달리, 시공을 초월하신다. 이것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신성은 제한되어 있지 않고 어디에나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가 취하신 인간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48문답 상)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신성은 하늘에 계시면서도 동시에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다. 이렇게 그의 신성은 그의 인성 밖에서도(extra humanum) 역사하시고 작용하시는 것이다: 그의 신성과 엄위와 은혜와 영으로는 그가 그 어느 때에도 우리에게서 떠나 계신 때가 없는 것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7문답).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 밖에서도 역사하고 사역한다는 이런 주장은,

칼빈주의자들이 열심히 주장하는 것이었으므로, 루터파 신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칼빈주의 신학이 주장하는 밖에서”(extra Calvinisticum)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을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오해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성은 그의 인간성 안에 덜 있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인격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라고 잘 설명하면서 오해를 방지하고 있다(48문 하).

그러나 이것은 주로 칼빈주의자들이 강조한 것이지만 칼빈주의자들만이 하는 주장이 아니고 성경이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교훈의 하나이다. 예를 들자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의 사역을 하는 제자들과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고(28:20), 그 이전에 가르치실 때에도 주의 이름으로 치리를 하기 위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18:2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신성으로 오늘도 하늘에 계시면서도 동시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의 신성으로 그는 교회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신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6문에서 49문답의 내용도 성경의 가르침에서 온 것이고, 역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있으나 신성은 신성이고 인성은 인성임을 분명히 천명한 칼케돈 신조(451)에 충실한 고백인 것이다.

그리고 오래 전에 칼빈이 그의 기독교강요가운데서 이런 입장을 잘 표현했으므로 이점에 있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칼빈의 견해를 잘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의 다음 주장과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의 이 부분을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비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을 떠나지 아니하시면서, 동정녀의 태에서 태어나시고, 땅을 거니시며, 십자가에 달리시기를 원하시는 방식으로 하늘에서 내려 오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은 계속해서 당신님이 처음부터 그리해 오셨던 것처럼 온 땅을 가득 채우셨던 것이다.

이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입장을 성찬에 넣어 적용하면, 그리스도께서 인성으로 성찬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성찬에 함께 하신다는 영적임재설이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성찬에서는 이런 결론을 유도하면서 논의하거나 답하지 않는다.

천주교도가 아니면 누구나 성찬에 같이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강한 성경적 입장이 부드러운 표현 속에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안에 들어와 성경적 가르침을 잘 받도록 하는 교육의 과정이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성경적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과하게 표현하지 않아 사람들을 그 안에 끌어들여서 잘 교육하는 방식이 예정(豫定)과 관련한 논의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다음 절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논의에로 나가 보기로 하자.

3. 선택 문제에 대한 강함과 부드러움

겉으로 보기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어떤 한 문답을 선택 문제에 대해 할애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마치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는 듯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선택에 관심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첫째는 선택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교회가 무엇인지와 관련해서 거룩한 공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에 대해서 당신이 믿는 바는 무엇입니까?”라고 묻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다:

() 나는 세상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온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그의 성령과 말씀을 통해서,

참된 신앙의 연합 가운데 있는 선택된 공동체

당신님을 위하여 영생을 하도록

모으시고, 보호하시며, 보존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54문답,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

또한 그리스도 승천의 유익과 관련하여 52문에서는 종국적으로 나와 그의 모든 택자(擇者)들을 그가 그와 함께 하늘의 기쁨과 영광으로 취하여 들이실 것이라는 위로를 줍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끌로스터 교수는 이런 두 문답을 잘 언급하면서 한 문답에서 선택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선택 문제에서는 킬빈주의적이지 않다고 말하려는 논의가 있을 수 없는 것임을, “1541년에 고백된 제네바 요리문답도 역시 어느 한 문답에서 선택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지 않으나 사실 선택 문제를 함의하고 있지 않는가하고 논의한 바도 있다.

둘째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전반의 분위기가 선택을 전제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아주 명확한 선택에 대한 입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논의를 하면서 매우 자명한 것 같이 스쳐 지나가면서 논의하는 방식으로 이 문답을 배우고 같이 고백하는 사람들을 성경을 따라 선택을 자명한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부드러움 뒤에 숨어 있는 강한 성경적 입장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배후에 있는 것이다.

4. 권징 문제에 대한 강함과 부드러움

다른 것에 비해 권징 문제에 대해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83-85문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논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읽어 보면 성경을 따라서 그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잘 드러내어 우리가 말하는 강함과 부드러움의 전형적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83-85문답을 그대로 인용하는 일로부터 시작해 보자:

(83 )(천국의) 열쇠의 직임(職任)(The Office of the Keys)이란 무엇입니까?

() 거룩한 복음의 선포와 교회의 권징(勸懲)입니다.

이 둘로써 천국이 신자(信者)들에게는 열려지고

불신자(不信者)들에게는 닫히는 것입니다.

(84 ) 어떻게 천국이 거룩한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열려지고 닫히게 됩니까?

()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하면,

모든 참 신자들 각자에게

그들이 복음의 약속을 참된 신앙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그들의 모든 죄를 참으로 용서하신다고 선포하고,

공적으로 선언함에 의해서

천국이 열려집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모든 불신자들과 위선자들에게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정죄(定罪)가 그들에 머물러 있으리라고

선포하고 공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천국이 닫힙니다.

현세에서나 오는 세상에서

이 복음의 증언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85 ) 어떻게 천국이 교회의 권징(勸懲)에 의해서 닫히고 열려집니까?

()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하면

그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면서도 비기독교적인 가르침을 고백하거나

비기독교적인 삶을 사는 이들과,

반복적인 형제로서의 사랑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오류들과 사악한 삶을 버리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교회나 (교회의) 적법한 직원들에게 알려져야 하고,

그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권고에 대해서도 반응하지 않으면

(교회의) 직원들은 그와 같은 이에게는

성례를 베풀지 않음으로써

기독교적 교제에서 배제해야 하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배제시키십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이라도 참된 변화를 약속하고 나타내 보이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지체들로서

다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이 내용을 잘 살펴보면,

결국 교회의 권징은 회개를 위한 기독교적인 권징”(Christian discipline toward repentance)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권징(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는 권선징악)’은 형제 사랑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1) 그리스도인다운 교리의 고백과 (2) 기독교적인 삶을 위한 일이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로 존재하는 이유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동체 안에서 그 교리와 삶이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드러날 때 반복적인 형제로서의 사랑의 권고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성령 안에서 성경대로 하는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권하는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항상 문제가 있지만 그것에 대해서 성경사랑을 가지고 권면하여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동안의 사랑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 권고가 받아들여 지지 않을 때에 는 회개 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대상자들을 기독교적 교제에서 배제시키는 것인데 이를 성례를 베풀지 않음을 통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성례가 성도 교제의 중요한 방식의 하나라는 것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들이라도 참된 변화를 약속하고 나타내 보이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지체들로서 다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라는 말을 덧붙임으로 권징이 권징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회개를 위한 것임을 아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권징 과정 전체가 사랑과 기도의 분위기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드러낸다. 그런 교회 공동체는 은혜 가운데 잇는 힘 있는 공동체이다. 그것이 바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강함과 부드러움의 한 전형일 것이다.

5. “오직 성경문제에 대한 강함과 부드러움

마지막으로 이 모든 교리적 실천적 주장과 함의들이 모두 성경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주 자명하게 하면서도 이것을 현저하게 밖으로 드러내 놓고 논의하고 있지 않음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특유의 강함과 부드러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내용으로 보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못지않게 오늘 우리에게는 성경에 있는 것만이 하나님의 특별 계시이고, 따라서 요한계시록까지 신약의 계시(啓示)가 다 주어지고 난 후에는 더 이상의 새로운 계시(啓示)는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를 아주 명백하게 천명한다.

아마 한 세기 후의 개신교회(1647)는 좀 더 분명하게 이를 분명히 천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강한 표현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들은 이제 중지되어 버렸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항 마지막 부분).

또한 이 성경에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 아니면 인간들의 전통에 의해서이든 아무 것도 어느 때를 막론하고 더 첨가할 수가 없다”(6).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렇게 명확하게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모든 교리에 대해서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를 질문하면서 항상 성경으로부터 그것을 배우고 그것을 고백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제 3 문에서 당신은 어떻게 당신의 비참함을 알게 됩니까?”라고 묻고서는 하나님의 율법이 나에게 가르쳐 줍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또한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묻고 대답하는 21문에서도 성경에 대한 믿음이 잘 드러나 있다: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말씀 가운데서

계시하신 모든 것이 참되다는

확실한 지식일 뿐만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성령님에 의해서 내 안에 창조된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힌 확신이기도 한데,

이는 순전한 은혜로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 아니라,

나에게도 내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원히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하시고

구원을 허락하셨다는 확신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21 문답,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

참된 신앙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말씀 가운데서 계시(啓示)하신 모든 것이 참되다는 확실한 지식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힌 확신을 말하는 데서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곧 성경에서 가르치신 것은 무엇이든지 참되다는 믿음을 뿌리 깊은 확신으로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성경에 대한 진술은 숨어 있고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매우 강력한 것이다.

이것은 이를 설명하는 우르시누스의 설명에서도 동일하며,

프레데렉 3세의 아우그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의 답변 내용과 태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6.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유난히 강한 부분

이렇게 여러 면에서 부드럽게 표현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아주 강하게 말하는 부분이 있으니 그것은 특히 칭의와 선행을 말하는 부분과 천주교회의 화체설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이다.

이 두 부분에서는 아주 강하게 개신교적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

6-1. 이신칭의와 선행 문제

60문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까?” 또는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작성자들의 이신칭의 이해가 잘 나타나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에 의해서 입니다.

비록 나의 양심이 모든 하나님의 계명에 반해서 심각하게 죄를 지었음과

그 어느 하나도 결코 온전하게 지키지 못했음에 대해서

나에게 가책을 주고

또한 지금도 나에게 모든 악으로 향하는 성향이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을 만 하지도 않지만

순전한 은혜로써

하나님께서는 마치 내가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것처럼

또 죄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또한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서 복종하신 것처럼

내가 온전히 복종한 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만족, , 거룩하심을

내게 허락하시고 내 것으로 여겨주십니다.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는

이 하나님의 은사를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0문답)

여기 잘 나타나 있듯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만족, , 거룩하심을 우리에게 전가하여 주심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작성자들은 아주 분명히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 문답인 61문답에서도 이점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 작성자들이 이신칭의(以信稱義) 개념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잘 보여 준다.

(61 ) 당신은 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합니까?

() 나는 나의 신앙의 가치에 근거해서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만족, , 거룩함만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이기 때문이며,

나는 오직 믿음으로만

그것들을 받고 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1문답,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

이런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잘 알고 있듯이 이런 이신 칭의 이해가 선행을 무시하게 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면서 이와 관련된 오해들을 다 제거하는 작업도 잘 하고 있다.

(64 ) 그러나 이 교리[以信稱義의 교리]는 사람들을

부주의하게 하고 세속적으로 만들지 않습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으로 그리스도에게 심겨진 사람들은

반드시 의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의의 열매도 사실은 전혀 의()가 되지 않음을 성경에 근거해서 잘 말하면서 명확히 성경적이고 개신교적인 견해를 잘 드러내고 있다:

(62 ) 왜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전혀 의()가 될 수 없는 것입니까?

()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철두철미 완전하고

하나님의 법에 전적으로 따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최고의 선행조차도 모두 불완전하고,

죄로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6-2. 천주교의 화체설에 대한 비판

또 한 부분, 천주교 화체설에 대해서는 아주 강력한 비판이 주어지고 있다.

성찬에 대해서 잘 설명한 후에 78문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과 답이 주어져 있다:

(78 ) 그렇다면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실재적인 몸과 피가 되는 것입니까?

() 아닙니다.

마치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하거나,

그 자체가 죄를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표(), 확신[印號]이듯이,

주의 만찬의 떡도 그리스도의 실제적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성례의 성질과 언어에 따라서

그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를지라도 말입니다.

이에 더하여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80문이다.

이 부분은 매우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80 ) 주의 만찬과 교황적 미사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 주의 만찬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 번에 이루신 한 번의 희생 제사로 우리의 모든 죄들에 대한 온전한 사죄가 주어졌음을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즉 그 몸으로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경배를 받으시는 그리스도께 접붙여졌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회의 미사(Missa)는 사제들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위해서

날마다 (제사로) 드리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수난에 의해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떡과 포도주의 형태 아래 그리스도께서 신체적으로 임재(臨在)해 계시며,

따라서 그 안에서 경배를 받으신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사(Missa)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한 희생 제사와 수난에 대한 부인이며,

따라서 저주받을 우상 숭배입니다.

이 강한 표현이 나와 있는 제 80 문은, 초판(15631)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가, 15633월 이전에 출간된 2판에서 도입되었고,

같은 해 4월에 나온 것으로 여겨지는 3, 에서 확대된 것이다.

이것을 포함하여 11월에 나온 4판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공인 본문으로 여겨진다.

이는,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15621117일에 미사 교리를 확정한 것에 대한,

하이델베르크 개혁신앙인들의 반응으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카스파 올레비아누스는 자신이 제 2 판에서 80문을 덧붙이자고,

선제후 프레데릭에게 강력히 권고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칼빈에게 보낸 바 있다.

프레데렉 선제후 자신도 이점에서 매우 강력한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80 문답은, 37-44문답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결되었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다.

그런데 “(천주교회의) 미사는 사제들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위해서 날마다 (제사로) 드리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수난에 의해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치는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히브리서 10:18 같은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과 위반되는 것이다.

또한 미사 개념은 떡과 포도주의 형태 아래 그리스도께서 신체적으로 임재(臨在)해 계시며, 따라서 그 안에서 경배를 받으신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한 희생 제사와 수난에 대한 부인이며, 따라서 저주받을 우상 숭배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천주교인들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희생 제사와 수난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들이 행하는 미사 개념을 깊이 생각하면 그런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작성자들은 명백히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450년 전에 천주교회와의 대립이 항상 있을 때이므로 그런 표현이 나타났다는 식의 표현으로 성경적 가르침을 흐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 안에도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부인과 천주교회의 미사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심각하게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절충과 양보의 분위기는 성경적이지도 않고, 하이델베르크적 유화성을 지닌 것도 아니고, 신앙적이지도 않고, 종교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7. 마치면서: 신학함과 기독교적 성품에 주는 함의

이상(以上)에서, 우리들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 작성과 선언 배경에서나 성찬 이해나 예정 문제나 치리 문제나 오직 성경문제에 대해서 사실은 매우 강한 개혁파적인 강조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움 신앙고백의 배후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개혁주의적 신앙고백이면서, 그 어떤 요리문답이나 신조 보다 개신교 종교개혁의 진정한 에큐메니칼적인 요리문답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칭의 문제나 그리스도인의 선행과 칭의 관계를 말할 때와 천주교의 성찬 이해와 관련해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전혀 부드럽지 않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와는 같은 신앙을 고백할 수 없고, 같이 예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이해가 확연히 달라 복음이 순수하게 전달되지 않고, 성경적 성례가 바르게 집행되지 않는 곳은 교회라고 할 수 없다는 입장이 천명된 것이다.

그러나 이신칭의를 참으로 믿는 개신교인들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말하는 성경에 충실한 이 내용을 다 같이 고백하게 할 수 있고, 또 그리해야 한다. 흔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정신은 루터의 친밀성과 멜랑흐톤의 자애로움과 칼빈의 열정을 연관시킨 것이라는 말도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에큐메니칼적인 신앙고백, 즉 성경적-개신교적-에큐메니칼적인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적용에로 나아가서,

이런 독특성을 지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어떤 점에서 우리의 신학함과 우리의 어떠함에 좋은 모델이 된다는 점을 마지막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의 신학도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 오직 성경에서 결론지어진 명확히 개혁파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내용에 관한 한,

우리들은 그 어떤 절충이나 양보를 해서는 안 된다.

초두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명확한 개혁파적 고백을 하는 것에 대해서 독일 전역에서, 따라서 유럽 전역에서 강한 반발이 있는 상황에서도 프레데렉 3세는 하이델베르크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과 함께 명확한 개혁 신앙적 선언을 하는 데 조금의 주저도 하지 않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오직 성경에 근거한 신학적 진술을 하는 것을 이 세상이나 세속적인 교회는 전혀 환영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양보와 절충을 하여 함께 가는 길을 마련하자는 것이 이 세상과 이 세상을 따르는 세속화된 교회와 신학의 요구이다.

450년 전 선배들은 아주 명확하게 성경적인 입장을 천명하고 고집하면서 천주교회의 미사를 정죄할만한 우상 숭배(a condemnable idolatry)”라고 명확히 말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천주교에서 드리는 미사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린 희생제사와 수난을 부인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정죄할만한 우상 숭배이다”(80문답).

그런데 오늘날 심지어 미국 기독교 개혁 교회(CRC) 조차도,

80문을 괄호에 넣고서 이는 고백하지 않아도 좋으며,

천주교회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 사실은 고백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상을 주는 결정을 한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오늘날 일부 복음주의 권에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부인하는 견해와 함께 이신칭의(以信稱義)가 꼭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는 그 때의 시대적 정황 가운데서 잘못 이해하거나 한 편을 너무 강조해서 나온 주장이라는 목소리가 큰 힘을 얻어 가고 있는 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정황이다.

이 시대에도 명확히 천명할 것은 성경에 근거해서 아주 분명한 입장을 명확히 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독교회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마 우리 시대에 대표적인 문제로 종교다원주의나 WCC적인 교회연합운동의 문제,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부인하는 입장들, 그리고 새로운 계시가 계속된다고 주장하는 여러 이단(異端)들의 흥기에 대한 반응에서는)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아주 명확하고 강한 입장을 천명하면서도, 동시에 그 외에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될 수 있으면 부드럽게 표현하는 것이 연약한 교회를 돕는 것이다.

아주 부드럽게 진술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통해서 바른 신앙을 가지고 더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신조(信條)의 역할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의 신학도 역시 그런 성격을 지닌다면 그런 신학은 교회에 큰 유익을 주는 신학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적 인격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방식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복음을 믿는 기독교적 인격은 점점 성숙해 가면서, 그것이 진정 기독교적 인격이라면 (1) 결국 아주 분명한 성경적 입장을 드러내야만 한다. 그러나 (2) 그런 성경적 인격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인격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가장 부드러우나 그 인격과 관련하다 보면 가장 성경적 입장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고, 그런 방향을 나아가게 되는 그런 인격이 참으로 기독교적인 인격일 것이다. 이런 저런 강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이 더 갈망하게 되는 것이 이런 인격인 듯하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진술 방식으로부터 우리는 이런 함의도 발견하면서 우리 모두가 그런 성경대로의 바른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 갈 수 있기를 원한다. 이런 점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저 우리의 믿는 바를 가장 성경적으로 바르게 고백한 좋은 고전적 신앙 고백(a classic confession of faith)일 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학함과 인격의 모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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